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국민의 승리인가?
김성우 칼럼
한국일보 전 주필, 고문
김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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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1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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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국민의 승리인가]
김성우 칼럼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1957년 졸업/한국일보 고문, 주필, 편집국장, 駐佛특파원 역임/近著: "수평선 너머에서",
"인생을 묻는다", "명문장의 조건", "돌아가는 배" (최근 이를 바탕으로 映像자서전《김성우 Biovideo
‘돌아가는 배'》제작/시인협회가 공인한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시인/욕지도 産>
<<<이것이 국민의 승리인가>>>
국난이다. 나라가 요동친다. 나라가 기울고 있다. 대한민국이 위태롭다.
정치판이 난장판이다. 포연 없는 전쟁터다. 온 나라가 독기의 독가스로 가득 차 있다.
하늘에는 핵미사일이 으르렁거린다.
야당은 브레이크도 없이 나라를 벼랑 끝으로 몰며 돌진하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역부족이다. 그런데도 일부 국민은 덩달아 신이 났고
일부 국민은 발만 동동거리고 있고 일부 국민은 태평이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다. 전 국민이 번쩍 정신 차려
대한민국을 구출해야 한다. 실기는 망국이다.
1 누가 국민인가
4•10 총선 결과 승자인 야당은 “국민의 승리”라 했고 패자인 여당은
“국민은 항상 옳다”고 했다. 그것이 과연 국민의 승리였고 과연 국민은 항상 옳은가.
진정 국민의 개가요 국민이 지당하다면 국민은 지금 그 성취에 도취하고 있을 때인가.
승자도 패자도 국민 앞에 납작 엎드리는 것을 보고 국민은 기고만장할 것이다.
그러나 우쭐할 것 없다. 승자도 패자도 국민에게 아첨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은 거인이다.
누가 감히 맞서겠는가. 국민은 성역이다. 누가 감히 탓하겠는가.
지금 야당은 온갖 폭거를 “국민의 뜻”이라고 한다.
제멋대로 하면서 민의라니, 이들에게는 당수 개인의 사심이 민의요
자기 당의 당심이 민의다. “국민이 승리자”라는 말은 자기 반대자는 국민이 아니요
자기 당 지지자 외는 국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 놓고 야당은 국민을 섬기는 척하면서 그 책임은 모조리 국민에게 전가시키고 있다.
지난 총선의 결과는 국민을 꼭 3등분했다. 정당 지지도가 여당파 3분의 1,
야당파 3분의 1, 기권파 3분의 1이다. 야당은 이 3분의 1의 지지를 가지고
“국민의 승리”라고 허풍을 친다. 그 3분의1인들 마음대로 폭주하라고 투표지에
사인한 적이 없다. 게다가 국민의 3분의 2는 지지하지도 않았다.
들리는 국민의 소리는 힘세다. 그러나 들리지 않는 국민의 소리는 더 힘세다.
본래 정부나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걸핏하면 국민을 끌어당겨 국민은
가랑이가 찢어진다. 그들은 무슨 짓을 해도 말끝마다 “국민을 위해서”요
“국민이 원한다면”이요 “민심 따라”다. “국민”은 무소불통이다.
궁지에 몰리면 “국민”을 불러댄다. “국민”만 앞세우면 다 비껴 준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당명마다 “국민” 아니면 “민주”를 내걸고 국민을 호객한다.
너도 나도 국민을 외쳐대어 “국민”이란 말은 디 꾸겨진 넝마가 되어 버렸다.
이 거룩한 낱말에 아무 신선미도 없고 아무 감동도 없고 아무 경의도 없다.
선거가 끝나면 휴지통에 들어가 버리는 한 조각 투표지의 대명사일 뿐이다.
선거 바람만 지나가고 나면 국민은 바람 없는 날의 깃발이다.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다가 책임 질 일이 있으면 국민을 끌어대어 국민에게 다 덮어씌운다.
지금 야당은 그 극치다.
국민은 정부나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오용되고 악용되고
남용되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의 이름을 도둑맞아서는 안 된다.
국민이 바짝 정신 차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아첨배들에게 속고 배반당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국민이다. 우리 국민들은 지금 각자 스스로가 국민이라는
자각의 옷깃을 경건히 여미지 않으면 안 된다.
2. 국민은 무책임하다
책임 없는 권리는 없다. 국민이 주권자라면 그 권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국민은 책임을 져 본 적이 없다.
