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21-브라질의 잔다크

김인규 기자 승인 2021.08.07 21:42 | 최종 수정 2021.08.09 00:29 의견 0

아내는 평소에는 아주 우유부단해 보이고 소극적이었지만 결정적인 시기엔 예상외의 행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브라질에서 또 한번 발휘했다.

1993년 초 브라질 상파울루 주재 한국일보 중남미 특파원으로 발령나 가족과 함께 상파울루시 아끄리마성 이란 동네에 살았다.

지금은 많이 희석됐다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 기업에서 파견된 주재원들과 일부 현지 한인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 적대감, 배타성 등이 존재했었다.

대부분의 현지 한인들은 봉헤찌로와 브라스 지역에서 의류 제조 및 도소매업에 종사했다. 봉헤찌로는 유태인들이, 브라스는 아랍인들이 일으킨 상권이었으나 억척같은 한인들이 이들을 밀어내고 두 상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브라질을 포함 중남미 전체 의류 생산량의 약 30%을 두 지역 한인들이 담당하고 있어 현지 한인들의 비즈니스 규모는 상당히 큰 편이었다. 당연히 돈들도 많이 벌고 있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쉽게 비즈니스를 성공시켜 부를 축적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민족들이 감히 흉내내지 못할 정도로 새벽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까지 온 가족이 매달린 덕분이었다.

일부 현지 한인들은 비즈니스 초창기 어린 자녀를 맡길 데가 없어 가게 한켠 기둥에 줄로 매어 놓곤 했던 가슴 아픈 기억도 갖고 있다.

초기 말도 통하지 않아 당했던 억울함, 고생 등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고들 얘기하곤 했다.

대부분의 브라질 한인들은 주재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주재원들에게 아주 배타적이거나 공격성을 가진 이들도 꽤나 있었다.

자기들은 이민 초창기 밤을 낮삼아 힘들게 일했고 특히 자녀들을 키우면서 마음 아팠던 일들로 한이 많기도 했다. 그러나 주재원들은 한국 본사로부터 풍족한 돈과 상당한 지원을 받아가며 여유롭게 사는 것이 눈꼴시린 일이었다.

당시 브라질에서는 외제차가 아주 비쌀 때임에도 주재원들은 고급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현지 채용 직원을 비서처럼 부리는 것에 심기가 상하기도 했다.

특히 주재원의 자녀들은 한달에 몇 천불씩 하는 수업료를 내가며 국제학교에 다니며 호사를 누린다고 생각하니 자기네 자녀들의 어릴 때와 비교가 되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브라질 교포 가운데 일부는 기본적으로 주재원에 대한 반감이나 증오심을 깔고 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들의 언행은 당연히 거칠고 호전적이고 주재원들과 마주할 때는 상당히 위협적인 언사를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브라질 치안은 아주 좋지 않았다. 특히 총기 소유가 자유화돼있지만 미국과 달리 개인의 자제나 공적인 규제가 헐거워 총기 사건이 빈발했다.

특히 도덕심이나 범죄 의식이 아주 낮다보니 청부살인 사건도 종종 발생하곤 했다. 심지어는 100불만 주면 사람을 죽여주는 청부업자들이 숱하다는 말들도 있었다. 또한 브라질 사법 체계가 때론 엉망이어서 설사 살인을 했더라도 변호사만 잘 쓰면 금방 풀려난다는 말도 돌아다녔다.

아주 극소수이긴 했지만 브라질 교포 일부는 주재원들과의 대화에서 이런 사실을 공공연히 떠벌리며 공연히 공포 분위기를 만들곤 했다.

나 역시도 기사와 관련해 이같은 협박을 받기도 했다. 이를 단순한 위협으로만 치부할 수가 없어 유사시 방탄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넓고 긴 가방에 책을 몇겹씩 차곡차곡 쌓아서 넣고 다니곤 했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주재원들은 가급적 현지 교포들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상사 주재원들은 고분고분한 상대인데 반해 특파원인 나는 아주 껄끄러운 존재로 찍혀 있었다.

특파원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돼 상파울루 한인회를 비판하는 기사를 서울 한국일보 지면에 게재하는 바람에 ‘한국일보 김인규 특파원 추방대책 위원회’까지 결성되게 만든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게다가 자신들의 위협적인 언사에 별로 겁먹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오히려 치받는 듯한 태도가 극히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건방진 생각인진 모르나 일반 상사 주재원들과는 활동 성격, 영역 등이 다르므로 일부 브라질 교포들의 무례함에 주눅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기자 시절 몇차례 협박도 당해본 경험이 있어 이것이 예방주사 역할도 했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브라질에서 제법 성공해 돈도 많이 벌었을뿐더러 가진 돈만큼이나 한인 사회에서 위상이 높았던 유모 회장과 대화하다 충돌이 빚어진 것이다.

어느날 대화 막판에 유 회장이 나에게 ‘너’라는 호칭을 쓰는 것이었다. 물론 나이는 나보다 10여 살 위였지만 ‘너’라는 호칭은 나를 우습게 보는 것이라 판단, 바로 아주 강하게 반박했다.

”당신이 뭔데 나한테 너라고 합니까. 당장 너란 말 쓴 것을 취소하고 사과하시오“ 내가 워낙 화를 내며 강경하게 반응하자 이 사람도 당황한 듯했다.

