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10-결혼 승낙 못받자 가출 감행

김인규 기자 승인 2021.08.05 14:58 | 최종 수정 2021.08.08 23:55 의견 0

제대하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어머니가 얘기 좀 하자며 나를 건너방으로 데리고 갔다. 순간, 그녀와의 만남을 알고 있구나 하는 직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도 시침을 뚝떼고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네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기장 사건으로 드러난 그 여자를 다시 만나고 있다며”라고 바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그렇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네가 군대에 복무하고 있는 동안은 그 여자를 만났을지 모르나 지금부터는 안된다. 이제 복학도 해야 하고 그러고 나서는 취직도 해야 하므로 여자 만나고 할 시간이 없다고 본다. 그리고 솔직히 얘기하마. 그 여자애와는 더더욱 안된다”

“여자가 있으면 그 여자를 위해서도 더 열심히 공부할 수 밖에 없지요. 그리고 그 여자와는 안된다는 말은 뭡니까.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여자와 결혼하자고 약속까지 했어요”

“그 여자애는 심성도 착하고 이쁘고 집안도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는 우리집 장남이다. 누나들은 네보다 나이가 많지만 나중에 네가 누나들의 친정 역할을 해야한다. 특히 밑으로 동생 셋은 네가 보살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여자애는 몸이 너무 약할 뿐 아니라 흠이 있지 않느냐. 그런 애를 맏며느리로 받아들일 수 없다”

몇차례 더 언쟁을 벌였지만 어머니의 태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어머니가 반대하는 이유로 직설적으로 내세운 그녀의 핸디캡을 이해하고 결혼을 허락할 가능성은 전무하다는 판단이 섰다.

물론 내게는 그녀의 조그만 육체적 불편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듬어주고 위로해 주고 싶은 작은 상처에 불과했다. 남들이 어떻게 여기든 내 여자가 현재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그게 아니었다.

하루 동안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결론은 부모님 설득은 불가능할 것같고 잘못하면 그녀의 집으로 처들어갈 일도 생길 것이란 아찔한 생각도 들었다.

다음날 내복과 옷가지 세면도구 약간의 돈 등을 챙기고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내 방에 편지 한통을 남겼다.

“지금에 와서 그녀와 헤어질 수가 없다. 그렇다고 결혼할 형편도 아니다. 부모님의 명을 거역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당분간 부모님과의 연락을 끊겠다. 그렇다고 그녀와 함께 살림을 차리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 복학도 하지 않겠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한 3년간 돈을 모은 뒤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청송 구천 중학으로 향했다. 계획으로는 부산에 가서 임금을 많이 준다는 원양어선에 취업하는 게 가장 좋을 것같았고 그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보고 싶었다.

지금은 한 두시간이면 도착하는 청송이지만 당시는 드높은 계곡 도로를 따라 대여섯 시간을 시외 버스로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저녁에 그녀의 자취집에 도착했더니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맞아주었다. 제대했기에 자신을 보러 온 것으로 짐작한 그녀는 아주 기쁜 표정이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내 마음은 찢어지는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그러나 나도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그녀가 지은 저녁을 함께 비웠다. 그녀는 행복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이나 하자며 구천 중학교 옆 구천 초등학교 교청의 은행나무 밑 벤치로 향했다. 처음에는 제대 후의 재회인줄로만 여기고 즐거운 표정이던 그녀도 여자의 본능이랄까 저조한 나의 기분을 통해 무슨 심상찮은 일이 있을 것으로 느끼는 것같았다.

벤치에 앉아 몇차례 한숨을 쉬고 있자 그녀가 말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요. 내 걱정은 말고”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고 숨이 턱 막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억지로 얘기를 시작했다.

“부모님이 우리가 사귀는 것을 알고 헤어지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헤어질 수가 없다고 말하고 집을 나왔다. 나는 당신에게 언젠가 결혼하자고 말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부모님 반대가 워낙 완강하니 이대로 집에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내일 부산으로 가겠다. 거기서 원양어선에 취업해서 한 3년 돈을 번 뒤 당신에게 돌아오겠다. 힘들겠지만 그때까지 참고 기다려 달라”

그녀는 한참을 흐느끼더니 나지막히 말했다. “그러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요. 부모님과 인연을 끊을 수야 없잖아요.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이였어요”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그녀는 한없이 연약하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아는 착한 여자라는 사실을 다시 느끼며 나는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는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 마음이 변함이 없다는 말과 부산에 가서 원양어선 어부로 돈을 벌어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고 되내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흐느끼며 한숨을 쉬다 듣기만 했다.

밤이 깊어 그녀는 자취집 본채의 빈 방으로 자러갔고 나는 그녀가 평소 쓰던 자취방에 자리를 펴고 누웠다.

밤새 뒤척이며 자는 둥 마는 둥 하는 동안 날이 밝았다. 그녀가 어느틈에 준비했는지 밥상을 차려 들고 왔다. 어제 저녁에 이어 둘이 마주 앉아 밥을 먹다 보니 흡사 우리가 결혼한 부부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모님들이 우리 결혼을 승낙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은 더욱 무너져 내려앉았다.

밥상을 물리면서 그녀가 내게 말했다. “내 생각으로는 부모님께 돌아가 가출을 용서비는 게 좋을 것같아요. 우리 결혼은 천천히 생각해보고요”

“결코 집에 안 돌아가요. 그리고 결혼을 천천히 생각하겠다고 부모님들께 얘기하면 그것으로 우리 사이는 끝장이요”

내 결심이 의외로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그러면 오늘 당장 부산에 가지 말고 여기서 하루를 더 묵고 가세요”

나는 하루를 더 묵으라는 말에 반색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했다. 하루 종일 방안에서 빈둥대거나 학교 주변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자 그녀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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