국민이 선거를 잘못해 대통령을 잘못 뽑았으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뽑힌 사람이 책임 질 일이 아니라 뽑은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전혀 자책감이 없다. 잘못 뽑힌 대통령만
사표를 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잘못 뽑은 국민도 사표를 내야 한다.
국민의 자격이 없는 것이다. 국민은 무책임하므로 투표도 무책임하게 한다.
모든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것이 억울할 것 없다.
무책임하게 투표를 하니 그런 책임을 덮어쓰는 것이다.
총선거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의 고집불통이 여당의 패인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바로 그 고집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대통령이 된 사람이다.
그에 대한 예비지식이 거의 없던 국민은 그 고집 하나를 믿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 고집이 잘못이라면 그를 잘못 뽑은 국민의 책임이다.
그런데도 국민은 고집불통이라고 매도만 한다.
국민들은 선거 때면 대개 말초적인 감정이 앞서서 이성을 잃기 쉽다.
나라의 명운보다는 우선 가려운 데나 긁어 시원한 재미로 표를 찍는다.
어디다 무슨 표를 던져도 국민이 이겼다고 하고 옳았다고 하니
국민들은 안심하고 골대도 보지 않고 기분대로 표를 던진다.
국민들이 너무 정신 없이, 조심 없이, 의식 없이 투표를 하고 있다.
정부의 지지여부나 정당의 선택이나 후보자의 선호는 당연히 국민의 자유다.
그렇다고 해서 국민 개인의 악취미나 무분별이 다 용인되는 것은 아니다.
투표장에서의 유권자는 공인이다. 국민들은 무슨 짓을 해도 나라의 주인이 되는 줄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국민들이 얼마만큼 나라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가지고
투표장에 가는지 출구 조사를 해 보고 싶다.
지난 총선을 두고 여당 측에서는 야당의 정권 심판에 맞서
이•조 심판을 앞세운 것이 또 하나의 패인이라고 자책한다. 아니다.
그 미지근한 심판이 패인이 아니라 오히려 더 철저히 심판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다.
온갖 죄의 혐의를 누더기처럼 더덕더덕 걸친 야당 당수,
한둘도 아닌 여러 측근이 주줄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묵언의 증언을 했는데도
자기를 구속하려는 검찰을 성토해서 선거에서 대승을 한 야당 당수.
대학의 법학 교수이면서 불법으로 대학의 학사를 어지럽혀 놓고
법무부장관까지 되고도 법을 조소하다가 유죄 판결을 받고도
국민 뒤에 숨어 일약 제3당을 탄생시킨 신당 당수.
이런 사람들과 그 정당에 설사 만난 듯 쏟아진 표가 정상인가. 양식의 토사곽란이다.
정의감의 곤두박질이요 법정신의 물구나무서기다. 선거는 희롱당하고 민주주의는 창피하다.
게다가 야당 당수의 경우, 독재 타도를 외치면서도 자기는 개인의 보신과 영달을 위해
주위의 비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선거 과정에서 당내 독재를 감행하고,
거대 야당을 만들어 주었더니 여당이 반대하는 법만 골라 통과시키는
폭주 입법의 의회 독재는 독재 아닌가. 몸에 젖은 그 독재성이 어느 자리에 갖다
놓은들 멀리 가겠는가.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시 거대 야당의 당수로 만들어 주는 국민은 독재주의자가 아닌가.
신당 당수의 경우, 죄는 같은 죄라도 범인의 신분이나 지위에 따라 죄질이 달라진다.
대학 입학 서류 위조 같은 것은 대학 교수가, 더구나 둘 다 대학 교수인 부부가
저지를 수 있는 죄가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도 부끄러움이나 반성은커녕
독기 어린 주먹을 불끈 쥐고 검찰에 대한 복수심으로 검찰 타도를 부르짖는
것만으로 당당히 신당 당수가 되었으니, 도둑이 달아나면서 좇아오는 경찰을 향해
“도둑이야” 하고 소리치는데 강도 바라바의 석방을 외치고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게 한
유다인 군중들처럼 많은 국민들이 아우성으로 감싸서 개선장군이 된 것이다.
그 국민들은 이들을 의인처럼 대접하고 있다. 술 취한 것 같은 다수 국민의
의식이 면허 정지 수준이다.