”미안합니다. 내가 평소 김 특파원을 친동생처럼 가깝게 생각하다보니 그런 호칭을 쓴 것같은데 내가 실수했소. 미안합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다“

사건은 이것으로 일단락 난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 인사는 자신이 가진 부만큼 브라질 한인 사회에서 위상이 높다고 자부, 평소에도 자주 건방을 떨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굽신굽신해왔는데 ‘한참 어린 특파원이란 자’가 공개적으로 대들어 사과까지 한 사실이 창피하다고 느낀 듯했다.

얼마 뒤 나와 아내는 주재원들과 골프를 마치고 한국 식당에서 함께 소주를 곁들인 저녁을 하고 있었다. 저 건너편에 나에게 무례하게 굴었던 인물과 평소 그를 호위병처럼 따라다니던 무리들이 보였다.

너란 호칭 때문에 빚어졌던 다툼은 이미 끝난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생각없이 주재원들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쪽 무리에서 호칭 문제로 다투었던 인물로부터 평소 가장 많은 경제적 도움을 받는 관계로 맹종적이면서 거칠다는 인사가 내 자리로 닥아왔다. 그리고는 자기와 잠깐 얘기 좀 하자며 나를 다른 빈 테이블로 이끌었다.

테이블에 가서 의자에 앉은 순간 그는 ”김 특파원이 유 회장님이 너란 호칭을 써서 기분나쁘다고 달려들었다면서“라고 힐난하듯 물었다.

지난번에는 ”너라는 호칭으로 사람의 마음을 긁더니만 이번에는 그 쫄짜가 반말까지 해“라는 생각에 기분이 팍 상했다.

”그랬지요. 그런데 당신이 뭔데 나한테 반말까지 하며 따지는 거요?“

”뭐라고 이 친구가“하는 말과 함께 앞에 있던 브루스타 통을 들고 내 면상을 향해 내리 찍었다.

재빠르게 태권도 상단막기로 브로스타 통을 쳐내고 일어서자 회장 일행들이 우르르 일어나 나에게로 몰려오고 있었다.

”오늘 브라질에서 제2차 신고식을 치르겠는데 이대로 깨질 수야 없지“ 하는 생각에 일단 한발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옆에 있던 의자 등받이를 잡고 테이블 밑에서 빼내었다. 여차직하면 이걸 날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내가 기죽지 않고 공격적인 방어 자세를 취하자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때 내 뒤에서 왠 조그만 물체가 휙 날아오더니 나의 앞을 가로 막았다. 주재원들과 함께 자리에 앉아있던 아내였다.

”당신들이 깡패야. 어디 사람을 치고 난리야. 내가 이 사람 부인이다. 어디 나부터 쳐봐 이 깡패들아“

조그만 몸집이지만 악에 바쳐 한껏 올라간 목소리가 나름대로 앙칼지고 위엄이 있었다.

상대방들은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작은 몸집의 여자인 아내를 칠 수도 없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엉거주춤해 있었다.

그러는 사이 평소 나에게 호감을 보여주었던 식당 주인이 달려와 그들을 밖으로 쫒아냈다.

아내는 마지막 말 펀치를 날렸다.

”한번만 더 이 사람한테 폭력을 쓰면 내가 가만 두지 않을거야. 이 깡패들아“

사태가 수습된 뒤 우리는 노래방으로 가서 마음을 진정시킨 뒤 각자 귀가했다.

이후 주재원들은 아내에게 ‘브라질의 잔다크’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그날 보여준 날렵한 개입과 호통을 흉내내며 놀리기도 했다.

만약 당시 아내가 그렇게 빨리 뛰어들지 않았으면 1(나);4(그들)의 싸움이 붙어 내가 보다 큰 피해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주재원들은 브라질 교포라면 고개를 흔드는 데다 그 가운데서도 거친 이 무리들과의 싸움에 끼어들기가 난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평소 겁 많고 소극적인 아내였지만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자신이 입을 수도 있는 위협을 무시하고 무작정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아내가 즉흥적이고 단기간적인 행동만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브라질에서 귀국하고 아들이 고교 과정을 서울에서 마친 뒤 대학 입학 시험을 치루었다. 그러나 목표한 대학에 낙방, 1년간 재수를 선택했다.

아내는 자신의 정성이 부족해 아들이 떨어졌다고 굳게 믿었다. 어릴적부터 가톨릭 신자였던 아내는 브라질 다녀온 뒤 냉담을 하는 바람에 일종의 벌을 받아 아들이 떨어졌다고 판단했다.

”내가 신앙생활을 소흘히 할 때마다 주님은 가르침을 주시더라“며 신앙심을 다잡아야겠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아내는 광신도거나 신앙심이 도를 넘길 정도는 아니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아들이 재수를 하던 날부터 1년을 매일 새벽 기도를 다녔다. 당시 개포동 우성 아파트에서 개포동 성당까지는 약 4km 거리였다. 정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기도를 다녀왔다.

평소 아내는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더욱이 불편한 다리로 매일 새벽기도를 다닌 것은 보통 정성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내의 정성에 아들은 재수 끝에 서울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지금은 가톨릭 의대 대전 성모병원 외과 교수로 있다. 아들의 오늘이 있기까지는 물론 본인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아내의 남다른 정성과 보살핌이 함께 했다고 나는 믿는다.

아내는 지금도 하늘에서 나와 아들 식구들을 걱정하며 매일 기도를 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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