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내 말을 안들어서 이렇게 고생하는 거에요. 내가 얘기하면 좀 진지하게 듣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로 무시하는 바람에 사태가 이 지경이 된 거잖아요”
세상을 떠나기 얼마전부터 아내가 자주 내게 해오던 말이다. 사실 이 말은 100% 맞는 말이다.
연이은 사업 실패로 내 인생은 물론 아내마저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뉴욕 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오기전 받은 서울 한국일보 퇴직금과 집 판 돈은 융자 등을 갚고 얼마간 남았다.
아내는 강남에다 아파트나 빌라를 한 채 사서 아들이 학교 다니며 살게하고 조금 남는 현금은 비상금으로 갖고 있자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제안에 전혀 귀기울지 않았다. 북한산 밑에 새로 짓고 있는 제법 큰 아파트와 명동에서 리모델링하고 있는 상가에 투자를 결정했다.
나중에 우리가 한국에 돌아 올 경우 굳이 8학군에 살 필요없이 공기좋은 북한산 제법 큰 아파트에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리모델링 상가는 어느날 아내와 같이 명동을 거닐다 받은 광고 전단지를 보고 매입을 결정했다.
리모델링 중이던 상가는 내가 대학 시절 로망이던 맥주집이 들어있던 건물이었다. 그곳에서는 가수 하남궁씨가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고 유복성씨가 봉고를 연주하던 곳이었다.
고급스런 분위기와 멋진 음악 연주에 매혹된 나는 “내가 사회인이 되어 돈을 벌면 반드시 이곳을 자주 찾아야지”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곳이었다.
그 맥주집이 없어지고 이제 그 건물이 상가로 변신한다기에 그 예전의 추억이 되살아나 상가를 하나 매입키로 한 것이다. 물론 아내는 반대했지만 나는 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는 게 아닙니다. 강남 아파트 하나 사는 것보다 큰 평 아파트에다 월세가 나오는 상가로 분산투자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이 건물들에 투자할 때만 해도 아내는 예상보다 강하게 나의 결정에 반대했다. 평소 대부분의 결정사항은 내가 양보하고 아내가 주도권을 쥐지만 특별한 경우 내가 우기면 아내는 어쩔 수 없이 내게 백기를 들곤 했다.
당시 투자는 여느 때와 달리 아내의 반대가 심했으나 내가 펄펄 뛰자 아내는 할 수 없이 내 의견에 따랐다.
아내는 평소 사주상으로 자신은 ’연약한 촛불‘이고 나는 ’아주 강한 경금‘이라고 풀이하곤 했다. 보통때는 촛불이 주위를 밝히지만 강한 쇠가 휘두르면 촛불은 꺼질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이 자주 이기는 것같지만 결정적일 때는 나한테 질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하곤 했다.
당시 케이스도 그렇고 뒤돌아보면 아내의 말은 맞는 것같았다. 평소 아내가 고집을 세우다가도 어쩌다 한번 내가 강하게 나가면 아내는 풀이 죽어 내 뜻을 따르곤 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투자는 대실패로 끝났다. 북한산 아파트는 두 개의 건설회사가 잇달아 부도나는 바람에 융자 이자 부담만 늘어났다. 결국 견디다 못해 손해를 보고 처분하고 말았다.
명동 상가는 아직도 세가 놓였다가 빈 채로 있다를 반복하면서 역시 융자 이자 부담에 허덕이고 있다.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 신문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덴버 한국일보 운영권을 인수, 경영하다 빚만 잔뜩 지고 손을 털었다. 이 역시 아내가 반대하던 사업이었다.
아내는 “당신 신문을 가지고 싶다면 차라리 우리가 오래 살았고 시장이 큰 뉴욕에 가서 주간지를 합시다”고 의견을 냈다. 이 역시 아내의 의견을 무시하고 내 주장만 폈다가 뼈아픈 결과를 빚었다.
덴버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앤틱 가게를 하다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모 재단이 운영하려던 대학 설립을 맡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미주 한국일보 본사로부터 시카고 한국일보 인수를 제안받았다. 내 재정능력 밖이기에 다른 인수자를 연결시켜주는 과정에서 독립 시카고 한국일보 사장직을 제의받았다. 물론 나에 대한 대우 문제 역시 함께 포함돼 있었다.
이 과정에서 아내는 대우 문제 등을 단순히 구두로만 할 게 아니라 문서화하라고 몇 차례나 채근했다. 그러나 나는 서로 믿는 처지에 구두 약속이면 됐지 문서화할 필요가 있느냐고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다. 몇 개월간의 줄다리기 끝에 인수인계가 결정되고 나는 미주 한국일보에서 독립한 새로운 시카고 한국일보의 사장으로 임명돼 아내와 함께 뉴욕에서 시카고로 다시 돌아갔다.
당시 아내는 뉴욕을 떠나기 싫어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를 따라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독립 시카고 한국일보 사장으로서의 생활은 약 7개월만에 끝나고 말았다.
이에 대한 전말은 추후 다른 글을 통해 상세히 서술할 예정이다.