이들 뿐인가. 선거에서 감옥에 가야할 사람들을 주줄이 국회로 피난시켜
국회는 범법자들의 소굴이 되어간다. 국민이 사면권자인가. 선거가 면죄부인가.
이것은 국민의 도덕불감증이 아니라 부도덕공감증이다.
정의가 실종된 것이 아니라 아예 불의에 가담한 것이다.
새 장관이 임명되면 청문회에서 후보자의 도덕성부터 샅샅이 검증해
걸핏하면 낙방시키는 것이 국회의원이다.
그 국회의원을 뽑자면 국민들은 당연히 후보자의 도덕성부터 철저히 검증했어야 한다.
저마다 “법과 원칙이 성공하는 나라”를 외치면서 이렇게 무법자들과 반칙자들이
대승하고 대성하는 나라의 국민이 바로 국민 여러분이다.
한 국가는 그 국민에 상응하는 정부를 갖는다고 한다.
국민의 수준이 곧 정부의 수준이요 정치의 수준이다.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정치
수준을 한탄한 지 오래지만 국민들이 그런 무분별한 투표를 하는 한 정치는
그런 뻔뻔한 수준을 절대로 넘지 못한다.
지금의 이 난국은 분별 잃은 표들의 작란(作亂)이다. 표가 무분별하니
그 표를 모운 야당은 마음 놓고 무분별한 짓을 예사로 한다.
책임 질 줄 모르는 국민이 책임을 져야 할 때다.
국민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니 국민이 수습해야 한다.
3. 르상티망의 선거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시대정신은 르상티망(Ressentiment)이다.
약점이 있는 사람이 강자에 갖는 원한과 복수심을 르상티망이라고 한다.
약자의 강자에 대한 증오심이기도 하고 못 가진 자의 가진 자에 대한
시기심일 때도 있다. 이 르상티망이 온 나라에 팽배해 있다.
지난 총선은 전형적인 르상티망의 선거였다. 선거의 야당 측 주역들은
자신들의 범죄 혐의를 덮기 위해 복수 일념으로 검찰 독재 타도를 외쳤고,
많은 국민들은 이에 대한 동정심에서뿐 아니라 명품백 갈은 것이
자신들의 르상티망에 불을 질렀다. 야당은 이 악감정을 교묘히 이용하고
선동했고 그것이 성공했다.
일반 국민들은 언제 죄를 지을지 모를 잠재적인 죄의식 때문에
평소에 검찰에 대한 르상티망이 있다. 이 르상티망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된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때부터다. 재직 때의 부정 혐의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검찰에 당한 수모감 때문에 자결했고 문재인 정권은 집권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검찰을 무력화 시키려 했다. 그러다 그 검찰 총수가 대통령이 되니 야당의 르상티망은
극에 달했고 게다가 무더기로 드러난 자기네의 범죄 혐의까지 겹쳐 이 죄를 도호하기 위해
국민들의 르상티망에 불을 지르자 많은 국민들이 총선에서 이에 동조했다.
선거에서는 죄 지은 사람마다 검찰을 되려 범인 취급해서 죄 지은 사람일수록
대부분 당선되었다, 이것이 총선의 진상이요 이들에게 승리를 안긴 많은 국민들의 역할이다.
르상티망은 자신의 주체 의식이 결핍될 때 생기는 병이다.
개인적인 주체 의식의 박약은 민주 국민으로서의 주체 의식의 허약으로 이어진다.
민주 국민의 주체 의식이란 나라의 주인 의식이다. 우리 국민들은 지금
스스로 나라의 주인임을 자각하고 있는가. 독재 하에서 길들여진 종 의식을
못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많은 국민들의 무책임한 투표와 맹목적인 팬덤은
주인 의식이 결핍된 종복근성의 잔재일 수 있다.
극단적인 증오는 극단적인 편애를 낳는다. 르상티망의 반작용이 극성 지지자들이
이끄는 팬덤이다. 팬덤이 지금 이 나라를 휩쓸고 있는 광풍의 핵이다.
총선이 이 팬덤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이 팬덤 정치가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야당은 정당 전체가 특정인의 팬덤 덩어리가 되었다.
정치는 전염한다. 악습의 정치 행태는 사회 전반에 악역처럼 전염한다.
뺑소니 음주 운전의 인기 가수가 구속되니 극성 팬들은 법원에 몰려가 석방하라고
데모를 한다. 애석은 할망정 한 가수의 애호가들이 정치판의 악태를 흉내내는 것은
역으로 정치판의 악태를 더 고무시키고 조장시킨다.
