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플레이어 피아노가 뭐길래?

지하실 속 피아노 꺼내려다 2층 단독 주택 지붕을 내려 앉힐 뻔 하기도

김인규 기자 승인 2022.08.08 16:09 | 최종 수정 2022.08.17 09:52 의견 0
플레이어 피아노. 일번적인 피아노의 상단 안쪽 공간에 악보롤을 걸어놓고 있다. 연주자가 페달을 밟으면 악보롤이 돌면서 아름다운 선율을 내보낸다. 일반 피아노처럼 연주자가 건반을 치면서 직접 연주할 수도 있다.

<페기 아줌마가 알려준 플레이어 피아노>

어떤 일에 지나치게 몰두하다 보면 합리적 판단이 마비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주변에서 보기에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그런 상황 말이죠.

이런 상태를 가리켜 흔히 "필이 꽂혔다"거나 "돌아 버렸다"라고들 하죠. 살아오면서 가끔 '돌아버린 짓'을 한두번 한 게 아니지만 플레이어 피아노를 구하려 했을 때만큼 해까닥한 경우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에 식은 땀이 주르르 흐릅니다. 까딱 잘못 했으면 멀쩡한 2층 집을 무너뜨릴 뻔 했으니까요.

한창 앤틱 수집에 물불을 가리지 않을 때 였습니다.

하루는 앤틱 중간 도매상인 페기 아줌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킴! 당신이 찾고 있는 플레이어 피아노가 하나 나왔어요. 잘은 모르지만 피아노 이름이 '스타크'라고 하던가?.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이 피아노는 어느 가정집 지하실에 있는데 워낙 무거워 구입하는 사람이 직접 갖고 나가야 한데요 어때 관심이 있어요?"

페기는 눈동자가 유난히 파랗고 흰 피부로 봐서 핀란드나 북구 출신인 것처럼 보이는 미인 아줌맙니다.

성격이 불같아서 거래하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싶으면 칼로 무우자르는 제스추어와 함께 "노 모어 딜"이라고 일방적으로 대화를 끊어 버리곤 해 내 속을 뒤틀리게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페기는 나를 제법 반갑게 여기는 눈치였습니다. 자주 웃음을 보내 주기도 하고요.

때로는 함께 간 사람이 "저 아줌마 당신 좋아하는 것아니야?"며 농반진반의 말을 할 정도로요.

페기와 나 사이에 혹 '모종의 섬싱'이 있지나 않았을까하고 기대하는 이들에겐 실망시켜 미안합니다. 그런 일은 전혀 없었으니까요.

페기가 나에게 제법 호의를 보내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관심을 갖거나 찾는 앤틱의 종류는 다른 미국인 고객들이 선호하는 것과는 달랐으니까요. 즉 잘 안 팔릴 물건을 내가 처리해주는 만큼 내가 반갑고 고마울 수 밖에요.

하여튼 이런 인연으로 해서 페기 아줌마는 내 취향, 내가 찾는 물건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플레이어 피아노 역시 내가 오래전부터 물어보던 물건인 만큼 나에게 연락을 해온 것입니다.

플레이어 피아노를 아는 한국인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플레이어 피아노는 보통의 피아노와 달리 피아노 상단 안쪽 공간에 악보롤을 걸어놓는 장치가 있습니다. 연주자가 페달을 밟으면 악보롤이 돌면서 아름다운 선율을 내보냅니다.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도 페달을 밟으면서 연주하는 시늉만 해도 관중들은 프로 연주자로 착각하게 됩니다. 물론 악보롤을 고정시키고 전문 연주자가 건반을 치면서 직접 연주할 수도 있는 악깁니다.

이런 플레이어 피아노는 근 70~80년전에 생산이 중단됐고 가정집에 두기에는 덩치가 커 대부분 폐기된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미국에서도 구하기 힘든 앤틱입니다.

<출구가 마땅찮은 지하실에 갖혀있는 플레이어 피아노>

약속한 날을 기다려 드디어 집주인과 함께 플레이어 피아노가 있다는 지하실 방으로 내려 가봤습니다. 플레이어 피아노의 주인은 영화배우 어네스트 보그나인을 꼭 빼다닮은 할아버지와 붉은 머리의 똥똥한 할머니였습니다.

