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상파울루는 한국 교포 숫자가 약 5만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컸던 만큼 한인 성당도 자체 건물을 보유했고 신도수도 상당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미사에 참여할 수 있고 고해성사 후 영성체(가톨릭 의식 중 하나로 둥근 밀떡을 받아 먹는 것)까지 모실 수 있는 점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주 깨끗하게 정화시켜 주는 것같다며 아내는 그렇게 좋아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아끄리마성에서 성당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어 일요일 아침이면 나는 만사 제쳐놓고 아내와 아들을 성당에 데려다 주어야 했다.
아들은 그때까지 영세를 받지 않았지만 아내가 ‘죄많고 고집센’ 남편은 어쩔 수 없더라도 아들만은 꼭 미사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아들은 미사에 참여했다.
나는 미사 시간이면 성당 밖 근처 까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거나 성당 주위를 산보하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비록 나는 미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다보니 성당 신자들은 물론이고 당시 김동억 바오로 신부님과도 반갑게 인사와 안부를 주고 받는 사이가 됐다.
당시 한인 성당은 바오로 신부님의 열정과 노력으로 한창 높이 부흥할 때였다. 신부님은 한달에 한번씩 꼭 구역회의를 하라고 독려하고 구역회의에 순회 참석도 하셨다.
주재원들도 구역을 결성, 한 달에 한 번씩 각자가 준비한 음식을 휴대하고 참석하는 구역회의를 가졌다. 구역회의는 종교 성격 모임이지만 주로 한달간의 안부와 화제로 언제나 즐겁고 화기애애했다.
주재원 자녀들도 학교 친구들과는 또다른 한국 어린이들끼리의 만남이어서 구역회의를 손꼽아 기다리기도 했다.
신부님도 우리 주재원 구역에 자주 방문하다 보니 사이가 무척 가까워져 시내에서 술을 한잔씩 같이 하기도 했다.
신부님은 그런 자리가 있으면 ”김 특파원이 온 후 미사 시간에 발생했던 신도들 차량 부속품 도난이나 훼손 사건이 많이 줄었어. 성당에 기여한 바가 대단히 커“라며 껄껄 웃으며 나를 놀리기도 했다.
신도들이 타고온 차는 미사 시간에 성당 주변 길거리에 주차해놓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동네 불량배들이나 전문 털이범들이 이때를 노려 신도들의 차를 강제로 열고 물건을 훔치고 차량을 손상시키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아내와 아들이 미사에 들어가면 혼자서 커피를 마시거나 주변을 산책했고 그들은 이런 나를 차량 경비원(시큐리티 가드)로 오인했던 것이다.
게다가 키는 크지 않지만 몸집이 제법 있고 머리도 짧게 깎아서 영락없는 경비 인력으로 보았던 듯싶다.
아내는 틈만나면 나보고도 미사에 참여하라고 부탁했지만 나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괜히 쑥스럽고 부담스럽게 여겨져 아내의 요구를 계속 물리쳐온 것이었다.
나는 미사에 참여하지 않지만 외부에서 신부님을 자주 만나 좋은 말씀도 듣고 내 얘기도 하는 것이 미사 불참을 상쇄하는 것이라고 아내에게 강변하기도 했다.
신도회장이 바뀌고 난 뒤 어느날 신부님과 새 신도회장을 모시고 상파울루 시내에서 소주를 제법 거나하게 했다. 바오로 신부님은 소주는 물론이고 신도들과 노래방도 같이 가고 고스톱도 자주 치곤 하셨다.
나는 그런 신부님이 참 좋아 보였고 마음 속으로 존경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이를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신부님의 소탈한 모습이 흡사 ‘대오해탈’한 옛 고승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신부님과 신도회장, 나 세 사람은 기분좋게 1차를 마시고 나니 뭔가 미진한 기분이 들었다.