우리나라에는 전 국민의 거국적 존경을 받는 역대 대통령이 한 사람도 없다.
이것은 역팬덤이다.
우리나라는 그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새 나라를 세운 건국 대통령도 오늘의 나라로
일으킨 흥국 대통령도 동상 하나 안주할 땅 한 뼘이 없는 좁디좁은 나라다.
심지어 한 대통령은 유택 자리가 없어 유골이 자택에 유폐된 채다.
나라가 10대 강국이 된 것을 많은 국민들은 그것이 국민 자신의 공이라고만 한다.
언제는 국민이 없어서 나라가 그렇게 초췌했던가. 그런 기적은 우리나라밖에 없고
그런 협량의 국민도 우리나라밖에 없다. 국민은 다중이다.
다중의 마음은 한 사람의 가슴 속보다 좁다. 거기 휩쓸리면 안 된다.
팬덤이다가 역팬덤이다가 하는 조울증 같은 국민감정은 과열을 식히고 냉정해져야 한다.
4. 드라마를 좋아하는 국민
재주 있고 신명 있는 우리 국민은 드라마틱하다.
드라마를 참 좋아한다. 우리나라만큼 TV에 드라마 프로가 많고
드라마의 시청률이 높고 탈렌트들이 드라마 연기를 잘하는 나라가 드물다.
드라마는 갈등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갈등의 역사다.
사색당쟁부터 남북 분단, 동서 분열, 좌우 대결에 이르기까지 갈등의 연속이다.
지난 총선거 또한 한 편의 드라마다. 국민이 주역인 선거는 국민이 드라마를
만들 절호의 찬스다. 상식적이고 양식적이고 이성적인 선거는 드라마가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국민은 성공했다. 촛불집회라는 것도 어린이까지 데리고 나와
구경하면서 참여한 드라마였다.
대한민국은 체감상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국민은 배부르다. 빵은 있으니 서커스가 필요하다. 국민들은 심심하고 싶지 않다.
손에 땀을 쥘 역전극이 보고 싶다. 그러나 조심하라.
그러다가 정권만 역전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뒤집혀질 수도 있다.
국민 노릇 하기는 참으로 힘드는 일이다.
박정희 정권 시대에 비상조치의 연발 등으로 국민이 시달리자 한 방송의 앵커가
“국민 노릇 해먹기도 힘듭니다”라고 볼멘소리의 멘트를 했다.
민주화가 되니 국민들은 고된 국민 노릇에서 해방된 줄로 착각하지만 오히려 더 힘든다.
민주화란 문자 그대로 국민이 주인이 되는 것이다.
종 노릇 보다는 주인 노릇 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 많은 국민의 정치의식은 꼭 명품백 수준이다. 명품백처럼 고급인 것 같지만
명품백처럼 허세다. 고학력으로 고고한 줄 알았던 국민의식이 허세라는 것이 드러났다.
국민은 국민다워야 한다.
민주 국민이라고 해서 국민이 자만해서는 안 된다.
국민은 버릇이 없기 쉽다. 그저 애지중지하며 아무도 매를 들지 않는 아이처럼
방자해서는 안 된다.
점점 현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영악해져 가는 국민들.
국민이 자꾸 악취미의 선거를 하면 정치는 점점 그 악취미에 영합하게 되고
결국 나라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민은 사도의 정치에 덩달아 광분할 것이 아니라 정도의 정치에 촛불을 들어야 한다.
국민은 아무런 나라의 국민일 것이 아니라 품격 있는 나라의 국민이어야 하고
그러자면 국민 스스로가 품격이 있어야 한다.
10대 강국이라면 그 국격에 맞는 긍지 있는 국민이어야 하고
자존심 있는 국민이라야 한다.
국민은 선동의 선풍기 바람에 바람개비처럼 헛돌 것이 아니라
국기처럼 의연히 펄럭이고 있어야 한다.
국민이 정상이지 않으면 나라의 어느 구석도 정상일 수가 없다.
국민이 양식을 잃으면 민주주의는 의식을 잃는다.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부끄러운 시절이 있었다. 세계 10대 강국이 되었다고
이제는 자랑스러운가. 키케로가 “나는 로마의 시민이다”라고 자랑스럽게 외쳤듯이
지금 이런 선거 결과의 나라 꼴을 놓고도 “나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하고
당당히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손 들어 보아라.