이후 아들 내외로부터 받은 돈으로 인터넷 신문 및 인쇄매체 매거진을 운영했으나 여의치 못해 그만 둔 사연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마땅한 수입원이 없자 나한테는 결코 해당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던 실업수당까지 타게 되었다. 물론 실업수당 수령은 당연한 나의 권리였지만 정기적으로 소셜시큐리티 사무실을 방문하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후 회사 다니면서 납부한 세금으로 인한 은퇴 연금이 나오고 시카고 중앙일보에 매주 칼럼을 쓰고 받는 원고료의 도움을 받아 다소나마 한 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나를 기대 이상으로 평가해주며 많은 도움을 주었던 시카고 중앙일보 권현기 사장이 교체되고 나서부터는 원고료마저 끊어지게 되었다.
이후 우리에게 밀어닥친 정신적, 재정적 고통은 만만치 않았다. 특히 아내는 이후 상당 기간 침울한 침묵 속에 빠져들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는 위기가 닥치면 자신보다는 남편을 먼저 생각하는 기전을 발동시켰다. 자신이 계속 우울해 있으면 내가 더욱 힘들어하고 의기소침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내는 얼마 뒤 내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지금은 비록 앞이 보이질 않는 것처럼 암담하겠지만 멀잖아 당신이 재기하리라고 나는 생각해요. 단지 이럴때 내가 당신을 도와주지 못하는 게 정말 안타깝고 미안하네요. 그러나 여보 우리 함께 힘냅시다”
순전히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나는 이 말에 힘을 얻기도 했다. 그러면서 얼마 안가 새로운 돌파구가 생길 걸로 믿었고 실제로 몇차례 가능성도 있었다.
그 가운데 상당한 규모는 물론이고 성공 가능성이 컸던 사업이 눈에 들어왔다. 쿠바와의 의료 분야 사업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미국은 쿠바와 대사관 재개설에 합의하고 국교를 정상화한다고 공식 선언한 적이 있다.
나는 브라질 특파원 시절을 포함해 3차례 쿠바를 방문, 사회 전반을 취재한 바 있다. 쿠바는 가난한 공산국가였지만 의료수준만큼은 상당히 높다는 사실을 알았다. 난치병으로 알려진 망막 색소 변이증(망막 색소가 소멸하면서 시야가 점점 좁아지다 결국 실명에 이르는 병)을 완치는 시키지 못하나 진행을 멈추게 하는 치료법을 가진 유일한 나라가 쿠바였다.
쿠바에서 이같은 치료를 받고 더 이상 시력이 약해지지 않는다는 브라질 형제, 유럽과 중동에서 온 환자는 물론이고 전문의사를 직접 만나 인터뷰한 적이 있다.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로 발생한 방사능 피폭자들을 소련 의료진이 제대로 치료할 수 없자 쿠바가 이들을 자국으로 불러 치료하고 있던 현지도 방문, 취재한 적이 있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의료 수준에서는 쿠바가 단연 우뚝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연히 미국과 쿠바의 관계 진전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던 상황에서 ‘CBS의 60 미니트’ 특집 기사가 나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60 미니트는 미-쿠바 관계가 정상화되면 미국내 당뇨병, 폐암 등 몇몇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진전을 보일 것이라고 집중 보도했다.
특히 쿠바 당뇨 치료제는 매년 미국에서 7,000여명씩 발생하는 당뇨로 인한 다리 절단 환자를 대폭 줄이거나 아예 없앨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더욱이 내가 브라질 특파원 시절 현지 취재 당시 쿠바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게서 선물받았던 콜레스테롤 저하제 뻬뻬헤(PPG)가 폴리코사놀이란 이름으로 이미 한국에 들어와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는 의외의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러나 PPG는 쿠바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반면 한국에서 팔리는 폴리코사놀은 호주산 사탕수수로 만든 점이 달랐다.
이런 점 등으로 미루어 보건데 쿠바 의약품을 한국으로 수출하면 대박을 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를 사업화할 것인가 며칠을 궁리하다 뉴욕에 살고 있으면서 전문직 미국인들과 네트웍이 넓은 후배 우장곤군에게 전화했다.
나의 얘기를 들어본 후배는 우선 쿠바 정부와 연이 닿을 수 있는 인물 물색에 들어가보겠다며 가능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뒤 후배는 유태계 재활전문의와 이 사람의 환자인 쿠바 출신 스페인 및 미국 국적의 건축사와 접촉이 됐다고 알려왔다.
특히 건축사는 비록 몇 년전 해외로 나왔지만 쿠바에는 현 정부 고위직에 근무하는 친인척들이 상당수 있어 의약품 수입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후배는 재활전문의 및 건축설계사와 쿠바 쪽과의 업무를 맡고 나는 서울에서 의약품을 수입할 회사 및 인물을 물색했다. 이같은 의약품 사업, 더구나 쿠바산이므로 더욱 오랜 시간과 경비가 들 것인데다 무엇보다 신뢰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오랫동안 친형제 이상으로 알고 지냈던 ‘D&P 파트너스’의 박상설 사장에게 제안, 동의를 받았다.