”2차로 저희 집에 가셔서 한 잔 더 하시죠“ 당초 2차, 더욱이 우리집으로 모시고 가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는데 술기운이 이같은 말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두 분도 좋다고 흔쾌히 동의하셨다.
집에 도착했더니 아내는 거의 놀라 뒤로 나빠질 뻔 했다.
”아니 여보, 신부님을 이렇게 모시면 어떻게 해요. 안주도 변변한 게 없는데. 당신은 너무 무례하네요. 신부님 죄송합니다. 어떡하면 좋아요?“
아내는 신부님은 최대한의 격식과 예의를 갖추고 대해야 하고 집에 모실 때는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아내의 반응에 나 자신도 내가 크게 잘못했나 하는 생각에 당혹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이때 신부님이 나를 구해주었다.
”세레나(아내의 영세명), 김 특파원하고 기분좋게 한잔하고 분위기가 아쉬워 2차로 여기 왔으니까 좋잖아. 맥주 몇 캔 있으면 됐고 안주는 멸치나 마른 오징어면 좋고“
아내는 갑작스런 신부님의 방문임에도 나름대로 성의를 다해 술상을 차려왔다.
다시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나누던 중 갑자기 나도 모르게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다.
”신부님, 저 신부님께 섭섭한 게 있습니다“
”왜 뭐가 섭섭한데“
아내는 내가 술 마시고 실수라도 할까 봐 내 옆구리를 마구 꼬집었다.
”아, 놔! 나 오늘 신부님께 다 말해야 되겠어. 그간 불만있었던 것“
”야 이거 큰일 났구만. 그래 김 특파원 섭섭하고 불만스러웠던 게 뭐야 다 말해봐“
”신부님, 신부님은 왜 저한테 영세받으란 말씀 안 하십니까. 계속 차량 경비원으로만 쓰실 겁니까. 아니면 제가 신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그러십니까?“
한 마디로 억지라는 걸 알면서도 평소 궁금했던 점을 터뜨렸다.
신부님은 껄껄 웃으시고 난 뒤 말씀했다.
”김 특파원, 영세를 받고 안받고, 신자 될 자격이 있다 없다는 모두 저 위에 계시는 분이 때가 되면 알아서 하시는 일이야. 왜 영세받고 싶어?“
”뭐 꼭 영세를 받고 싶다기 보다는......“ 나는 뒷말을 얼버무렸다.
평소 그렇게 미사에 참여하자고 졸라도 꿈쩍않던 내가 이런 말을 하자 아내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되겠다 싶었는지 신부님께 바짝 매달렸다”
“신부님. 이 사람 영세 받아야 돼요. 그래야 우리 아들도 영세받고 영성체 모실 수 있고요”
신부님은 얼마 뒤부터 성경교리반을 시작할 예정이었다며 나보고도 이번에 등록하라고 권하셨다.
내가 술김에 불쑥 영세 얘기를 꺼냈지만 사실은 얼마전 피정을 다녀온 아내의 모습을 보고 크게 느낀 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흘인가 며칠의 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성당에 갔던 나는 내심 너무 놀랐다.
아내는 평소에도 착한 모습을 갖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화가 나거나 부부 싸움을 할 때는 눈에 힘을 넣긴 하지만 평소는 그렇게 착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날 피정 마치고 온 아내는 한 마디로 ‘소금에 절여, 숨이 죽은 배추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보, (집에) 갑시다”하고 팔짱을 끼어오는 아내는 흡사 우묵가사리로 만든 생명체처럼 몸과 마음이 부드럽고 흐물흐물하게 여겨졌다. 자신의 고집, 개성, 주장, 괴로움, 세상에 대한 걱정은 모두 사라지고 갓 태어난 아기처럼 존재의 순수함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과 며칠 사이에 조용한 기쁨과 순수한 착함만이 가득찬, 천사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같은 이미지와 모습은 얼마 뒤 옅어지고 예전의 속세 인물로 돌아왔지만 당시 아내의 변신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피정이란 교육이 어떤 것인지 모르나 매일 이와 비슷한 생활 환경 속에 살고 있기에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그렇게 바보처럼 순수한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당시의 사건이 이날 “영세하라고 왜 권하지 않으시냐”는 반어법적 영세 요청을 하게 된 이유라 할 수 있다.