5. 촛불 위에 횃불 있다
한 특정인의 대통령 만들기가 온 나라를 흔들어 놓고 있는 지진의 진원이다.
야당은 당의 존재 이유가 이 목적밖에 없다는 듯이 모든 동력을 이에
집중시켜 전력투구하면서 거침없는 횡포를 서슴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취임 초부터 흔들어대기 시작하더니 임기가 2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탄핵”이다. 불순하고 불손하기 짝이 없는 탄핵이란
말을 함부로 주문처럼 되뇌이며 국민들을 세뇌시키려 한다.
맡겨 놓은 자리이기라도 한 듯이 그 자리는 우리 자리니 어서 비키라는 것이다.
장애물이 생기면 무차별로 특검과 탄핵을 폭력배의 단도처럼 끄집어내어 들이댄다.
촛불로 재미를 본 야당의 탄핵중독증이다.
탄핵 사유라는 것이 귀머거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암호 같은 소리의 “무능”이다.
이런 애매한 잣대의 탄핵이라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대통령은 아무도 없다.
기가 막히는 것은 이 탄핵의 동기다. 나라를 위한 장엄한 포부에서가 아니라
법망에 갇힌 한 특정인의 구출 작전이라는 것이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자신들도 부인하지 않는 이 동기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것이다.
지금 야당은 나라를 극도로 혼란시키는 것이 지상의 당략이다.
그래야 나라야 어찌 되든 죄어드는 법망에서의 당수의 탈출구가 생긴다.
나라가 안정되면 찬스가 없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선거 때 현 정권을 향해 “이런 무능한 정부는 처음 본다”고
하늘을 보고 침 뱉듯이 말했지만 건국 이래 이런 후안무치한 야당은 처음 본다.
윤석열 대통령은 야당이 주장하듯 무능하기만 한 것도 아니고 실정만 있는 것도 아니다.
윤 정권이 내세울 치적이라면 단연 대일 외교의 정상화일 것이다.
과거에 대한 실익 없는 명분보다는 장래의 안보를 우선한 통큰 양보의 결과다.
이념의 화살표가 거꾸로 되어 진보라는 야당은 뒤돌아만 보는데 오히려
보수라는 여당이 앞만 바라본 것이다. 이른바 불통의 고집과 뚝심 아니고는,
오히려 아마추어의 저돌성 아니고는 이룰 수 없는 과감한 외교의 성과였다.
외교사에 남을 만한 용단인데도 국민들은 말할 것 없고 여당 자체조차 무덤덤했다.
의대생 증원의 의료 개혁은 현 야당의 전 정권이 시도하다 손들어 버린 난제다.
윤 대통령은 무모하리만큼 용감하게 이에 도전했고 그의 고집이 끝까지 밀어붙이고 있다.
당사자들을 제외하고는 오래간만에 전 국민이 공감하고 있으면서도 원군이 없이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 나서서 응원해 주는 국민도 없다. 야당은 반대할 명분이 없어
침묵하면서도 속으로는 성공할까봐 전전긍긍일 것이다.
고집의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사태에 이르는 데 원인 제공을 한 것은 멍청한 여당이다. 정권이 넘어갈 것을
뻔히 알면서 당시 여당이면서 정당성이 의문스러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에
가세하여 성공시킨 것은 정권을 갖다 바친 것이다. 선거에 져도 싸다.
그 고의적인 자책골이 후유증이 되어 지금 여당을 악몽처럼 괴롭히고 있다.
지금 여야는 우직과 고집 대 술수와 음모의 대결이다.
우직은 졸하고 술수는 능하다.
야당은 약빠르고 여당은 고지식하다.
야당은 독하고 여당은 무르다.
야당은 교활하고 여당은 멍청하다.
여당은 운동권으로 뭉친 야당의 적수가 아니다.
약체의 무기력한 여당만으로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촛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촛불 위에 횃불 있다.
6. 국민의 눈높이를 높여라
너도 나도 “국민의 눈높이”를 들먹인다.
야당은 선거가 국민의 눈높이를 무시한 대통령에 대한 심판이라고 했고,
대통령도 선거에 지니 마지못해 국민의 눈높이에 부응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그 국민의 눈높이가 적정 수준인가. 국민의 눈높이가 너무 낮다.
국민의 눈높이가 너무 높아서 못 맞추는 것이 아니라
너무 낮아서 맞추기 어려운 것이다. 눈높이를 끌어올려 놓고 그 높이에 맞추어야 한다.
