<표주박 첫 번째 사진속 글>
밀봉을 떼어보아라
<표주박 두 번째 사진 및 꼬깃꼬깃 접은 메모지>
생산연도 1983 10월3日(표주박을 생산한 연도인 듯).
<첫번째 메모지 내용>
내 아들 며느리 일동 앞
이 글을 읽고서 화는 내지 말고 잘 새기도록 하여라.
아무 생각없이 엄마가 생각나는 대로 부탁한 말이니까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여라. 너희들 한 자리 모아놓고 밥먹을 때가 제일 즐거웠다.
<2번째 메모지 내용>
이(표주박) 속에 5장이 들어있으니까 다 꺼내서 보아라.
엄마 아버지 너희들한테 신세만 지고 가서 미안하구나 항상 주어본 게 없고 받아만 쓰다 가니 미안하다. 항상 건강을 빌면서 떠난다.
<3번째 메모지 내용>
엄마 소원은 너희 7남매가 의좋게 화목을 다지면서 살아가기를 축원한다.
꼭 실천을 하여라. 애들 교육에도 정서적으로 배움을 실천해라.
1992年 엄마 부탁이다.
<4번째 메모지 내용>
그래야만 촌수도 잘 알고 가족이 무언가를 배울 것이다. 현대에다 유교 사상을 가미해서 살도록 하여라. 이 세상에는 인간 가난(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듯)이 제일 무서운 것이다. 재물도 중하지만 외로움도 중하다.
제호 관호 민호에게 부탁이다.
<5번째 메모지 내용>
1992년 1월17일
엄마의 가훈
정직, 우애, 화목
큰 며느리 부탁한다.
<6번째 메모지 내용)
인간 가난이 제일 외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내 살(혈육을 의미하는 듯)을 아껴주어라.
항상 손아래 동생(동서)들을 사랑해주기 바란다. 엄마(시어머니) 바램이다.
<7번째 메모지 내용)
1992年 1月1日
엄마의 가훈 정직 우애 화목
둘째 며느리에게 부탁한다.
이 글을 읽고서 서로 바꾸어서 또 읽어보아라. 어머니에게 오해가 없도록(나를 오해하지 말라는 의미인 듯)
<8번째 메모지 내용>
엄마(시어머니) 부탁이다.
이 세상에는 이 세상에는 인간 가난이 제일 외로운 법이다. 그러니까 돈도 중하지만 내 살을 아껴주어라. 항상 큰집을 엄마처럼 생각하고 지내도록 하여 다오.
둘째 며느리에게.
<9번째 메모지 내용>
1992年 1月17日
엄마의 가훈 정직 우애 화목
셋째 며느리 부탁한다.
<10번째 메모지 내용>
엄마 부탁이다.
인간 가난이 제일 외로운 것이다. 그러니까 항상 내 살을 아껴주어라.
항상 큰 집을 존경해라. 큰 집을 어머니로 생각해라.
<11번째 메모지 내용>
상욱, 상준, 상훈, 상원.. 할머니 부탁이다.
너희 4형제는 큰집 상규 형을 제일 큰 형으로 받들어 다오. 너희는 넷이고 상규 형은 하나다. 상규 형은 할머니가 볼 때 착해빠져서 너희들이 항상 힘을 합해서 집안 일을 도모해 나가도록 하여라. 꼭 부탁이다.
<12번째 메모지 내용>
험한 세상이 변해도 너희들은 꼭 할머니 부탁을 실천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상규 너는 동생들을 사랑하고 모든 일을 할 때 동생들 하고 오손도손 상의하기를 부탁한다.
사랑하는 내 손자들아 할머니 부탁이다. 건강하게 잘 자라다오. 할머니는 간다.
1992年 1.17日
*편집자 주
이 유언장의 주인공은 1927년 11월3일 태어난 오남순 할머니. 1992년 1월17일 아들, 며느리, 손자들에게 당부하는 간곡한 글, 즉 유언을 쓴 뒤 훼손을 방지하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표주박 속에 넣고 갈무리했다.
당시 오 할머니는 65세로 건강이 좋질 않아 곧 세상을 떠날 것으로 지레 짐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건강을 회복했으며 이 ‘표주박 유언장’의 존재를 잊고 있다 29년만에 막내 아들이 이를 극적으로 발견한 것이다.
유언장 글 가운데는 맞춤법과 문법이 틀리는데가 종종 있지만 이런 점들이 오히려 글의 진정성과 호소력을 배가시키고 있다.
이 유언장 속에서 오 할머니는 아들들에게는 아주 짧게 말한 반면 며느리나 손자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길고 절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유언장의 상당 부분은 며느리들에게 전하는 말들이다. 큰 며느리에게는 손 아래 동서들을 사랑으로 감싸라고 하고 두, 셋째 며느리들은 맞 동서를 시어머니처럼 존경하라는 부탁을 하고 있다.