얼마뒤 교리반이 개설돼 아들은 청소년반, 나는 성인반에 등록했다.
몇 달 뒤 밖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새파랗게 질려 나에게 대뜸 “이제 어쩔거냐고?”고 들이댔다.
사연인 즉 원장 수녀님이 아내에게 전화로 “아드님인 김영화는 출석일 수 미달로 영세 대상에서 빠졌다”고 알려왔다는 것이다.
교리반은 주로 주말에 열리므로 서울에서 손님이 온다거나 다른 약속이 있으면 나는 결석할 수 밖에 없었다. 성당은 집에서 차로 가야할 수 밖에 없는데 아내는 운전을 못하므로 내가 아내와 아들을 데려갈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약속이나 다른 일로 빠지면 자연히 아들도 결석할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가 출석 미달로 영세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다소 난감했지만 다음 순간 신부님께 ‘빽’을 쓸 수 밖에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날 신부님을 찾아 뵈었다. “어 김 특파원이 평일날 왠일이야?”하고 물었다.
나는 원장 수녀님이 통보해온 전화 얘기를 하고 아들이 영세를 받도록 해달라고 부탁드렸다. 그리고 시건방지고 웃기게도 신부님께 은근짜를 놓았다.
“신부님, 우리 애가 영세를 못 받으면 저도 영세 안 받습니다”
“김 특파원이 영세 안 받는다면 누가 겁난데,,,,,,”
이 말씀을 하시고 신부님는 껄껄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나의 공갈(?) 덕분에 아들도 영세를 받았다.
아마도 신부님은 죄많은 한 인간을 구원하자면 그 아들도 함께 영세를 주어야 한다고 원장 수녀님을 설득하셨을 것이다.
영세를 받은 날은 1993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받고 난 소감?
왠지 큰 빽을 가진 것같다는 뿌듯함이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나는 비록 영세는 받았지만 날라리 신자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성당을 가도 아내가 가므로 따라 나선다는 정도였을 뿐이다.
아내가 9일 기도를 함께 하자고 숱하게 이끌어도 나는 응하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영세를 받은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내를 위한 시혜처럼 말하거나 행동하기도 했다. 함께 성당에 가는 것도 아내에게 선물을 주는 양 생각했고 행동했다.
많은 죄, 하느님께 속죄하기에 앞서 아내에게 더 간절하게 속죄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김동억 바오로 신부님은 진정한 성직자였지만 때로는 엄격한 종교적 틀을 깨고 소탈한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신 점을 언제나 잊을 수가 없다. 신부님은 상파울루 및 미주 지역 사역을 마친 뒤 대전 교구로 귀임하셨다. 당시 한국민은 IMF로 큰 고통을 겪을 때였다.
신부님은 해외 사역을 하시는 동안 한달에 기껏 300~400불밖에 되지 않는 월급을 모아 수천만원을 지역 중소기업에 전하기도 하셨다.
신부님은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 아내 세레나 역시 하늘 나라로 갔다.
나는 고교 때 좋아했던 애드가 알란 포의 시 ‘애나벨 리’의 한 구절을 연애 시절 종종 그녀에게 들려주곤 했다.
‘But we loved with a love that was more than love -
I and my Annabel Lee -
With a love that the winged seraphs of heaven
Coveted her and me.
(그러나 나와 내 사랑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국의 날개 달린 천사마저 시기할 정도의
특별한 사랑을)‘
과연 날개 달린 천사가 시기한 탓일까. 그녀를 그렇게 일찍 데리고 간 것은.
하고 싶은 말,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어떻게 해야할까?
“우리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린다”는 공허한 말밖엔..........
저작권자 ⓒ 해뜸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