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을 위해서는 결단을 내리는 아내였지만 역시 여자인지라 두 시동생 뒷바라지로 모아두었던 돈이 사라진 게 조금은 아쉬운 듯했다.
그래서 였는지 모르나 어느날 나에게 우리가 살고 있던 삼익 파크 아파트의 상가에서 홈패션 가게를 한번 해보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당시는 대부분의 주부들이 집안의 거의 모든 물건을 천으로 감싸는 게 유행하던 시기였다.
전화기 손잡이를 천과 레이스로 감싸거나 심지어는 크리넥스 티슈 통까지 천으로 옷을 입히곤 했다.
아내는 평소 손재주가 아주 많았다. 나와 아들에게 똑같은 무늬가 들어간 천으로 남방 셔츠나 점퍼를 만들어 주곤 했다. 게다가 윗 포켓 쪽에 화려한 손 수를 놓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어떤 이들은 우리 부자가 입고 있는 옷이 아주 특징있고 멋있다며 어디가면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손으로 하는 바느질은 물론이고 재봉틀 그것도 공업용 재봉틀을 능숙하게 다루었다. 아마 봉재공장에서 일한다면 특A급 재봉사로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이같은 솜씨를 아는 나 역시도 아내가 홈 패션 가게를 하고 싶다고 하기에 얼른 찬성했다. 아내가 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나서 시간 날 때마다 아쉬워하는 것을 안타깝게 지켜 봐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특기를 살리다보면 보람도 느끼고 자기 손으로 돈을 다시 조금이라도 벌게 되면 그녀의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될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느날 삼익 파크 아파트 상가에 조그만 가게를 얻어 아내가 집에서 만든 각족 소품과 커텐 등을 취급하는 홈 패션점을 개업했다. 첫날 귀가해서는 한참을 울었다. 손님들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은 물론 때로는 자존심 상하는 일까지 겪다 보니 자신이 왠지 초라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며칠 뒤 어느날 집에 들어온 아내는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지갑은 물론이고 바지 주머니 등 공간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 돈이 튀어나왔다. 하루 번 수입이 내 한달 봉급보다 많았다.
아내는 가게를 열기 전에도 동대문 남대문 시장을 자주 찾아다니며 싸면서도 특징있는 보세 천 등을 구하는 게 취미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수출하고 남은 짜투리 보세 천은 값이 아주 쌌다. 아내는 천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 그중에서도 가장 싸지만 활용만 잘하면 아주 특이하고 멋있는 홈 패션 제품을 만드는 재주가 뛰어났다.
가게를 정식 열기 얼마전부터 이들 천으로 각종 작품을 만들었다. 특히 독특한 레이스로 만들어 견본으로 내놓은 각종 커텐은 일반 커텐점 물건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했다. 사람들은 파는 것이 아니라 전시할 견본품이라고 해도 앞다투어 이 커텐들을 걷어가는 바람에 돈이 쏟아져 들어온 것이었다.
당시 삼익 파크 아파트 상가에는 아내 가게를 포함해 두 개의 홈패션점이 있었다. 당초 아내 가게는 상가 중간 개방된 공간에 자그마하게 자리잡아 다소 초라해보였다. 반면 다른 한 가게는 상가 가장자리에 커다란 유리문으로 널찍하게 구획을 지어 놓은 곳에 자리잡아 아내 가게보다 훨씬 컸고 고급스럽게 보였다. 더구나 홈패션 유명 브랜드의 대리점이기도 해 아내의 가게는 경쟁에서 뒤져 곧 문을 닫을 것이란 게 일반적 평가였다.
그러나 손님들이 아내 가게에 몰리는 바람에 결국 그 큰 가게는 폐업했고 아내는 그 가게를 인수, 그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를 두고 상가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수입도 솔솔하고 자신의 특기도 살릴 수 있어 아주 만족해하던 가게도 1년이 채 되지않아 접을 수 밖에 없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자주 올라오시던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아내가 가게하는 것을 무척 못마땅해 하셨다. 여자는 집에서 조신하게 살림이나 하면서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에 매진해야 한다는 게 어머니의 지론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특히 부모님이 우리 집에 오는 날은 가게에 늦게까지 손님이 이어지는 이상한 징크스도 있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귀가 시간이 늦어져 저녁상을 차리는 것은 물론 부모님을 뒷바라지하는데 본의 아니게 소흘해질 때가 있었던 듯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런 일이 한 몇 번 이어지자 어머니는 며느리가 시부모를 우습게 본다고 판단, 하루는 작심하고 아내를 혼을 냈다.
