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즈에서 부린 주택 호사

이웃과 협업 통해 경비 줄이며 테라스, 부엌 넓혀

김인규 기자 승인 2022.01.18 16:16 의견 0

매년 11월15일이면 나(크리스티나 D. 존슨)는 벨리즈(Belize, 중미 카리브해에 면한 나라, 수도 Belmopan, 구 명칭 British Honduras)로 이주해온 것을 기념한다. 이곳으로 이사온지 6년째이던 지난해는 내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사상 처음으로 영구 주택을 새로 지었기 때문이다.

비록 주택 건설이 흥미진진할진 모르지만, 매우 어렵게 이루었고, 특히 꿈에서 상상했던 과정은 결코 아니었다. 걸림돌과 흠집, 심장이 멎는 순간들이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매우 적었고, 그 과정에서 돈버는 일은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만 해도 나는 앉아서 연필과 자로 그래프 종이에 도면을 스케치하는 일이 주업이었다. 나는 벨리즈의 집에 두 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넓은 베란다와 넉넉한 부엌.

나머지 두 곳은 스페이스 크기가 중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베란다와 부엌을 넓히기로 결정했다. 확실한,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못했지만, 어느정도 치수를 결정했고, 일을 할 현지인을 고용했다. 그리고 네 개의 구체적인 기초들을 세웠다.

현지 고용인은 구멍을 파고 시멘트를 섞는 힘든 일을 돕기 위해 몇 명을 고용했다. 다른 몇명은 와서 그들을 지원했다. 약 200달러를 들여 하루 만에 12개의 발판을 건설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여러 가지 잡일을 시작했다. 400달러를 들여 에머리 기둥을 샀고 175달러를 주고 콘크리트 기둥을 만들라고 시켰다. 100달러에 정화조 구멍을 파게 했는가 하면 125달러를 지불하고 철제 울타리용 장대도 샀다.

하지만 벨리즈에서 인생을 즐기며 주택 증축을 하던 중 최악의 일이 일어났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것이다.

갑자기 허를 찔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시 프리랜서로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너무 오랫동안 직장에서 일했기 때문에 내 프리랜서 이력은 형편이 없었다.

고맙게도 전 직장으로부터 퇴직금을 받았고 그것으로 집 증축에 사용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나는 그간 친하게 지냈던 벨리즈인 가족도 집을 지어야 했지만 재정이 넉넉지 못함을 알았다.

그 가족의 주부인 아비가일은 벨리즈의 전통적인 여성으로 멋진 아이들과 함께 집에 머물며 집안일을 해왔다. 가장인 엘로이는 재능있는 젊은 공예가로 물건을 만들며 살아왔다.

우리들은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았다. 미국에서는 이를 "내 등을 긁어주면 네 등도 긁어주마"라고 말한다. 반면 벨리즈 사람들은 "손으로 손 씻기"라고 말한다".

나는 그들보다 시간이 더 많았기 때문에 내가 필요로 하는 재료들을 주문할 때 엘로이의 것도 함께 주문함으로써 할인을 받았다. 내 퇴직금을 먼저 사용하면 엘로이는 형편이 될 때 내 돈을 갚곤 했다.

엘로이의 집 기초 작업이 4일 만에 끝나자, 엘로이는 우리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날씨는 덥고, 끈적끈적했지만 6일 만에 단 3명의 남자만으로 39x39피트, 침실 1개짜리 내 집이 맞춤형 지붕집으로 완성됐다.

나는 나와 엘로이가 힘을 합쳐 성취한 결과를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이 당신을, 당신이 사람을 알아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친절한 것도 아니고 모두가 되먹지 않은 것도 아니다. 지역에서 친분을 쌓는 데는 많은 세월이 걸렸고 많은 기부, 배움, 상호 존중도 필요했음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재정적인 문제로 니멀리즘 방식으로 포스트 앤드 빔 공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나의 마루 바닥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모든 방문객들이 부러워하는 내 베란다로 통하는 멋진 프렌치 문들은 내 아름다운 집을 더욱 독특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벨리즈의 삶과 문화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차가운 샤워를 하는 것에 적응하지 못했기에 ‘폭포수 샤워’에 돈을 쏟아부었다.

작업을 마친 후 총 비용은 약 1만3,000달러였다. 이 가운데 융자를 제외하고 내가 낸 비용은 5,000달러였다.

<인터내셔널 리빙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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