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Tube . 올챙이 기자의 첫 사회면 톱 특종 기사

김인규 기자 승인 2021.11.18 19:08 | 최종 수정 2021.11.18 19:17 의견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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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대학교한강성심병원. 한강성심병원에서 이름이 바뀌고 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나는 1976년 10월 경에 한국일보에 입사. 약 두 달간 오리엔테이션을 거쳐 1977년 1월4일부터 견습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언론사들은 신입 기자들은 입사후 약 6개월간 견습기간을 거치게 했다.

견습 기간 중에는 특정 부서로 배치받지 않고 일정 기간을 쪼개어 편집국 각 부서를 돌며 각 부서의 성격 등을 파악하는 기회를 갖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 함께 입사했던 한국일보 33기 동기 14명은 3월에 한국일보 및 서울 경제, 일간스포츠, 코리아타임스 등으로 고정 배치를 받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6개월간 각 부서를 도는 소위 ‘뺑뺑이’ 근무를 3개월 줄인 셈이었다.

나는 입사 동기 2명과 함께 한국일보 사회부로 배치 받았다.

요즘 젊은 신입 기자들은 자신의 근무 희망부서를 국제부, 체육부, 문화부 등 본인의 특성과 취향에 맞는 부서를 선택한다고들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언론사에 입사할 때만 해도 대부분이 사회부 근무를 희망했다. 사회부에서 경찰서 출입을 통해 기자로서의 자질과 소양을 키워야 한다고들 생각할 때였다.

나는 운 좋게도 이종남, 박영철이란 동기생 2명과 함께 한국일보 사회부로 발령받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동기생 2명 등 3명은 갈망하던 사회부 경찰서 출입으로 기자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뛸 듯이 기뻐했고 나름대로 자부심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우리들이 사회부 기자 생활을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 선배들로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사회면 톱 기사를 쓰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선배들은 “너희들보다 몇 기 선배들은 배치 일주일 만에 사회면 톱 기사를 썼다”거나 “스트레이트 기사가 없을 때는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기획 기사도 만들곤 했는데 너희들은 도대체 뭐하느냐”고 닥달했다.

물론 몇몇 선배들의 이같은 말은 신참 기자들을 분발시키고 보다 근성있는 기자로 만들기 위한 사랑의 회초리 성격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수시로 사회면 톱기사는 언제 나올거냐고 조져되는 우리 동기들은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동기생들보다 앞서야지 하는, 견제하고 경쟁하는 분위기가 싹트기는커녕 서로를 걱정하는 관계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끼리 만나면 우리 중에 누구라도 먼저 사회면 톱기사를 써서 33기 도대체 뭐하냐란 비난에서 해방되자고 다짐하곤 했다.

동기생 3명은 심지어는 단독 톱 기사를 찾기가 힘들다면 합동 기획 기사라도 써보자고 머리를 싸맸지만 이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올챙이 기자인 내가 생각해도 괜찮은 기사일 것같은 소스가 귀에 들어왔다.

한강성심병원의 길병도 박사란 분이 우리나라 직업병 실태에 대한 논문을 곧 열릴 관련 학회에서 보고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로 길 박사를 만나 논문 얘기를 들었다며 이를 기사화하고 싶다고 말을 했다.

길병도 박사는 논문을 지금 제공할 수는 없고 학술 세미나에서 보고하고 난 뒤에는 줄 수 있다고 대답했다.

논문 내용이 유출되지 않고 내가 독점적으로 입수해야 하므로 세미나가 열리는 날까지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마침내 세미나를 마친 뒤 바로 논문을 입수했다. 우선 타사 기자들이 이를 입수한 것같지 않아 일단 마음이 놓였다.

논문을 받아들고 기자들이 오지 않는 근처 다방에 가서 펼쳐 보았다.

그런데 분명이 큰 기사임에는 틀림없으나 내가 기사로 풀어나가기엔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 계속 읽고 연구하면 기사화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럴 경우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 사이 타사 기사들이 이 논문을 입수하면 특종 기회를 놓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없이 논문을 들고 바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사회부장 옆에서 데스크를 보던 정달영 사회부 차장에게 논문를 건넸다. 그리고는 “분명히 기사는 될 것같은데 제가 소화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하고 말씀드렸다.

정달영 차장은 논문집 페이지를 슬슬 넘기며 보더니 나를 보고 빙그레 웃으면서 “기사는 되는 것같은데 기사로 만들 수는 없을 것같다고?”하면서 묻는 것이었다.