쿠바는 자기네 스스로가 ‘시베리아 공산당이 아니고 열대 공산당’이라고 말할 만큼 사상 무장이나 공산주의 신념이 다소 느슨한 편이다. 여기다 낙천적이고 바쁠게 없는 행동 등으로 인해 진행이 늦고 결정 사항이 자주 바뀌는 등 추진에 어려움이 많았다.
근 2년이란 시간이 흘러 우리측 크레딧 라인이 1,000만달러(한화 약 110억원)가 확보되는 것만 확인하면 마무리, 본격적인 수출입 절차에 들어가기로 했다. 한국으로의 수입은 일단 쿠바 쪽 문제부터 해결한 뒤 풀어나가기로 잠정 결정한 뒤였다.
그러나 비즈니스란 당사자들의 창의성, 노력만으로 되지않는다는 뼈아픈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됐다.
유태인 재활전문의와 쿠바 출신 건축사 등이 2017년 10월24일 아바나를 방문키로 하고 비행기 티켓과 숙소를 예약하는 도중에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오바마 대통령을 이은 신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인들의 쿠바행을 금지한다는 정책을 발표할 것이란 사실이었다. 쿠바행을 감행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상황에 잠시 추이를 두고 보기로 했다. 그러나 며칠 뒤인 2017년 11월초 미국인의 쿠바행 금지가 정식 발표되었다. 처음에는 비즈니스 차원의 금지에 이어 개인적인 관광까지 막아버렸다.
우리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년여 동안 서로간 이해충돌을 겪기도 했지만 오로지 사업 실현에만 몰두했던 수많은 시도와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측 인사 2명, 내 후배 우장곤, 서울의 박상설 사장과 나 모두가 한동안 문자 그대로 멘붕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가장 억장이 무너진 사람은 아내였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한 남자들이 어떤 으쓱거릴 일이 생길 경우 누구에게 가장 먼저 자랑하고 싶어할까? 과학적인 통계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나 남편은 자신의 아내에게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세세하게 자랑하고 싶어한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내 경우는 당연하고 다른 사람들 케이스에서도 맞아 떨어진다고 본다.
쿠바 의약품 수입 문제는 한동안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실현 가능성도 의문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년여가 지나면서부터는 어느 정도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의기소침한 아내에게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는 것은 물론 내 자랑도 하고 싶어 아내에게 관련 사업 진행 정도를 알려주었다.
아내 입장에서는 워낙 거창한 사업이라 성사가 잘 될 것인지 한동안 의문과 회의감을 나타냈다.
이는 ‘장래 결과를 마냥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다 실패하면 그만큼 실망과 아픔이 크므로 오히려 의도적으로 성공 가능성을 낮춰, 향후 실패에 대한 충격을 줄이려는’ 아내 특유의 충격 완화법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실현 가능성이 커지면서 나 역시도 확신과 함께 아내에게도 낙관적인 전망을 자주 전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의 진척 상황을 알려주면 “정말 잘 되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희망과 기대를 걸었던 게 사실이었다.
아내는 이 비즈니스의 성공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보다는 자신이 그렇게 불안해하고 가슴 아파했던 나의 방황이 끝날 수 있게 된다는 점에 더욱 기대를 하고 있었다.
패자 부활전에 나서서 역전 우승의 신화를 쓰리라고 기대했던 나의 꿈, 아내의 소망은 끝내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나의 재기를 자신의 최대 소망으로 여겨왔던 그녀에게 새로운 도약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것이 너무 가슴아프다.
그러나 나는 아내를 그리며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꼭 나는 재기할 것이라고. 비록 젊지 않은, 오히려 기우는 나이지만 나는 내 자신이 아니라 저 하늘의 아내를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꼭 이룩하겠다고.
아내의 또 다른 소망은 내가 글을 쓰는 것이었다.
나는 브라질 특파원을 다녀온 뒤 당시 경험을 토대로 ‘브라질 문화의 틈새’란 책을 출간한 적이 있다.
일반 서점에서 팔기도 했지만 주변 지인들에게 증정도 제법 했었다. 지인들 중에 평소 우리와 자주 연락을 취해온 이들은 “책 내용이 아주 좋았다”, “영화 아빠 글을 아주 잘 쓰시네”하는 말들을 해오곤 했다.
책을 받아본 이들이 인사 치레나 ‘외교적 언사’로 한 말을 순진한 아내는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아주 글을 잘 쓰는 걸로 착각, 다시 책을 냈으면 하는 게 소원이라고 수시로 얘기하곤 했다.
“때가 되면 쓰겠지. 아직은 쓰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라며 아내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곤 했다.
아내가 떠나고 난 뒤인 이제서야 나는 책상 앞에 앉았다. 결혼 생활 43년, 그녀를 처음 본 뒤 마음에 품어왔던 세월까지 합하면 55년이 된다, 그녀의 말년 소원이던 나의 글쓰기가 나를 두고 훌쩍 떠난 그녀와의 삶의 편린들을 가장 먼저 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일이다.
나의 글쓰기에 대한 아내의 평가는 큰 착각일지 모르나 글쓰기에 대한 소원만큼은 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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