피아노를 한번 움직여 보려 했습니다. 요지부동인 것이 “보통 무거운 게 아닌데. 운반하는데 고생깨나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디다.

줄자를 빌려 피아노와 지하실 계단 및 문을 재어보았더니 빠듯하게 들어낼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피아노가 고장이라는 겁니다.

보그나인 할아버지에게 고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예전에는 잘 됐는데 언제부턴가 이렇게 됐네”라며 “나는 어떻게 고치는지, 어디서 고치는지도 잘 모르겠소”라는 대답만 들었습니다.

다음날부터는 한동안 플레이어 피아노를 고칠 수 있는 사람을 찾느라고 분주했습니다. 뉴욕의 한인들 가운데는 이를 손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런 피아노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며칠간 인터넷 등을 뒤져 겨우 플레이어 피아노를 수리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아 통화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거주하고 있다는 플레이어 피아노 수리 전문가는 “그 피아노는 나 역시 한번도 본적이 없는 희귀한 것이어서 무척 보고 싶다. 꼭 내가 한번 수리해보고 싶고 할 수 있을 것같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어떡하든 이 피아노는 내 것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욕심이 더욱 치솟는 겁니다.

일주일 뒤 특별히 부탁해 힘쓰는 이삿짐 인부 4명과 함께 보그나인 할아버지 집 지하실을 다시 찾았습니다.

이들은 줄자로 이리저리 재보더니만 “지하실 문을 나갈 수 있을 것같다”며 피아노를 계단을 통해 들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계단은 무사히 올라가 문을 나섰으나 문앞과 건너 벽 사이의 공간이 좁아 피아노가 돌아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더우기 플레이어 피아노는 엄청나게 무거운 롤러 뭉치를 장착하고 있어 움직이기가 보통 힘드는 게 아니었습니다. 무게와 좁은 통로 때문에 꺼내기를 포기하고 다시 지하실로 피아노를 원위치시켰지요.

이삿짐 인부들 말로는 지하실 문 왼쪽 벽을 약간 허물면 나갈 수 있겠다고 하기에 보그나인 할아버지께 말씀을 드렸죠. 물론 허문 벽은 피아노를 꺼집어 낸 뒤 다시 원상복구해드리겠다는 약속도 함께요.

보그나인 할아버지는 약간은 당혹해하면서도 그렇게 하자고 허락을 해줍디다.

나는 내보낼 수 없는 피아노를 들일 때는 어떻게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물어보았지요. 대답을 듣고 터져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이 집을 지은 것은 보그나인 할아버지의 할머니였고 그 할머니는 당시 빈터에 자기가 평소 아끼던 피아노를 갖다 놓은 뒤 지하실, 1층, 2층을 차례로 건축하게 했다는 겁니다. 미국에서는 우리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렇지만 웃음터지게 하는 일들과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것 역시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니(물론 할아버지도 포함되겠지요)로부터 물려받은 플레이어 피아노는 물론이고 살던 집을 떠나 이제 플로리다로 가기로 했답니다. 보그나인 할아버지는 그간 이 집에서만 살아왔다는 얘기지요.

투자가 됐든 투기가 됐든, 아니면 직장 문제나 자녀 교육 때문 등으로 수년에 한번씩 집을 옮기는 우리와 비교해보면 얼마나 우직한 주거 문화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또한 미국서는 부모가 직접 자식에게 보다는,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독특한 상속 문화의 한 단면도 볼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 꺼내려 멀쩡한 벽까지 허물고>

또 일주일을 기다려 이번에는 이삿짐 센터 인부는 물론이고 건축 인부까지 대동하고 그 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보그나인 할아버지에게 인사겸 통보를 한 뒤 가급적 눈길을 마주치지 않은 채 지하실에서 올라온 1층 문 옆 벽채를 헐기 시작했습니다.

옆눈으로 보니 보그나인 할아버지는 지하 계단 밑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디다. 가끔 신음소리와 함께 이마에 흐르는 진땀을 닦더군요. 집 주인 입장에서는 멀쩡한 벽, 더욱이 자신과 함께 늙어온 집의 일부를 허무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아팠겠습니까.

벽면을 헐어낼 수 있는데까지 헐고 피아노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빠져나올 것으로 모두들 예상했으나 불과 10여cm의 폭이 모자라 피아노가 역시 돌아나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벽은 더 이상 헐 수가 없었습니다.

