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19-아내의 신중하고도 현명한 선택

김인규 기자 승인 2021.08.07 14:29 | 최종 수정 2021.08.09 00:27 의견 0

아내는 평소 착하면서도 겁이 많은 여자였다. 남들이 자신에게 섭섭하게 하더라도 이를 반박하거나 지적하질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는 성품이었다. 나나 아들, 시집 식구들에게는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 권리나 주장을 고집하지 않았다. 항상 자신의 것을 양보하거나 포기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아들이나 남편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부자가 남들에게서 피해를 입었다 싶으면 물불을 가리지않고 나서는 또 다른 면도 갖고 있었다.

남못지 않은 아니 오히려 남들이 생각하거나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실행으로 옮기는 과단성도 갖고 있었다.

아들은 우리가 살던 아파트 인근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 몇 년간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학교 선생님들이나 동급생 어머니들은 우리 아들을 자주 칭찬하곤 했다.

수업 시간에 아주 활발하게 발표에 나서는가 하면 친구들 간에 다툼이라도 벌어지면 꼭 아들이 나서서 화해를 주선하곤 했다고 한다.

아들과 같은 반 친구 어머니들은 ”하나 자식을 어쩜 이렇게 반듯하고 밝게 키우셨어요“하는 소리를 자주 하곤했다. 집 사람은 아들에 대한 이런 칭찬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문제는 고학년에 진학하고 부터였다. 특히 아들이 부반장으로 선출되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아들반 담임은 나이가 든 여선생님이었다.

학기초부터 수시로 집사람을 학교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은근히 금품을 요구했다. 집사람은 내가 그런 것에 질색인 것을 알고 나를 설득하곤 했다. ”영화가 부반장인데다 아들 하나다보니 담임의 관심도 좀 다를거예요. 당신도 현실을 이해하고 나 하는대로 두세요“라고 말하곤 했다.

당시 관례대로 섭섭지 않은 인사를 하곤 했지만 담임은 자신의 기대치에 못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같았다. 담임의 이같은 생각은 고스란히 아들에게 괴롭힘으로 연결되곤 했다.

아들이 수업시간에 담임으로부터 노골적으로 무시를 당하고 별로 잘못한 일도 없는데 과도하게 꾸지람을 듣는다는 말을 아내는 자주 전해 들었다.

특히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들 친구 어머니들은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어가며 ”영화 엄마가 좀더 자주 학교에 찾아가라“는 충고까지 했다. 심지어는 예전에는 선생님의 질문에 가장 먼저 손을 들던 아들이 노골적으로 무시당하자 이제는 손을 들기는커녕 풀죽은 모습만 보인다는 말까지 해주었다.

최악의 사태는 봄 소풍을 계기로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소풍 때 반장 부반장의 엄마들은 고급스런 음식을 바리바리해서 함께 동행하곤 했다. 다소 과장된 묘사일지 모르나 학급 간부 엄마들은 담임 옆에 붙어앉아 음식 먹는 것을 시중드는 등 흡사 시녀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때였다.

그러나 아내는 아들의 봄 소풍 때 따라나서지 못했다. 대구서 부모님들이 오셨기에 두 분만 집에 두고 아들 소풍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제법 고급스런 일식집을 찾아 몇 인분의 회와 초밥 및 요리를 준비해서 아들 편에 보냈다. 사정을 설명하고 죄송하다는 단어도 몇 번이나 넣은 양해 편지도 함께 보냈다.

이 정도 정성이면 담임도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당장 며칠 뒤 아들 편으로 집 사람을 호출하는 가정 통신문이 왔다.

