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18-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아내의 3차례 전화

김인규 기자 승인 2021.08.06 14:28 | 최종 수정 2021.08.09 00:26 의견 0

아내는 참으로 현명한 여자였다. 나는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성격이어서 무슨 일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경우가 참 많았다.

그러나 아내는 달랐다. 신중하고 생각이 깊었다. 무엇을 결정하기 전에 항상 이리 재고 저리 재면서 발생할 수 있는 위해 요소들을 꼼꼼이 따져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래서 문제가 있고 저것은 저래서 힘들고”라며 신중을 기하는 것을 보고 나는 “당신은 공인 부정사야”라고 놀리기도 많이 했다.

그러나 오랜 장고 끝에 판단이 서면 오히려 나보다 더 과감하게 행동에 옮겼다. 그 결정은 나중 내가 돌이켜 보아도 언제나 최상이었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내는 생전, 나에게 아주 중요한 순간에 3번의 전화로 나를 구해주었다.

첫 번째가 우리의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는다고 가출, 그녀가 교사로 근무하던 청송 구천중학교 자취집으로 찾아갔을 때였다. 내가 원양어선을 타러 간다고 무모한 기도를 얘기했을 때 나 몰래 내 친구에게 전화, 그 친구가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를 찾아 오게 했다.

만약 그때 아내가 친구에게 연락, 어머니가 찾아오지 않게 했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를 가끔 상상해보곤 했다.

틀림없이 이튿날 나는 무작정 부산으로 갔을 것이다. 그리고는 부둣가에서 뱃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붙잡고 원양어선을 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운좋게 원양어선 관계자를 만나 배에서 일할 수 있게 됐다하더라도 내 인생은 그렇게 썩 밝았을 것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자격증도 없고 쓸만한 기술도 없는 데다 더구나 인문계 대학 중퇴자가 원양 어선에서 할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국 막일 밖에 할 수가 없어 봉급도 쥐꼬리만하지 않았을까. 과연 3년 가량 고생했다 하더라도 그녀를 만나 결혼할 만큼 돈을 모을 수 있었을까.

만약 원양 어선을 타지 못했을 경우 어떻게 되었을까도 상상해봤다. 어쩌면 원양어선보다 조건이 더 나쁜 상태로 소형 고깃배에서 역시 허드렛일을 하게 되지 않았을까. 비록 대학교에서 운동을 했고 군대를 막 제대해 체력은 괜찮다 할지라도 힘과 근육이 특정 작업에 적응되지 못한 상태인만큼 엄청난 고생을 치루었을 것이다. 역시 수입도 변변치 못해 3년간 돈벌어 결혼하겠다던 큰 소리가 실현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가정도 가능은 하다. 기막힌 시간과 공간, 인간적 조화로 돈을 왕창 벌 것이라는 상상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영화나 소설 속에서 나오는 비현실적 가능성일 뿐이다. 결국 돈 벌어 결혼하겠다고 큰 소리치며 부산 부두에 갔더라면 나의 인생은 어찌됐을까 상상이 간다.

만약 그녀가 내 친구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내게 말했다면 나는 자존심 상 펄펄 뛰며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말없이 조용히 내 친구에게 전화, 문제를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한 것이다.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그녀의 두 번째 전화는 한국일보 입사 3년째이던 1979년 초였다.

1977년 1월 입사, 2년 몇 개월간 사회부 경찰기자 2진으로 뛰어다녔다.

경찰 기자 2진이란, 강력 사건이 잦고 중요 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에서 베테랑 1진을 보좌해 함께 지역을 커버하는 신입 기자를 말한다. 당시 각 언론사는 종로, 중부 등을 기점으로 왼쪽 지역의 병원, 대학, 기관을 커버하는 동쪽 라인과 서대문서부터 한강 다리 건너 영등포 강서 경찰서를 관할하는 서쪽 라인으로 구분했다.

살인 등 강력 사건이 많은 서쪽 라인에 보통 2진이 붙여져 있었다.

나는 경찰 기자 2년반 동안은 조용하고 나름대로 평온한 동쪽 라인에는 한번도 발을 딛지 못했다. 하룻 밤 자고 나면 수사본부가 몇 개씩 생기곤 하는 서쪽 라인에만 뛰고 있었다.

79년 초 경찰서를 순회하고 있던 중 회사로 들어오라는 전갈을 받았다. 부리나케 회사로 향하면서 내심 이제 1진으로 승격하는가보다 기대했다.

그러나 웬걸. 예상과는 반대로 체육부로 발령이 났으므로 내일부터 체육부로 출근하라는 김해도 사회부장의 말을 들었다. 순간적으로 아득하고 화도 났다. 그러나 사회부장 앞에서 불만을 표시할 수도 없어 회사를 나왔다.