그것이 지도자의 책무다. 국민의 낮은 눈높이에 무조건 따라가는 것을
천민민주주의라고 한다. 국민은 아니꼽다고 깔보듯이 눈을 아래로 깔지만 말고
지금 나라를 위해 무엇이 급선무인지 눈을 똑바로 뜬 채 직시해야 한다.
이 직시가 국민의 눈높이라야 한다. 초보운전자처럼 코앞만 보지 말고
멀리 전경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야당은 한사코 이 눈높이를 끌어내리려고
바람을 넣고 있고 여당은 덩달아 이 눈높이에 맞추겠다고 달래고 있다.
이제는 국민이 스스로 눈높이를 높여 정치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 국민의 교육열이 나라를 일으킨 원동력의 하나였다.
고학력의 우리 국민은 유식하다. 그러나 지식이 곧 양식인 것은 아니다.
옛날의 왕조시대에는 우민정치였다. 백성이 너무 똑똑하면 안 되었다.
민주 국가의 교육은 민주 시민으로서의 소양과 국민 의식을 고양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교육이 실패한 것이다. 교육 혁명이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사색당쟁의 역사는 유식한 선비의 국민층이 등장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이 복상 같은 아무 실용성 없는 명분이나 가지고 다투는 사이
나라는 왜란에도 호란에도 속수무책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 역사교과서를 제기한 것은 혁명아의 딸다웠고
관철하지 못한 것은 그 후예답지 않았다. 당시 박 대통령은 혼자 고군분투했을 뿐
야당 측의 조직적인 방해 공작에 정부도 여당도 의지가 약했고 무기력했다.
엄호해 주는 맞불 하나 없었다. 국토가 갈라진 것도 서러운데 나라의 역사가
두 쪽으로 갈라지다니, 그 때가 찬스였다.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함으로써 돌파력을 잃었다.
그 후로 민주 시민의 교육은 후퇴하고 야당 측은 무혈 반격을 하여 지금 보무도 당당한 것이다.
7. ‘새나라 운동’의 제창
한국인은 모두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
어느 자리에서나 노래 하나 제대로 못 부르는 사람은 한국인이 아니다.
한국인은 이탈리아인, 러시아인과 함께 세계 3대 가수의 국민이다.
흥과 신명이 있는 특출한 국민이다. 한류가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강의 기적”은 우리 국민의 이 흥과 신명이 동력이었다.
국민 총단결의 대합창이 이룩한 위대한 성과였다. 그 지휘자가 있었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해서 그 과정을 부인하면 안 된다. 그 과정에 부작용이 있었더라도
그 부작용을 부인하면 결과도 부인되어야 한다.
그 과정이 있었으므로 오늘의 성과가 있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독재의 오명 아래 국민을 단결시켰다.
민주의 미명 아래 국민은 어떻게 되었는가. 보라, 지금 그 극점에 와 있다.
국민들은 통일을 외치기만 했지 우리나라가 왜 분단이 되었는지,
왜 아직도 우리나라만이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지 진지하게 자성해 본 적이 있는가.
분단된 것은 외세 때문이라 치더라도 아직 통일이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외세 때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자작극이다. 지금 국론이 분열되어 나라가 위태로운 것도
우리 국민의 자작극이다. 통일을 외칠 자격이 없다.
“현명한 국민 여러분”은 더 현명해져야 한다.
“불통”이라지만 많은 국민들이야말로 불통이다. 윤 대통령보다도 불통이다.
너도 나도 협치를 부르짖지만 국민들이야말로 협치가 필요하다.
국민끼리부터 소통하고 협력해야 할 때다.
궁지에서 나라를 살린 새마을 운동은 국민의 협동과 정신개조 운동이었다.
지금 다시 전 국민의 협동과 정신개조로
‘새나라 운동’을 벌여 이 궁지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8. 침몰하는 것은 세월호만이 아니다
다른 나라들의 정치 수준이나 국민 의식도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명심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다. 유례가 없으므로 비교할 나라가 없다.
특이 상황과 특이 조건 하에서는 국민의 자각도 특이해야 한다.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북핵 문제요 이념 문제다.
나라의 존립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반북을 들먹이면 야당이나 언론은
“철 지난 색깔 논쟁”이라는 상투적인 한 마디로 입을 막아버린다.