불안해하며 학교에 간 집 사람을 담임은 서슬퍼렇게 몰아세웠다. ”처음 맞는 봄 소풍에 어떻게 학급 간부 어머니가 불참할 수 있어요? 이는 담임을 노골적으로 우습게 보는 겁니다. 그리고 소풍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바로 다음날 학교에 와서 죄송하다는 말을 했어야 하는 것아닌가요. 그런데 며칠을 기다려도 오시지 않기에 연락을 했습니다. 아들 교육이 중요한지 잠깐 다니러오신 시부모님 뒷바라지가 중요한지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매사를 자신보다는 타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아내였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아들 교육문제는 전적으로 아내에게 맡겨두었기에 소풍 이후 이같은 사건이 생긴 줄은 전혀 생각질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학교 호출 이후 일주일 정도가 지난 때였던 것같다. 퇴근한 나에게 아내가 할 말이 있다고 불러 앉혔다. 아내의 표정이 워낙 심각해 무슨 큰 일이 벌어진 것같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내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속이 뒤틀리고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당장 내가 내일 학교 교장을 만나 항의하고 그래도 안되면 교육청에 민원을 넣겠다“고 펄펄 뛰었다.

”이럴 줄 알고 내가 당신한테 일찍 말하지 않았어요. 만약 당신이 그렇게 대응하면 지금과 같은 풍토에선 영화가 영영 문제아로 찍혀 인격형성에 큰 문제를 초래합니다“고 차분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아들을 전학시키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지금도 그런지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공립학교 재학 초등학생은 다른 공립 초등학교로 전학을 할 수 없었다. 단지 사립학교 전학만 가능할 뿐이었다.

”내가 알아보니까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우면서도 좋은 사립학교가 있는데 그기로 전학시킵시다“ 세종대학교 부속 학교로 중곡동에 있다는 세종 초등학교라고 했다.

”당신이 영화를 세종 초등학교로 꼭 전학시키도록 해주세요. 물론 돈이 좀 들지도 모르지만 우리 아들의 인격 형성과 장래가 달려 있는 문제인 만큼 이를 꼭 성사시켜야 해요. 그리고 전학이 확정될 때까지 당신은 입을 꼭 다무는 것은 물론 지금 다니는 학교측에 항의하거나 찾아가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랬다가는 설사 아들이 다른 학교로 전학가더라도 지금 있는 학교 담임이 꼬리표를 붙여 보내므로 부작용이 크다는 사실도 아내는 몇 차례나 강조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진정시키며 아들의 전학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고심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시교육청 출입 기자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을 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시교육청 출입 기자는 교육청 관계자에게 부탁할 것이고 교육청은 세종 초등학교 교장이나 재단 관계자에게 나의 민원을 해결해달라고 말할 게 뻔했다.

이럴 경우 시교육청은 출입기자로부터, 세종 초등학교는 시교육청으로부터 일종의 청탁이나 압력을 받는 상황이 되므로 서로에게 유쾌하지 않는 과정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자연스런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 소년한국일보 취재부 배 부장(죄송스럽게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머리에 떠올랐다. 당시 내 생각으론 한국일보와 달리 소년 한국은 일선 학교와 인간적 유대관계가 깊을 뿐 아니라 어떤 수직적 위치에 있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즉 시교위를 통한 전학은 자칫 압력으로 비칠 수 있겠지만 배 부장을 통한 해결은 수평적 민원 내지는 인간적 부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소년한국일보에는 입사 동기생 이계욱군이 유일하게 근무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종종 이 친구를 만나러 5층 사무실로 가곤했다, 이계욱군은 다른 매체와 달리 퇴근이 이른 이점을 살려 경기도 고양 부근 집에서 오리, 염소, 소 등을 키우며 전원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 사실이 재미가 있어 나는 이 기자를 만나러 자주 그의 사무실에 들리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배 부장에게 깍듯이 인사했고 배 부장은 나를 꽤나 좋게 보고 있었다.

배 부장이라면 나의 민원을 들어줄 수 있을 것같아 세종 초등학교 쪽에 인간적으로 잘 아는 분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있지. 그 학교 교장하고는 아주 가까운 친구야“라는 반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간의 상황을 상세하게 전하고 아들이 전학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자리가 있으면 내 부탁을 들어 줄거야. 그런데 빈 자리가 있을지는 자신 못하겠는데“

며칠 뒤에 배 부장이 5층 소년한국 사무실에서 3층 한국일보 편집국 사무실 내 자리로 찾아왔다. 배 부장을 따라 복도로 나가는 순간까지 불안하고 초조했다.

