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매사에 소극적이고 지나치게 신중해 때로는 답답할 때도 적지 않았다. 어떤 사안이 닥칠라치면 “이거는 이래서 안되고, 저거는 저래서 안된다”고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돌다리도 두드려가며 건너는 게 아니라 개울이 아예 말라버려야 건너겠다는 태도를 보이고는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보고 ‘공인 부정사’라고 놀리기도 많이 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체구의 그녀가 크게 배부른 모습을 보이지 않고도 그런대로 덩치 괜찮은 아들을 낳은 것처럼 그녀의 성격 역시 그런 예상외의 반전이 있었다.
신혼초부터 시동생 둘을 번갈아 데리고 있으면서 둘다 장가를 보냈다. 특히 내 바로 밑 동생은 지금은 제법 어엿한 사업가로 폼잡고 있지만 우리가 데리고 있을 때만 해도 참 속을 많이 썩였다.
동대문 시장에서 규모있는 양복지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가끔 사고를 치곤 했다. 좋아하는 술자리에서 말다툼이 벌어지면 물리적 충돌로 이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대학때까지 야구 선수 생활을 한데다 덩치도 아주 좋아, 맞는 쪽보다는 주로 때리는 쪽이었다.
파출소나 경찰서에 잡혀 있다가 나에게 S.O.S를 쳐오곤 했다. 몇 번은 합의금을 사들고 가서 피해자를 설득, 사건을 무마했지만 횟수가 거듭되자 나도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곤 했다. 또 집사람 보기도 민망했다.
한번은 크리스마스 직전에 또 사고를 쳤다고 연락왔기에 이번에는 뜨거운 맛을 보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감방에서 몇 달간 썩어봐야 정신차린다”며 내가 방에서 움직일 생각을 않자 아내가 더 조급해했다.
“아버님 어머님이 도련님을 우리에게 맡겼을 땐 우리가 모든 걸 책임져야 하는 게 당연해요. 삼촌이 정말 잘 못되면 아버님 어머님을 어떻게 봐요. 그러지 말고 당신이 가서 해결하세요. 제발” 그리곤 많지도 않은 기자 봉급으로 모아놓은 목돈을 내 손에 쥐어 주었다.
바로 밑 동생을 이처럼 속 끓여가며 몇 년을 데리고 있다가 장가보내고 나서는 둘째 남동생을 거두어야 했다. 재수생 시절을 포함해 3년간을 함께 지내다 군 복무 후 또다시 우리집으로 들어오게 됐다.
복학한지 몇 개월 뒤 둘째 동생이 “형님 형수님 할 얘기가 있습니다”하고 우리를 불러 앉혔다.
“결혼을 해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있습니다”
전혀 예상밖의 말이었다. 몇 년 전 우리가 이와 같은 상황을 만들어 부모님들에게 던진 충격이 어떠했을까 짐작하고도 남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사랑하는 여자는 어머님을 일찍 여의고 아버지 밑에서 자라 외로움을 많이 느끼기에 참 안쓰럽게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현재 스튜어디스로 해외로 많이 나돌아 다니므로 두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둘이 결정할 일이 못되므로 부모님께 말씀드리겠다고 하자 “형수님, 형님, 나는 결혼을 안하면 공부고 뭐고 아무것도 못할 것같습니다. 만약 결혼시켜주면 외무고시에 도전하겠습니다”고 엄포까지 놓았다. 부모님 입장에선 기함했을 우리들의 결혼 선전포고를 몇 년 뒤 남동생으로부터 고스란히 우리가 되돌려 받게 된 셈이었다.
대구 부모님께 이런 말씀을 드렸드니 예상했던 대로 안된다고 반대했다. 그러면서 혹시 우리가 동생을 데리고 있는 게 귀찮아서 그런 식으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냐는 뉴앙스의 말까지 했다.
우리, 특히 아내에게는 정말 억울한 일이었지만 부모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같다는 생각에 동생을 불러 물어보았다.
“혹시 우리 집에 있는 게 부담스러워 그러느냐. 아니면 우리가 너한테 눈치를 주더냐. 부모님들은 우리가 너를 데리고 있기 싫어서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것아니냐고 의심한다”고 말했다.
동생은 펄쩍 뛰었다. “형수님과 형님만큼 동생에게 잘해주는 사람들도 없어요. 그 부분에서는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두 분도 오래 연애해봐서 알잖아요. 결혼하려는 것은 같이 있고 싶은 게 가장 큰 이유지요. 그리고 우리끼리 얘기했지만 내가 졸업할 때까지 스튜어디스 봉급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이미 둘은 결혼을 합의보고 구체적인 생활방안까지 의논한 모양이었다.
부리나케 서울로 올라온 부모님은 우리에게 전화로 안된다고 얘기했던 것과는 달리 기세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이를 재빨리 간파한 막내는 뛰어난 언변으로 부모님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했던 것처럼 “결혼을 안하면 공부도 뭐고 다 흥미가 없다. 결혼시켜주면 나는 외무고시에 도전, 패스하겠다. 스튜어디스 봉급으로 충분히 생활할 수 있다”는 말로 결국 부모님을 설득했다.
결국 결혼은 허락했지만 갑작스런 행사로 경비 마련이 문제였다. 부모님도 당장 충분한 돈을 마련하기 어려웠고 막내 동생과 동생의 여자도 결혼 비용까지 모아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해결책은 의외로 집사람이 내어놓았다. 아파트 분양 신청을 하기 위해 몇 년간 넣어온 주택부금을 깨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가 살고 있던 강동구 길동 24평 삼익파크 아파트 가격이 1,250만원이었다. 집 사람이 그간 한번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부어놓은 주택부금 액수는 300만원 가량이었다. 몇 개월만 더 넣으면 아파트 청약 1순위가 되는지라 우선 내부터가 이 부금을 깨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나 막내 동생 역시 부금 깨기가 아깝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고 반대했다. 심지어는 주택은행 부금 담당자까지도 몇 달만 더 내고 1순위를 받으라고 강하게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는 이 방법 외에 결혼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고 판단, 적금을 깨고 목돈을 마련했다. 더욱이 아내는 “아무리 결혼을 간소하게 치른다 해도 신부 옷 등 소소하게 마련해야 할 게 많은데 그것은 당신이 갖고 있는 신용카드로 해결하세요”라고 제안했다.
아내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두 사람은 결혼했다. 물론 막내 동생은 외무고시는 않고 졸업 당시에는 최고의 신랑감 직장이라던 유수의 증권회사에 취직, 압구정 지점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얼마 뒤 회사를 관두고 엉뚱하게도 명상 수련가로 변신, 이제는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한 듯하다.
두 동생들은 요즘에는 “형수님하고 형님한테 입은 은혜가 얼만데”라며 뒤늦게 철든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시장에 가서는 물건값을 수시로 깎는 바람에 어머니는 “쟤하고는 창피해서 시장에 같이 못 다니겠다. 심지어는 콩나물 값까지 깎아달라고 하는데 하여튼......”하고 나무라는 듯 하면서도 알뜰함을 은근히 칭찬하곤 했다.
모든 걸 아끼고 발발 떨면서도 꼭 필요하다 싶으면 주택 부금 통장까지 과감하게 깨는 그런 여자가 아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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