옛 어른들은 “집안이 잘 되려면 며느리가 잘 들어와야 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곤 했다. 집안이 화목하려면 아들들의 노력보다는 며느리들이 서로 우애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오남순 할머니도 옛 어른들의 말처럼 집안이 제대로 되려면 아들들보다는 며느리들의 존재가 더욱 중요하다고 판단, 며느리들에게 간곡한 당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 나어린 손자들을 상대로도 서로 존중하고 화목하게 살아가기를 당부하는 내용이다.
할머니의 아들들은 이제호, 이관호, 이민호 등 3명이다. 이 유언장에는 둘째 이관호씨의 아들인 상준, 상원, 셋째 이민호씨의 아들 상욱, 상훈에게 “너희들은 넷이고(형제가 있다는 의미인 듯) 상규(맏형 이재호씨의 외아들) 형은 혼자인데다 너무 착해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니) 도와주어야 한다고 당부하고 있다.
상규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생활하다 돌아왔으므로 한국 실정이나 환경을 제대로 몰라 할머니가 볼 때 위태위태하므로 사촌 동생들이 힘을 합쳐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 할머니의 이같은 당부에는 당시 ‘종손’ 혹은 맏손자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배려가 배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유언장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딸이나 사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오 할머니는 3남4녀를 두었고 모두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그러나 이 유언장에는 어디에도 딸과 사위에 대한 걱정이나 당부가 없다. 이는 딸은 ‘출가외인’(시집가면 친정과는 관계없는 피붙이)이라는 예전 사상에 지배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딸과 사위에 대한 애정과 걱정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이같은 유언장 즉 남에게 보여질 문서에 출가외인을 언급하는 것이 어딘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애써 그 사랑을 외부로 나타내서는 안된다는 의도적 엄격함, 자제심의 발로가 아닌가 하는 해석을 해본다.
그러나 오남순 할머니는 65세에 유언장을 작성하고도 29년을 더 건강하게 사시다 2021년 3월16일 94세를 일기로 돌아가셨다.
유언장에 보면 “엄마 아버지는 너희들한테 신세만 지고 가서 미안하다. 항상 주어본 게 없고 받아만 쓰다가 가니 미안하다”고 부모로서 풍족하게 뒷바라지 못한 한을 절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오남순 할머니의 남편 이종린(1924년생)씨는 대한민국 경찰이 창설된 다음해 경찰관에 투신했다. 주로 충북 진천군 관내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경위로 진급하지 못해 계급 정년에 걸려 50세에 경사로 퇴임했다.
경찰관 시절에도 박봉이었고 퇴임 후에는 농사를 지었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클 수 밖에 없었다.
7남매를 먹이고 입히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같은 이유로 오남순 할머니는 ”엄마 아버지는 너희들 한테 신세만 지고 가서 미안하다. 항상 주어본 게 없고 받아만 쓰다가 가니 미안하다“는 한서린 발언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아들과 딸들은 다 번듯하게 자라 주변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장남은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교수로 정년을 마친 뒤 차병원 첨단연구암센터장으로 근무하다 은퇴했다.
차남은 현대건설의 엘리트 사원으로 근무하다 캐나다 회사로 스카웃돼 캐나다 국적을 취득했으나 지난해 영구 귀국했다.
삼남은 편집 디자인 전문회사를 운영하다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현재는 개인 차원에서 편집 디자인 관련 재능 기부를 하고 있다.
3형제는 물론이고 4명의 자매들 역시 제 몫을 훌륭히 해냈을 뿐 아니라 이들 7남매는 무척 화목하게 지낸다.
오 할머니가 가훈으로 강조한 정직, 우애, 화목이 그대로 실천돼 지금도 이들은 거의 정기적으로 만나며 형제애를 쌓아가고 있다.
이번 표주박 유언장을 발견한 계기도 형제애가 바탕이 됐다.
말년에 오 할머니가 고령으로 보살핌을 받게 되자 막내 아들 민호씨가 몇 년간 자신의 집에서 수발을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건강하던 시절 살았던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학소리 구가를 수리, 청소했다. 이 집은 큰 형님 소유지만 막내 민호씨의 농학박사 큰 아들이 여기서 살면서 인근에 있는 민호씨의 큰 누나 소유 논에서 스마트 농업을 하고 싶다고 해 수리를 하게 된 것이다.
청소 도중에 다락방에서 유언장이 들어있는 표주박을 극적으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오 할머니는 정직, 우애, 화목을 강조했던 29년전 자신의 유언이 후손들의 가슴속에 깊이 간직되고 있다는 사실에 흐뭇해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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