”어떻게 됐습니까“ 마른 침을 삼키며 물어보았다.

”마침 딱 한 자리가 있데. 원한다면 바로 전학할 수 있게 해주겠데“

이 사실을 아내에게 전화로 알려주었더니 뛸 듯이 좋아했다. 이튿날부터 아내는 세종 초등학교를 찾아가 전학 수속을 밟기로 마음먹었다. 아내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통쾌한 복수를 하고 10년 묵은 체증이 사라질 정도로 시원했다고 느낀 날이 바로 찾아왔다.

재학하고 있던 초등학교 담임이 또다시 아내를 호출했다. 종전엔 담임을 만나러 가는 게 그렇게 부담스럽고 가슴이 불안하게 쿵쾅쿵쾅 뛰었지만 이날은 아주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아내를 호출한 담임은 ”영화가 갈수록 장난이 심하고 수업분위기를 망치고 있어 문제가 큽니다. 담임으로서 이를 방치할 수도 없고 영화에게 따로 신경을 쓰긴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이 많아요“

아내는 담임의 노골적인 트집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반박이자 통쾌한 반격을 했다 한다.

”동네 친구 엄마들 얘기론 영화가 별다른 말썽을 피지 않는다고 하던데요. 오히려 요즘들어 활기를 잃은 것처럼 보인다고 걱정들을 하더군요“

”아니 어떤 엄마들이 그렇게 말들을 해요. 자식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영화 문제는 부정확할 수 있지요. 아무려면 담임의 관찰보다 정확하겠어요? 하여튼 대책이 필요합니다“

평소 숨죽여 말만 듣던 집 사람이 반박을 하자 담임은 더욱 서슬퍼렇게 집사람을 잡을 듯이 화를 냈다.

집 사람이 회심의 카드를 꺼냈다. ”우리 아들이 그렇게 문제가 많고 다른 아이들에게도 피해를 준다면 더 이상 이 학교에 다니게 해서는 안되겠네요. 전학가겠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을 들은 담임은 당황해하면서도 ”공립학교는 전학이 안되는데......이사를 갑니까?“

”아니요. 세종 초등학교로 전학갑니다. 온 김에 전학에 필요한 서류도 챙겨 갈게요“

의자에서 일어난 아내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담임 얼굴에 비웃음을 내포한 회심의 미소를 던져주고 돌아섰다. 일생에서 가장 통쾌한 복수의 순간이라고 아내는 두고 두고 말하곤 했다.

전학을 하고 난 뒤 아들은 눈에 띄게 다시 명랑해졌다. 전에는 학교 갈 시간이면 미적미적대곤 했으나 세종 초등으로 간 이후는 집 사람이 말하기도 전에 책가방을 챙겨 쏜살같이 집을 나서곤 했다.

세종 초등학교는 우리집에서 공용 시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으나 피곤하다거나 불편하다거나 하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한동안 잃었던 자신감도 빠르게 되찾았다.

특히 반에서 선두를 다투거나 각종 과학 경시대회에 함께 참가하는 친구를 만난 게 아들의 초등학교 마지막 시절을 풍성하게 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의미에서는 라이벌로 묘한 견제 및 경쟁 심리가 작용,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두 녀석은 그렇게 친할 수가 없었다.

아들이 나를 따라 스페인을 다녀온 뒤 중학 2학년 때 둘이 다시 만나자 두 녀석은 한동안 서로를 껴안고 펄쩍펄쩍 뛰며 반가워하곤 했다.

어쩌면 아들의 심성에 큰 주름을 지게 하고 덩달아 아내에게 도 걱정과 불안감을 심화시켜 주었을 당시, 아들에게 전학이라는 구원의 기회를 마련해준 세종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과 소년한국 배 부장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아내가 당시 현명한 판단을 하지 못했다면 아들은 계속 그 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그랬다면 성격이 비뚤어지거나 자신감을 잃어 인격 형성에 큰 지장을 받고 결국에는 문제아로 전락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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