여당조차도 국민들이 듣기 싫어하니 표 떨어진다고 쉬쉬 한다.
어찌 이것이 철 지난 일인가. 북한이 미사일을 펑펑 쏘아대는 이 마당에
지금도 한창 철이다. 갈수록 더욱 한창 철이다. 총선에서는 이념 논쟁이 오히려 더
쟁점이라야 했다. 이념 논쟁은 자나깨나 후렴처럼 되풀이되는 쟁점이라야 한다.
문재인 정권은 미•북의 핵협상 때 한국을 “중재자”로 자처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미국을 겨냥한 것이던가.
핵을 미국 땅에 떨어뜨릴 수는 있어도 그것은 자멸의 길임을 북한이 더 잘 안다.
북핵의 주적은 당연히 한국이다. 한국이 당사자 중의 당사자다.
그런데도 한국이 중립국이기나 한 것처럼 중재자라니,
더구나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당시 야당이던
지금의 여당조차 멀거니 쳐다보고만 있었으니, 이런 마비된 대북관이 나라를
무장해제시키고 있다. 그래서 반공이라면 벌떼같이 달려들면서도 친공은 싹 입 다문다.
통일이 염원이라지만 국토 통일은 국민의 대북관 통일이 먼저다.
전 국민의 일치단결은 핵보다 더 무섭다. 먼저 남한의 국민 의식이
완전한 자유민주주의로 통일 되지 않는 한 남북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대재앙이다.
야당은 전 국민의 생명이 걸린 북핵보다는 한 상병의 죽음에 집착하고,
전 국민의 안녕보다는 명품백 하나에 국운을 걸고 있다.
북핵에 대한 국민의 정신 무장을 해제시키고 있고
많은 국민들은 정신 무장이 피로하다고 동조하고 있다.
로마제국이 왜 쇠망했는지 아는가. 군대의 기강이 해이되어
갑옷이 무겁다고 벗어 던지면서 망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역이용하여 이 체제의 전복을 획책하는
음모를 국민은 눈을 부릅뜨고 경계해야 한다. 독재 아래에서는 체제의 전복이
불가능하므로 민주화 투쟁은 그 자유를 이용하여 자유주의 체제를
전복시키지 위한 고도의 술수였던가.
자유주의라 하여 자유를 억압하는 자유마저 용납하는 것은 자유주의의 자살행위다.
“민주주의는 자신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방위할 수 없다”고 했다.
자유는 자유를 모독하는 자들을 반드시 징벌한다. 자유를 오용하고 악용하는 자들은
반드시 자유에 복수 당한다. 자유의 복수법은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극성 지지자들의 팬덤이 위험하다. 정치적 팬덤은 우상화의 바로 전 단계다.
우상화의 모델은 멀리 있지 않다. 주체사상에 광희하는 북한 주민을 흉볼 것 없다.
남한 주민도 저런 체제하에서는 꼭 저렇게 될 것이다. 동족의 유전자이므로.
침몰하는 것은 세월호만이 아니다.
침몰하는 것은 다 조짐이 있다. 그 조짐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지난 총선 결과는 그 조짐이었다.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재외의 한 언론인은 총선 결과를 보고 “그토록 절규하던 민주주의가
이런 민주주의였습니까”하고 통탄했다.
참으로 얼마나 목쉬도록 외친 민주화였던가. 그러나 지금 그 민주주의가 정
착되었다고 장담할 수 있는가. 국민이 민주주의를 수호할 책임 있는
민주 시민이 되지 않는 한 아직 이 땅에 민주주의는 없다.
지금 이 대혼란의 국난이 “국민의 승리”인가. 국민의 승리가 아니라 국민의 패배다.
나라가 망해도 국민은 항상 옳은가. 망국의 국민도 국민인가.
지금 우리 국민은 언제 폭발할지 모를 화산 위에서 일부는 춤추고 있고 일부는 잠자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시인 아리스토파네스의 ‘새’에 나오는 포세이돈의 목소리로 묻는다.
“아, 민주주의여, 도대체 우리를 어디로 몰고 가려는가?”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1957년 졸업/한국일보 고문, 주필, 편집국장, 駐佛특파원 역임/近著: "수평선 너머에서",
"인생을 묻는다", "명문장의 조건", "돌아가는 배" (최근 이를 바탕으로 映像자서전《김성우 Biovideo
‘돌아가는 배'》제작/시인협회가 공인한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시인/욕지도 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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