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군 추방 취소라는 성과를 올려 한인사회가 안도와 축하의 분위기에 휩싸이고 뉴욕 한국일보 식구들은 한인들 행사나 모임 등에서 “대단하면서 의미깊은 일을 해냈다. 역시 한국일보”라는 칭찬을 받고 우쭐해 있을 때였다.
한인 밀집 지역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조그만 잡화상을 한다는 부부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자신의 외아들이 이민국으로부터 추방 대상자로 체포돼 곧 한국으로 쫒겨나게 됐다며 A군 때처럼 도와달라고 울 듯한 목소리로 알려왔다.
추방 대상자는 당시 20대 후반 남성 B씨로 뉴욕 맨하탄 월가에서도 알아주는 금융회사의 엘리트 사원으로 근무중이었다.
부모와 B씨가 미국으로 이민올 당시 B씨는 22세로 가족 동반 비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민법을 잘 몰랐던 B씨 부모는 몇 년 뒤 자기네가 미국 영주권을 받자 B씨도 동시에 영주권자가 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법적으로는, 영주권을 먼저 받은 부모가 합법 체류 자격을 갖지 못한 B씨를 자녀 초청 케이스로 미국으로 초청하는 형식을 취한 뒤 B씨가 영주권 신청 및 영주권 취득 절차를 거쳐야지만 합법적인 체류 신분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이같은 복잡한 법적 절차를 몰랐던 B씨와 부모는 B씨가 불체자인 사실도 모르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B씨의 불체자 신분은 드러나지 않고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9.11 이후 모든 이민자들의 기록을 전산화하는 바람에 B씨의 불법체류 사실이 드러난 것이었다.
미 이민국 수사관들은 B씨가 평소처럼 평온하게 근무하고 있던 금융사 사무실을 급습, B씨를 바로 체포했다. 갑작스런 조치에 항의하던 B씨에게 이민국 수사관은 불체자이므로 체포, 곧 추방할 것이라는 사실을 통보했다.
B씨와 부모에게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같은 소식이었다. B씨와 부모들도 B씨가 체포된 뒤에야 비로소 이민 절차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게 됐다. 그러나 이같은 점은 B씨 추방 절차에서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뉴욕 월가의 유수 금융기관에 다니고 있고 게댜가 회사가 엘리트로 인정하는 B씨의 경력 등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B씨는 체포되자 마자 바로 이민국 격리 시설로 이송됐다.
초조하고 불안만 할 뿐 어떤 식으로 이 문제를 풀어갈까 고민하던 B씨 부모는 A군 케이스를 떠올리고 뉴욕 한국일보에 도움을 요청해온 것이었다.
뉴욕 한국일보는 또다시 A군 케이스때처럼 한인들을 대상으로 한 추방 반대 서명 날인 작업에 돌입했다.
B씨는 B씨 부모에게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외아들에다 학교에 다닐 때 늘 전교 수석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인성도 바르고 착한 모범생이었다.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 모든 이들이 선망하는 금융회사에 취업함에 따라 이제는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고 부부는 생각했다.
조그만 잡화상을 운영하며 힘겨운 이민 생활을 해왔지만 B씨 부모는 B씨를 바라보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든 간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소망은 외아들이 좋은 짝을 만나 결혼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를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만 하면 부부는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미국에 정말 잘왔다”고 미소짓곤 했다.
이처럼 자신들의 전부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던 아들이 한국으로 강제 추방된다는 사실에 부부는 온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같았다.
사실 추방 위기에 놓인 B씨는 한국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는 나의 아들과 오버랩되어 친 혈육의 아픔처럼 나에게 닥아왔다.
나와 집사람은 9.11이 나기 한 해전 뉴욕에 왔다. 단 하나뿐이던 외아들은 당시 의대에 다니며 한국에서 혼자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국 의대생 경우 미국 의대로 전학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미국 의대로 진학하려면 미국 의대 입시를 통과해야 하며 그럴 경우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므로 시간상 손실이 클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 두고 온 아들은 특히 집사람에게는 늘 아픈 손가락이었다.
당시 우리 부부는 미국 영주권을 신청 중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한국을 방문할 수 조차 없었다.
나갈 수 있는데도 안 나가는 것과 나갈 수 없기에 한국을 방문할 수 없는 것은 심리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특히 집사람은 매일 아들 걱정에 수시로 국제전화를 하고 아들 목소리가 조금만 이상하면 무슨 일이 있지나 않은지 내게 걱정하는 말을 수시로 하곤 했다.
B씨는 당시 우리 아들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그가 처한 처지는 한국에 홀로 남아 생활하는 우리 아들을 머릿속으로 소환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B씨의 추방 결정은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처럼 더욱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
뉴욕 한국일보는 한국을 떠나온 지 꽤 오래된 B씨가 한국으로 돌아갈 경우 그의 인생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등을 포함, 추방으로 인한 부작용 등을 구체적 예로 들어가며 구제 서명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이민국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B씨의 부모가 울먹이면서 전화해왔다. B씨가 그날 아침 한국 국적기에 실려 한국으로 추방된다는 사실을 이민국으로부터 통보받았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가슴이 철렁한 것은 물론이고 남의 일 같지 않아 가슴이 저리도록 아파왔다.
너무나 예상외의 빠른 추방 결정에 뉴욕 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서 이 사안을 진두 지휘해왔던 나 역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다 이 문제를 전담 취재해온 신용일 기자를 불렀다.