그리곤 회사 근처 소줏집과 맥주집 대여섯 군데를 돌았던 것만 기억나고 그 이후는 필름이 끊겼다.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평소 술자리가 잦고 취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처럼 인사불성이 되어 귀가하고 아침 늦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 아내는 상당히 놀란 듯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이제 회사를 그만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큰 사고를 쳤기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는 것으로 오해한 아내는 걱정이 돼 계속 무슨 일이냐고 다그쳤다.

어쩔 수 없이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아내도 내가 체육부로 발령난 것에 대해 속상해하는 것같았지만 큰 사고가 원인이 아닌 것이 다행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아내는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당신이 고교, 대학 시절에 운동을 했기에 체육부에서 필요로 해서 발령낸 게 아니겠어요. 그리고 그간 당신은 경찰기자로 너무 고생을 많이 했잖아요. 한 얼마동안 체육부에서 조금은 편안하게 근무할 수 있으므로 좋은 점도 많겠는데요”하고 나를 다독였다.

그러나 나로서는 회사의 조치를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다. 물론 나도 체육부가 매력있는 부서라고는 평소 생각하고 있었다. 나와 입사 동기로 함께 사회부에 발령받았다가 본인 스스로 원해서 체육부로 간 동기 이종남군이 체육부 근무 불과 1년여만에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야구 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종남 기자는 동양사학과 재학 시절 서울대 야구팀 투수로 활약했기에 스포츠에 관한한 실기와 이론을 겸비했다 할 수 있었다.

현재 각 언론사 야구 기사에 들어가는 야구 기록부도 이종남 기자가 가장 먼저 표준화해 만들었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양궁에도 아주 관심이 많아 한국 양궁 초창기 때부터 전문적인 양궁 기사를 다루는가 하면 수준높은 전문 책까지 출판했다.

이 기자는 그간 나보고 수시로 체육부로 같이 와서 함께 뛰자고 권유할 때가 많았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유도와 태권도를 했고 대학 때는 미식축구를 한만큼 실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체육기사를 쓸 시기가 왔다는 게 이 기자의 평소 지론이었다.

그런 점에서 나도 체육부가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의사를 사전에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발령을 내는 것은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처사로 내 자존심을 짓밟은 폭거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런 내 심정을 흥분해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번 아내에게 한국일보를 관두고 다른 회사에 들어가겠다고 펄펄 뛰었다. 아내는 몇 번 더 나를 설득하더니 내 성질에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듯했다.

화가 나 있는데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 폭탄선언을 하고 하루 종일 집에 있자니 조금씩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점심 때가 지나고 저녁을 먹고 난 뒤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으면서 혹시라도 회사에서 전화가 오지 않을까 바짝 신경이 쓰였다. 간혹 가다 전화가 걸려와 아내가 받아 대화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회사에서 온 전화는 전혀 아니었다.

아침에 큰 소릴 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마음 한편으론 ‘이 기회에 다른 직장 찾는거지 뭐!’하며 전의를 불태우면서 불안감을 주저앉히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국일보 입사후 2년반 동안 팽팽 놀기만 했던 실력으로 타회사 입사 시험에 붙을 수 있을까하는 의문도 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제와서 내 발로 회사에 나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어제 저녁을 되돌아 보니 회사 근처 술집에서 만난 선후배들에게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라고 큰소리쳤던 기억도 흐릿하게 떠올랐다.

아내는 여전히 내 눈치를 보면서 내일은 회사에 나가라고 설득했지만 사나이 체면이 있지 “그러마”할 수는 없었다.

“당신은 걱정할 필요없어. 내가 당신 하나 못 건사할까? 보다 좋은 회사에 들어 갈테니 두고 보시오”라고 큰소리를 쳤지만 마음 한 구석에 불안감이 조금씩 커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루를 쉰 다음날 아침은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오늘 폭설 스케치도 해야하고 교통 사고 등 각종 눈 피해 상황을 챙기자면 경찰 기자(경찰 기자는 사회부 맨 막내들로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궂은 일들을 챙기는 것은 이들의 몫이었다)들 고생깨나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이제 한국일보와 영영 인연을 끊으려는 마당에......”라는 엉뚱한 생각에 쓴 웃음이 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아내는 회사에 나가라고 더 이상 나를 설득하지 않는 걸로 미루어 내가 회사를 그만두기로 한 결정을 어쩔 수없이 받아들인 것같이 보였다. 그러면서 나는 “아내가 한번 더 강력하게 ‘오늘은 회사로 나가라’고 떠밀 수도 있을텐데” 하는 이율배반적인 바램도 속에서 일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져 있는데 갑자기 우리집 아파트 초인종 소리가 나며 “야 김인규 문열어”라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아 회사에서 나를 데리러 왔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반가움도 솟구쳤다. 아내가 얼른 문을 열고 인사를 하자 경찰 기자들을 지휘하는 서울 시경 출입 하장춘 캡틴과 동쪽 라인의 노기창형이 눈을 털고 들어왔다.