미국 집들은 한국과 달리 대들보나 기둥을 쇠기둥으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이상 벽을 헐려면 지하에서 1, 2층으로 이어지는 쇠기둥을 잘라내야 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어떡하든 피아노는 빼내야 한다’는 한가지 생각에만 박혀, 이미 ‘돌아 버린’ 상태에 있었습니다. 보그나인 할아버지에게 가서 의도적으로 아주 당당하게 얘기했습니다. “보다시피 저 쇠기둥 때문에 피아노를 빼낼 수 없으므로 다음주에 와서 기둥을 자르겠습니다. 물론 건축 전문가에게 이 일을 시키겠으니 그렇게 아십시오”.

보그나인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그렇게 하라는 말은 했지만 불안이 가득한 표정은 감추지 못했습니다.

또 일주일 뒤 쇠톱을 휴대한 건축 인부들과 함께 그 집을 찾았습니다. 쇠기둥을 본 건축 인부의 얼굴에는 일순 불안한 표정이 스쳤습니다. 과연 쇠기둥을 자른 뒤 양옆으로 엇비슷하게 지지대를 임시로 거치한다 하더라도 2층과 지붕이 온전히 지탱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지 않는 듯했습니다.

나 역시도 약간의 불안감은 있었지만 설마 무슨 일이야 일어나겠느냐는 생각에 밀어붙이려 했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집이 위태로울 것같다는 판단을 했는지 보그나인 할아버지는 더 이상 작업을 하지 말라며 단호하게 선언합디다. 플레이어 피아노도 팔지 않겠다고 하고요. 몇차례 더 설득을 해보다 '미국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한번 마음을 먹으면 도저히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이 떠올라 어쩔 수 없이 포기했습니다.

본 정신이 돌아온 뒤 생각해봤더니 아찔합디다. 쇠기둥을 잘랐다면 지붕이 내려앉았거나 그렇지 않다면 최소한 집에 변형이 왔을 가능성이 컸을 겁니다. 더욱이 사람이라도 다쳤더라면 그 책임을, 그 비용을 어떻게 감당했겠습니까. 플레이어 피아노에 필이 꽂혀, 아니 돌아버려 벌였던 해프닝입니다.

이후에도 뉴욕 롱아일랜드를 가게 될 때면 그 집 앞을 일부러 지나가보곤 합니다. 흡사 맺어지지 못한 첫 사랑의 흔적이라도 발견하려는 사람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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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레이어 피아노; 연주자가 직접 건반을 치지 않고도 음악이 흘러 나오게 하는 일종의 반자동 피아놉니다. 점자처럼 된 두루마리 악보를 피아노 앞 기계식 박스에 걸고 페달을 밟으면 이 두루마리 악보가 돌아가면서 음악이 연주되게 하지요. 물론 보통 피아노처럼 두루마리 악보를 걸지 않고 연주자가 직접 건반을 치면서 연주도 할 수 있습니다. 1920년대까지 최전성기를 이루다 점점 사라져 이제는 거의 생산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2) 어네스트 보그나인; 이탈리아계 미국 영화배우.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프랭크 시나트라를 죽이는 배역을 맡는 등 악역 전문 배웁니다. 그러나 큰 덩치에 퉁방울 황소눈, 벌어진 앞니 등으로 어딘지 허점이 있어보이는 악인같은 인상을 줍니다.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히트 한 2년 뒤 출연한 '마티'로 오스카 주연상을 탔습니다.

(3) 미국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 주말 미국의 맥도날드 가게에 한번 가 보세요.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발견할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 손녀들이 마주 앉아 햄버거를 함께 먹는, 우리네에게서는 좀처럼 목격할 수 없는 모습 말입니다. 미국을 흔히 핵가족제도, 우리는 대가족제도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두 사회를 비교해보면 오히려 미국이 가족간의 관계, 정 등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끈끈함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특히 할아버지와 손자들은 평소에도 자주 교류를 합니다. 이런 풍토여서 그런지 상속도 할아버지가 손자들에게 자신의 부동산이나 재산 등을 물려주는 일이 잦습니다. 우리와는 사뭇 다른 풍속이라 할 수 있지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른 칼럼에서 구체적으로 한번 다루어볼 작정입니다

<daylightnews,kr 발행인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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