“지금 바로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나가서 B씨와 이민국 직원들을 만나 취재하라. 물론 이민국 직원들이 취재를 허락할지 여부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B씨를 접촉, 현재의 심경이 어떤지 앞으로 한국 생활은 어떻게 할 것인지 등을 물어라. 이민국 직원에게도 항의성 질문을 해라. B씨가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단지 이민법을 제대로 몰라 합법 신분을 취득하지 못한 것이 과연 이처럼 빨리 추방당할 죄냐. 자국민은 물론이고 전 세계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한다는 미국 정부가 내린 이같은 조치가 과연 합당하다고 생각하느냐 등 하여튼 어떤 말이든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신 기자는 곧 카메라를 챙기는 등 취재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나는 신 기자가 공항에 취재나가고 나면 서울 한국일보 편집국에 전화할 작정이었다.
이같은 사정을 알리고 공항에 서울 한국일보 기자를 내보내 추방당한 B씨를 만나 취재하는 등 향후 B씨의 험난한 서울 생활을 밀착 취재, 이를 여론화시키자고 제시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 기자의 셀폰으로 전화가 와 이를 받았다. “예, 그래요? 알겠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등 몇 마디 대답을 하던 신 기자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전화를 끊고 난 신 기자가 내 자리로 닥아왔다.
“국장님, B씨 아버진데요 자기네도 아들을 보기 위해 공항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추방 결정을 백지화했다고 이민국에서 알려왔답니다. 언어 문제도 있고 해서 전화 내용을 혹 잘못 알아듣지 않았는지 불안하고 믿을 수가 없었으나 아들이 전화를 바꾸어 이를 확인해 주었답니다”
나는 물론이고 신 기자, 뉴욕 한국일보 편집국 기자 등 모두가 환호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이후 B씨는 당초 직장에 근무하며 엘리트 사원으로서 모범적인 회사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렇게 완고하던 이민국이 왜 이같은 결정을 내렸는지는 얼마 뒤 밝혀졌다.
한국 및 미주 한인들에게 호의적인 민주당 소속 조셉 크라울리 연방 하원의원이 B씨의 추방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뉴욕 한국일보에 연일 보도되는 B씨 추방 반대 캠페인 기사를 보고 크라울리 의원의 보좌진 중 한 명이 이를 크라울리에게 보고한 것이 이같은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크라울리 의원은 미국 이민국에 “나의 지역구에 살고 있는 아주 성실하고 유능한 한국계 젊은이가 이민법을 제대로 모른 부모의 실수로 불체자로 몰려 추방 대상자가 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민국이 최대한의 관용과 법적 권한을 발휘, 그가 미국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며 보다 큰 꿈을 이루고 미국에 기여하게 해줄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제출했다고 한다.
크라울리 하원의원의 간곡하면서도 강력한 요청에 이민국이 결국 B씨의 추방을 번복한 것이었다. 정말 너무도 고마운 미국 정치인이었다.
이 일이 있고 아마도 몇 년 뒤였던 것같다. 퇴근 길에 노던 블러바드 120가 근처에서 소박한 셔츠 차림으로 길을 건너던 크라울리 의원을 발견했다.
나는 차를 세울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해 길가에 더불 파킹을 하고 도로를 급하게 건너며 “미스터 조셉 크라울리”를 몇차례 불렀다.
왠 동양인이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무슨 일인지 궁금했던 크라울리가 길가에 섰다. 그에게 달려가 “뉴욕 한국일보 편집국장”이라고 소개하고 “B씨에게 도움을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기 위해 당신을 불렀다“고 급히 말했다.
크라울리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 생각난다. 그는 내 지역구 주민이다. 지역 주민의 어려움을 돕는 것은 당연히 내가 해야할 일이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저기 세워둔 게 당신 차 아니냐. 빨리 가봐야 할 것같은데......”라며 웃으며 반대편 차선을 가리켰다.
건너편을 보니 경찰 순찰차가 불법 주차를 단속하기 위해 막 내 차뒤로 닥아오고 있었다. 크라울리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도로를 쏜살같이 건넜다.
경찰 순찰차는 내 차 바로 뒤에까지 닥아왔으나 멈칫하다 내 옆을 지나 가버렸다. 물론 티켓도 끊지 않았다. 보통 때 같았으면 경찰 순찰차는 사이렌을 울리고 경고등을 켜고 내 차를 세운 뒤 티켓을 끊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분석해 본 즉. 백인치고도 키와 덩치가 크고 머리가 벗어진 독특한 용모의 크라울리 의원을 경찰들이 알아 보았고 내가 크라울리 의원과 잠깐 대화를 나눈 장면을 목격했기에 그냥 넘어갔으리라는 게 나의 추측이다.
조셉 크라울리와는 이후 만나는 등 인연이 없었다.
정말 아쉬운 것은 지난 2018년 미국 7개주에서 실시된 11월 중간선거 후보자 예비선거에서 민주당 유력 후보 크라울리가 28세의 좌파 여성 신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후보에게 패했다는 사실이다.
크로울리 의원은 10선으로 민주코커스 의장이며 11월 중간선거 후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의 후임으로 유력했던 인사여서 그의 패배는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나는 크라울리가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 후임 후보로 더욱 큰 정치인으로 나아가지 못한 점도 정말 아쉽지만 B씨라는 한 한국인 청년의 미래를 살려준 고마운 미국 정치인이 패배를 당한 사실이 마음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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