나는 파자마 차림에 “어떻게 오셨어요”라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인사했다.

캡은 “야 왜 이러구 있어 빨리 옷입고 회사가자”며 자뭇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 이제 회사 안 나갑니다. 안 다닐려고 합니다”고 속에도 없는 말을 밷었다.

“야, 그럼 사표는 써야 할 것아니야. 빨리 옷입고 회사에 가서 사표써”라고 강조했다.

노기창 형도 “야 김인규 빨리 서둘러. 오늘 눈도 많이 오고 바쁘다”고 재촉했다.

속으로 “이 양반들이 내가 하루 결근하고 난 뒤 내 발로 회사에 다시 나가는 게 민망할까봐 이렇게 찾아왔구나. 휴 다행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상황도 아니어서 얼른 옷을 챙겨입고 두 선배를 따라 회사 취재차에 올랐다.

편집국에 들어가 김해도 사회부장에게 가서 엉거주춤한 태도로 고개숙여 인사했다. 김 부장도 내가 왜 나오지 않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내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어제는 영등포 라인에 가서 인사하고 술한잔 하느라고 못 나왔다며. 갑작스런 발령 소식에 조금 어리둥절하겠지만 곧 페이스를 되찾고 잘 할 거야. 그리고 말이야 일간스포츠 심명보(나중에 민정당 사무총장에 오름) 국장이 당신의 운동 경력이 꼭 필요하다고 강권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당신을 체육부로 보내게 된거야. 그리고 생활해보다 사회부에 다시 오고 싶으면 그때 또 얘기하자고”

바로 일간스포츠로 가서 심명보 편집국장과 이태영 체육부장(당시 한국일보 체육부 기자는 유일한 스포츠 전문지 일간스포츠 체육부 기자도 겸하고 있었다)에게 인사를 하고 체육부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당초 체육부 기자로 발령냈다고 사표써겠다고 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스포츠 취재에 갈수록 재미와 보람을 느꼈다. 한 2~3년 스포츠계를 파악하고 난 뒤 다시 사회부로 복귀시켜달라고 할 작정이었으나 어느듯 그런 미련은 다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사회부 기자가 어떤 사건이 발생할 경우 형용사와 부사 등 감정적 묘사가 가급적 절제된 다소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기사를 써는 것과는 달리 체육 기사는 또다른 맛을 낼 수 있었다.

즉 같은 경기를 취재하더라도 매체와 기자에 따라 나름대로 독특한 표현과 분석, 예상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체육기사는 사회면과는 또다른 특징과 매력을 주었던 것이다.

또한 체육부 기자를 하다보면 사회부 때와는 달리 다소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이점도 있었다. 사회부 기자는 기사를 마감해서 넘기고 나서도 다음날 신문이 나올 때까지 혹시 내가 출입처에서 물먹은 것은 없는지 즉 낙종한 기사는 없지 않은지 24시간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당시만 해도 조간신문은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단 둘 뿐이어서 만약 한 매체가 낙종하면 담당기자는 ‘1/2 쪼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은 워낙 많은 매체가 있다보니 한 언론이 특종하면 나머지 언론사 담당기자들은 ‘1/N 쪼다’가 되므로 대미지가 적을 수 밖에 없다.

이같은 이유로 사회부(정치부, 경제부 등 스트레이트 기사를 주로 다루는 다른 부서도 마찬가지지만)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 늘 불안감이 상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낙종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안감은 지금 언론계 상황보다 훨씬 컸기에 사회부 기자들은 이를 잊기 위해 매일 술을 마시곤 했다.

오죽 했으면 사회부 고참 기자 부인들 중 상당수도 알콜 의존성이라는 말들이 있었다. 기자 본인은 남자고 또 워낙 낙종과 특종을 반복하다보니 하루 하루의 승부나 평가에 어느 정도 단련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인들은 마음이 약하고 또 남편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다보니 자연히 알콜 의존성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체육부에 오고나서 사회부에서라면 꿈도 꾸지못할 스페인어를 공부하게 됐다. 스페인 마드리드대 연수에 이어 스페인어를 조금 한다는 이유로 중남미 특파원으로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족들과 살아본 귀한 기회도 갖게 되었다.

