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삼의원(三醫院)으로 1392년(태조 1)에 고려의 상약국(尙藥局)을 계승한 내약방(內藥房) 또는 약방(藥房)을 세종(世宗 25년) 1443년에 이조(吏曹)의 건의로 정식으로 설치한 내의원(內醫院)에서 주로 국왕을 비롯한 왕족의 치료와 어약의 조제가 주 임무였지만, 궁중은 물론 종친 및 2품 이상 고관도 치료하였다.
한편 전의원(典醫院)에서는 양반(兩班)을 치료하고, 혜민서(惠民署)는 평민(平民)을 치료하였는데, 이를 삼의사(三醫司) 또는 삼의원(三醫院)이라 하였으며, 약재(藥材)를 맡아 보던 곳을 제생원(濟生院)이라 하였다.
이 삼의사(三醫司) 및 제생원(濟生院)에는 전의감(典醫監) 이하 많은 의술을 가진 관리 및 노비들이 있었는데, mbc 드라마 ‘대장금’을 통해 알려져 있던 의녀(醫女)가 있다.
이 의녀(醫女)는 조선조 때 각 도(道)에서 뽑아 간단한 의술을 가르쳐 내의원(內醫院)ㆍ혜민서(惠民署)에서 심부름을 하는 역할을 하게 하던 여자이다.
이 의녀(醫女)가 요리를 했는지의 여부(與否)는 전혀 기록에 나와 있지 않지만, 예조(禮曹)에서 의서 습독관(醫書習讀官)의 의녀(醫女)의 권징 조건(勸懲條件) 즉 처벌 조건이 있는데, “의녀(醫女)는 혜민국 제조(惠民局 提調)가 매월 독서한 것과 일찍이 독서한 바를 강(講)하여 통(通)하고 불통(不通)한 것을 치부하고, 매월 획수가 많은 자 3인을 일일이 베껴 써서 계문(啓聞)하여 월료(月料)로 주되, 그 중에 3번 불통한 자는 혜민국 다모(惠民局茶母)로 정하였다가 3략(略) 이상을 채우면 본임(本任)에 환허하소서.”-⌜세조실록(世祖實錄)⌟세조9년(1463)5월22일 - , -⌜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2년(1471)5월25일-
이 말은 의녀(醫女)가 매월 의서(醫書)를 외우게 하여 질문하여 세 번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혜민국(惠民局)의 다모(茶母)로 강등시켜 관노(官奴)처럼 부리다 이를 세 번 이상 채우면 다시 의녀(醫女)로 복권 시킨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다모(茶母)로 강등되어 관노(官奴)로 부엌일 등을 할 때 요리를 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건 잠시일 뿐 의서(醫書) 문답(問答) 3략(略) 이상을 채우면 다시 의녀(醫女)로 되 돌아 갈 수 있으니 체벌로 강등된 신분은 오래 머물지 않아 숙수(熟手)의 경지까지 도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연산군(燕山君) 대에 의녀를 화장시켜 연회(宴會)에 참여시켰는데 이러한 관행이 계속되어 궁중의 크고 작은 잔치가 있을 때는 기생(妓生)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의기(醫妓)ㆍ약방기(藥房妓)라고도 한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 대관재(大觀齋)심의(沈義 1475~?)가 지은『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제1권 오언장편(五言長篇)에 ‘채 판서 소권 의 모친에 대한 만가〔蔡判書 紹權 母夫人挽〕라는 시 일부를 소개하면
“ 錦筵映金紫(금연영금자)성대한 잔치에 고관의 그림자 어리비치고
雙鶴舞中庭(쌍학무중정)한 쌍의 학이 뜰 안에서 춤추는가 하면
絃管間醫妓(현관간의기)피리와 거문고 사이엔 의기가 있었으며
開尊飮投轄(개존음투할)동이째 술을 마시며 투할을 하였나니
樂事誰得似(낙사수득사)이런 낙을 그 누가 방불하게 누렸으랴.”
여기서 채판서(蔡判書)는 조선전기 한성부좌윤, 형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졸재(拙齋) 채소권(蔡紹權 1480~1548)을 말한다. 그의 모친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인데, 시 전문에 영화롭게 살던 시절을 담은 것인데, 이 시에 두 의기(醫妓)가 춤을 추던 모습을 학으로 빗대었다.
선조 때 문신 청강(淸江) 이제신(李濟臣 1536~1583)이 쓴『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는“길가에서 의기(醫妓)의 무리를 만났는데. 그들은 길을 가로막고 다투어 손가락질하고 박수를 치면서 조롱해 마지않았다. 김행은 비록 구변이 있다고 자칭하여 겉으로 말하기는 비록 쾌하게 하였으나 내심에는 실상 부끄럽고 서먹서먹하였다. 돌아와서 나에게 말하기를,“이미 여러 창녀들의 모욕을 당하였는데, 타고 있는 말 또한 둔하여 도리어 길가는 군중들의 구경거리가 되었으므로 자못 견디지 못하였다.”한다.
이 당시 의기(醫妓)의 신분이 비천(卑賤) 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라 할 것이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