“고속버스를 타고 오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먹은 시부모를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 한밤중(사실은 조금 늦은 저녁)까지 굶기냐”고 노발대발한 것이었다.
평소 어머니는 여자가 돈을 만지면 남편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으므로 마누라 단속을 잘하라고 내게 수시로 다짐하곤 했다. 이런 맥락에서 며느리가 이제 가게로 돈을 조금 벌자 시부모까지 우습게 본다고 지레 짐작한 모양이었다. 이런 기회를 빌어 며느리 군기도 잡겠다는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아내 입장에서는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고 게다가 장사하랴 집안일하랴 애 키우는 일까지 겹친 힘든 상황에 시부모까지 이해를 못해주니 섭섭하고 서러웠던 모양이었다.
부모님에게 언제나 순종적이고 최선을 다하는 아내였지만 역시 인간인지라 원망스런 마음도 조금씩은 드는 것같았다. 그 일이 있고 나서부터 아내는 부모님들이 대구에서 올라오는 기간에는 일찍 가게문을 닫는가 하면 더욱 긴장을 하곤 했다.
그러다 가게를 접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5월5일 어린이 날이었다. 당시 아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요즘은 언론사들도 5월5일 어린이 날은 쉬어 가족들이 함께 나들이하며 즐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 아니었다.
이날 아내는 일찍 가게에 나가고 나는 평소보다는 조금 늦게 출근하기로 했다. 혼자 집에 남게될 아들이 걱정돼 “영화야 너는 오늘 무엇하냐?”고 물어보았다.
아들은 “오늘 형들하고 놀이터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형들과 놀면 돼”하는 것이었다. 아들을 데리고 동네 놀이터로 갔더니 애들은 한 명도 없었다.
아들은 당황한 듯 아는 형들의 아파트를 찾아다니며 벨을 누르곤 했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어린이날이라고 모두 부모를 따라 놀러간 것같았다.
대여섯군데를 찾아다녀도 아는 친구나 형들을 만나지 못하자 아들은 눈에 띄게 초조하고 불안해했다.
그러면서도 “조금 있으면 형들이 나올 거야 아빠는 회사로 가요”라고 내 회사 출근 걱정부터 하는 것이었다. 이런 모습이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어쩔 수 없이 아들을 아내 가게에 맡기고 회사로 향했다.
초조해하던 아들 녀석의 얼굴이 하루종일 떠올라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질 않았다. 저녁에 집에 오자마자 오늘 아침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아내에게 “가게를 접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처음에는 상당히 아쉬워했다. 이제 상품 아이디어도 많이 생기고 단골도 늘어 돈버는 재미가 제법 솔솔했기에 미련이 남는 눈치였다.
그러나 아내에게 아들은 언제나 1순위였다. 자신의 몸이 약해 동생조차 만들어주지 못해 언제나 외롭게 지내는 것을 자책하고 미안해 했다. 평소에도 동네 개구쟁이들과 놀다가 점심때면 아내의 가게에 와서 음식을 시켜 먹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 이런 차제에 어린이날인 이날 아들이 몇시간이고 외톨이로 떠돌아다닌 얘기를 듣자 가게를 접자는 내 의견에 동의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당시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게 생각하고 행동했는지 참으로 후회가 크다. 부모님들에게 반항은 하지 않더라도 설득에 나서 아내가 취미와 특기를 계속 살릴 수 있도록 해주지 못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일반 직장인들은 쉬지만 나는 근무해야 하는 공휴일 경우 아들이 어떤 보살핌을 받는 프로그램을 갖든지 아니면 그런날은 아내가 아예 쉬는 방안도 해결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는 그런 생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너무 즉흥적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만약 다른 해결책이 있었더라면 아내는 분명히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쌓는 것은 물론 삶의 보람을 한층 느꼈을 것이란 생각에 두고두고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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