내가 체육부 전입에 불만을 표하고 하루를 결근한 다음날 폭설을 뚫고 두 선배가 우리집에 찾아와 나를 자연스럽게 회사에 데리고 가게 해준 이유가 있었다.

당시 나는 선배 두 분이 자발적으로 우리집으로 찾아온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불과 얼마전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아내가 당시 비사(?)를 털어놓았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내는 내가 하루를 쉰 뒤 회사로 제 발로 걸어서 나갈 것같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근한 날 저녁 앞집에 몰래 가서 시경캡에게 전화로 내 상황을 전하고 내일 좀 데리러 와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기에 30년이 훌쩍 지나서야 나에게 털어놓은 것이었다.

이 부분 역시 나는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만약 그때 아내가 회사 선배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고 회사에서는 하루 이틀 결근하는가보다 무심하게 넘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나는 내 발로 다시 회사로 근무하러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를 계기로 다른 회사에 취직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실업자 생활을 꽤 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랬으면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지금도 나는 당시 아내의 대처가 현명했고 나를 구해주었다고감사하고 있다.

아내는 딱 3차례 결정적 시기에 관계자들에게 S.O.S 전화를 쳐 나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마지막 한 차례 전화는 아들에게 한 것이었다.

나의 판단 착오와 어리석음 그리고 시카고의 어떤 인간을 잘못 만난 탓으로 큰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월급쟁이 생활하면서 조금 모아두었던 돈과 은퇴 후 살려고 사놓았던 강화도 집도 덴버 한국일보 경영권을 인수, 운영하면서 몽땅 날려버렸다.

한국으로 귀국했다 다시 뉴욕, 시카고로 돌아왔다. 특히 시카고에 오면서 재기를 노렸으나 몇 달 뒤 내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다. 졸지에 실업자가 돼 처음으로 실직수당이란 것을 타봤고 가톨릭 채리티에서 구호 음식을 배급받기도 했다. 나름대로 이리뛰고 저리뛰어봤지만 해결책이 없었다.

미국이 아무리 인종 성별 나이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 60대 중반인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은 발견되지 않았다.

한날은 아들이 전화해 왔다. “아버지 힘들지요. 엄마한테 얘기들었어요.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보내니 이걸로 무엇을 해보세요”

이번에도 아내가 나몰래 아들에게 내 사정을 얘기하고 S.O.S를 친 것이었다. 아들이 제 엄마 전화를 받고 이를 며느리와 의논을 했다고 한다. 며느리는 “우리가 과천 쪽에 조그만 부동산에 투자하려고 모아놓은 돈이 있잖아요. 이걸 아버님 사업자금으로 드립시다”라고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나와 집사람은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애들한테 짐이 되지는 말자“고 몇차례나 다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보니 아내가 아들에게 우리 사정을 알린 것이었다.

적잖은 돈을 받아들고 나는 우선 사무실을 얻고 함께 할 사람들을 모아 인터넷 신문과 인쇄 매체 잡지를 제작했다.

한 몇 달간은 지인들이 친분으로 해주는 광고로 그럭저럭 꾸려갔으나 안면용 광고는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부탁하기도 미안해 신규 광고 수주에 나섰지만 광고 업무는 처음이라 수입은 바닥을 헤매었다.

결국 아들 내외가 보내준 돈도 바닥나는 바람에 사업을 잠정 중단하고 말았다. 아들과 며느리는 물론 아들에게 정말 어렵게 입을 뗀 아내에게 참으로 부끄럽고 미안한 노릇이었지만 더 이상 버텨볼 재간이 없었다.

아내는 이 사건 이후로 나에 대한 신뢰도가 많이 떨어졌을 것이다. 전에는 남편을 꽤 능력있는 사람, 아이디어가 좋고 활동력도 있어 무엇을 해도 잘 할 사람으로 제법 높이 평가해왔다. 그러나 덴버 한국일보에 이어 두 번째 언론사 운영마저 실패하면서 아내는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절대 이대로 쓰러지지 않는다. 반드시 재기할테니 당신은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수시로 안심시키고 의도적으로 큰 소리쳤지만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나를 구해준 3번의 아내 전화 가운데 두 번은 해피엔딩이었으나 마지막은 나의 무능력으로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도 이 3번째 전화의 결과를 생각하면 피눈물이 쏟아진다. 떠난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아내는 이제 저 먼곳에서 남편 때문에 가슴졸이며 전화할 일이 없겠지. 아니면 몰래 전화하는 것보다 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지나 않은지......

저작권자 ⓒ 해뜸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