“예 분명히 기사는 될 것같은데 제가 소화하기에는.....”하고 얼버무렸다.

정 차장은 “하기야 당신이 기사로 만들기에는 좀 무릴 것같구만”하더니 이문희 사회부장을 보고 한 마디를 했다.

”부장, 이 기사 재밌는데요. 이거 사회면 톱으로 갑시다”고 말하면서 논문의 내용을 간략히 보고했다.

이문희 부장도 얘기를 듣더니 “그래, 내용이 괜찮네, 톱으로 가자고”하고 대답했다.

나는 표정은 애써 무표정하게 지었으나 순간적으로 속에서는 환호성이 절로 터져나왔다. “드디어 사회면 톱 기사를 쓰는구나. 원한의 3.8선을 돌파하네”라는 기분이 일었다.

다음날 한국일보 사회면에는 비록 내가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내가 입수해 전한 논문이 당당히 톱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 동기 둘도 “이제는 33기 너희들은 도대체 언제 사회면 톱 기사를 쓰냐”는 핀잔을 듣지 않게 됐다며 반가워했다.

이 기사는 1977년 5월19일자 사회면 톱 기사로 자리잡고 있다.

톱 제목; “노동자는 직업병에 시달린다”

세컨 제목: “전체의 12.8%가 앓아 섬유제조업은 10명 중 3명꼴”

기사 리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나라 산업장 근로자의 12.8%는 각종 직업병에 걸려있으며 산업장 가운데서도 섬유제품제조업의 근로자가 가장 피해를 많이 입어 전체의 22%가 의학적인 유소견자로 판명됐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72년부터 76년까지 5년간 서울 경기 충남북 전북 지방의 근로자 총 4만3천1백70명을 대상으로 서울 한강성심병원 의과학 클리닉(연구대표 길병도 박사)이 조사한 ‘한국 근로자의 직업병 실태연구’에서 밝혀졌다.

5월18일 발표된 이 보고서는 우리나라 직업병의사태를연도별로 조사, 비교한 최초의 논문이라는 점에서 주목되고 있다.

연구팀은 섬율제품제조업 등 모두 15개 직종에 걸쳐1. 소음성 난청, 2. 유기용제(벤젠) 중독, 3. 연중독, 4. 트라이클로르에틸렌 중독 5. 크롬중독 6. 진폐증 7. 결핵 등 업무상 질병을 여러차례에 걸친 정밀진단으로 가려냈다......중략”.

톱 기사가 나온 날 영등포 경찰서, 노량진 경찰서, 관악 경찰서, 남부 경찰서, 강서 경찰서 등 내가 출입하고 있던 5개 경찰서를 둘러보고 오후에 길병도 박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자신의 논문을 이렇게 비중있게 한국일보 사회면 톱 기사로 썼으니 길 박사께서 고마워하고 칭찬해줄 것이라 속으로 기대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나의 이같은 기대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길 박사는 나를 보더니만 왼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숙이면서 “아이고. 김 기자!” 하고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밖의 반응에 나는 깜짝 놀랐다. 혹시 기사의 팩트가 잘못된 것이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길 박사님, 기사가 부정확하거나 엉터리로 표현한 부분이 있습니까”

그러자 길 박사는 “아니지 기사가 부정확하거나 엉터리 부분은 없지. 오히려 너무 정곡을 찔러서 문제지”하고 말씀다.

“무슨 뜻입니까. 박사님”하고 되묻자 길 박사는 곧 표정을 풀고 기사가 나가고 단 뒤 일어났던 유쾌하지 못했던 사정을 알려주었다.

노동청, 당시에는 노동부가 아니라 노동청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보사부, 중앙정보부 등에서 전화를 걸어와 왜 이같은 문제의 기사가 나가게 했느냐고 길 박사를 공박했다는 것이었다.

사실 길 박사의 논문 요지는 최근 5년간 한국 직업병 실태를 조사해본 결과 매년 직업병 환자는 줄어들어 1976년 현재 직업병 환자는 12.8%라고 밝히고 있다. 즉 길 박사의 논문의 요점은 지난 5년간 한국 직업병 유병율은 매년 감소하고 있다는데 있었다.

그러나 한국일보 사회면 톱 기사는 가장 최근인 지난해 직업병 환자는 상당히 높은 숫자인 12.8%에 달한다는 점에 포커스를 두고 있었다.

