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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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5 15:42 | 최종 수정 2021.08.09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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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4학년 2학기 가을부터 취직 시험에 나섰다. 몇 군데 회사에 합격했으나 그때까지 신문사 입사 시험은 없었다. 그러다 10월 초 한국일보 입사 시험에 합격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꿈꾸어 왔던 신문기자가 됐다는 사실에 일단 나의 1차 소원은 성취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경제 호황기여서 우리 또래는 몇 군데 회사에 동시 합격, 그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호사를 누렸다. 지금 취업에 엄청난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들을 보면 너무나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들도 기뻐하셨지만 그녀가 가장 많이 반겨주었다. 부모님들도 약속하셨듯이 이제 내가 원하던 기자가 된 만큼 우리의 결혼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날아갈 듯했다.
1976년 11월부터 신입기자 오리엔테이션 교육을 받았다. 1977년 1월5일부로 정식 발령을 받고 편집국의 각 부를 도는 견습기자 생활을 하느라 눈코 뜰 새없이 바빴다.
마음속으로는 빨리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재촉할 수는 없었다. 부모님들에게 성화를 부리다간 역풍을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견습 기자를 시작한 뒤 바로 결혼식 휴가를 달라고 하기도 회사에 눈치가 보였다.
6개월 견습기간이 끝나고 특정 부서로 발령이 나면 더욱 시간을 내기가 어려울 것같아 4월30일로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온 동네를 들었다 놓았다하며 요란하게 치르는 함 팔러가는 행사도 내가 가지 못하고 바로 밑 남동생이 친구들과 함께 진행, 횡재를 했다고 한다.
4월30일 대구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 여행을 가기 위해 고속버스편으로 부산 터미널에 도착했더니 미식축구부 동기 녀석들이 택시를 타고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짖궂기로 유명한 녀석들의 등쌀에 그녀와 함께 밤 11시반까지 소주를 마시며 잡혀있을 수 밖에 없었다.
잘못하면 신혼 첫날밤을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지낼 형편이 되어서야 친구 녀석들이 우리를 놓아주었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예약해두었던 호텔에 우리는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녀에게 고마운 것은 신혼 첫 밤 친구들의 짓궂은 훼방에도 싫은 표정,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조신하게 자리에 앉아 우리의 모습을 지켜봐 준 점이었다.
왠만한 신부같으면 싫은 말이나 표정으로 불만을 표시, 자리가 일찍 파하게 했을 텐데도 그녀는 속으로야 어찌됐든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끝까지 참아준 것이었다. 내 친구 녀석들도 나중에야 그날의 장난이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했고 그로 인해 그녀에게 더욱 깊은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이튿날 우리는 일어나자 마자 해운대 지역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태종대 쪽으로 숙소를 옮겼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론 미식축구부 동기들은 물론이고 고대 신문방송학과 친구 녀석들까지 우리를 찾기 위해 해운대 일대 호텔을 뒤졌다고 했다.
우리 동기들 가운데 내가 가장 먼저 결혼식을 올린 만큼 친구 녀석들에게는 ‘기분내고 어울릴 수 있는 한 판의 잔치’로 여겨졌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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