물론 길 박사의 논문이나 한국일보 기사는 팩트에서 틀린 것은 하나도 없지만 어디다 강조를 하느냐에 따라 엄청 다른 뉴앙스로 닥아와 당국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당국 가운데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 관계자는 북괴, 당시는 북한이 아니라 북괴라 호칭했다. 북괴의 노동신문 등 선전매체가 한국일보 기사를 인용해 “우리 북조선 인민들은 친애하는 영도자 김일성 수령님의 지도아래 노동자들이 직업병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반면 한국 노동자들은 각종 직업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선동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북괴의 선전 선동이 있었는지 아니면 정부 당국이 입맛에 맞지않는 연구 논문, 게다가 신문기사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이같은 논리로 길 박사를 공박했는지는 알수 없었다.

당시만 해도 북한 매체를 접할 방법이 없어 이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뿐아니라 만약 이같은 행위를 했다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걸릴 때였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반응에 미안함과 놀라움으로 당황해하고 있는 나에게 길 박사는 곧 표정을 풀고 다시 평소처럼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당국에서 뭐라든 내 논문을 그렇게 비중있게 보도해주었으니 고맙네. 언제 식사나 같이 한번 하자고. 참 나가는 길에 송호성 병원장님을 한번 찾아 보시오. 원장님은 이 문제로 나보다 훨씬 더 큰 고초를 겪으시는 것같더라고”

무거운 마음과 걸음으로 4층인가 5층에 있던 병원장실로 향했다.

부속실을 거쳐 송원장 방을 노크했더니 들어오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큰 숨을 몰아쉬고 방에 들어가 인사를 드렸다.

자신의 의자에 앉아있던 송원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쇼파로 다가오며 “어, 김 기자 왠일이야”하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표정과 반응이었다.

다소 어리둥절한 나는 “방금 길병도 박사님 방에 들렀다 오는 길입니다. 길 박사님 말씀이 원장님이 제 기사로 인해 아주 심한 고초를 겪으셨다고 하십디다. 본의 아니게 죄송합니다”

송호성 원장은 “길 박사가 괜히 쓸데 없는 얘기를 했구만. 고초는 무슨, 전화는 몇군데 받았지. 고초는 아니야”

길병도 박사방에 들어설 때와 또다른 성격의 예상밖 반응에 다소 어리둥절하면서도 마음이 한결 놓였다.

이어 송 원장은 “길 박사가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했는지 알겠구만. 그러나 기자가 자신의 기사를 키우기 위해 그 정도로 비틀어 기사를 만드는 센스는 있어야지. 논문을 쓴 길 박사의 입장, 기사를 만든 김 기자의 입장, 관계 당국의 입장이 각각 다를 수 있잖아. 김 기자도 기자의 관점에서 해석해 기사를 썼잖아. 괜찮아 걱정하지마”

지금식으로 표현하면 너무나 ‘쿨’한 반응에 1층 길 박사 방에서 원장실까지 오는 동안 가졌던 마음의 무거움이 순식간에 씻어지는 느낌이었다.

당시 한강 성심병원장실을 나오면서 느꼈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 두분의 인격과 반응은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 나는 한국나이로 28살, 만 나이로 27이었다. 길병도 박사나 송호성 원장 입장에서 보면 한참 어린 막내 동생이나 조카, 그것도 아니면 아들뻘까지도 가능한 철부지 젊은 기자였다.

당시 두 분은 사회 경험이 부족한 젊은 기자에 대해 최대한의 존중과 배려심을 보여주었다.

물론 길박사는 처음에는 다소 언잖은 표정을 짓긴했으나 이내 마음을 풀고 나를 위로했고 “원장님께 가서 위로를 해드리라”며 원장님을 배려했다.

송호성 원장은 처음부터 기자나 신문사 입장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말씀과 반응을 보여주었다.

나는 가끔 당시를 되돌아보며 요즘은 기자와 취재원간에 이같이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존재할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특하면 기레기 즉 기자 쓰레기, 가짜 뉴스라며 폄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풍토가 만연해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물론 엉터리나 수준미달 기사를 쓴 기자와 그 매체의 잘못도 커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파적 관점에서, 아니면 자기의 이익을 위해 거칠게 공격하고 비난하는 풍토만 존재하고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하는 분위기는 사라진 게 아닌가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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