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연말께 평소 자주가던 뉴욕 플러싱의 한 한인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에 퇴근했던 이 식당 남자 종업원이 얼굴이 하얗게 돼 뛰어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어두운 곳에서 강도에게 폭행을 당하고 갖고 있던 적잖은 주급을 모두 강탈당했다는 것이었다.
중국 흑룡강성 출신으로 조선족인 그는 비록 식당에서 잡일을 하고 있었지만 평소 중국 공산단원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곤 했다.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에 처음에는 알러지 반응이 일었다. 그러나 그가 이를 이념적으로 과시하기보다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드물게 중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있음을 자랑하기 위해서란 사실을 알고 애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식당을 자주 드나들다 보니 어느 정도 친해져 그와 종종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는 중국인들은 미국에 들어오기가 너무 힘이 들므로 브로커에게 2만 달러를 주고 관광비자를 받아 미국에 돈벌러 왔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관광 비자 기간을 훨씬 지나 체류 허용 시기를 넘긴 것도 아예 처음부터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브로커비 2만 달러를 제외하고 10만달러를 모으면 중국의 가족에게 돌아갈 작정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의 숙소는 일하고 있던 한인 식당과 꽤 멀었으나 돈을 아끼기 위해 걸어서 출퇴근을 했다. 먹는 것은 일하는 식당에서 해결하고 몇 사람이 한 방을 쓰면서 집값도 최대한 아꼈다. 이렇게 눈 딱감고 몇 년 일하면 목표 액수를 달성할 수 있고 그러면 귀국해 가족과 풍족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이날도 주급을 받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다 그의 표현대로 ‘횡액’을 당한 것이었다.
집중 구타를 당해 옷도 찢어지고 몸에 상처도 나있어 식당 주인은 우선 간단한 치료부터 하자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먼저 빼앗긴 돈을 찾아야 한다며 도와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경찰에 신고할 경우, 자신의 체류 신분이 드러나게 되므로 식당 주인 및 내가 자신과 함께 차를 타고 주위를 돌아다니다 보면 범인들을 발견, 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이미 시간이 꽤나 흘러 범인들은 벌써 멀리 도주했을 것이므로 실효성이 없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도 간절하게 호소해오므로 우리들은 내 차를 몰고 일대를 돌아다녀 보았다.
물론 범인들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경찰에 신고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불법 체류 신분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 주저했으나 우리로서는 이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조금 뒤 가까이에 있는 109경찰서 경찰관 2명이 순찰자를 타고 사이렌을 울리며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 피해 조사에 나서고 범인들의 인상착의 등을 자세히 묻고 기록했다.
이러는 동안에도 피해자는 언제 자신의 체류 신분이 파악될까 두려워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이 두 경찰관 중 한 명은 식당 주인과 잘 아는 사이였다. 피해 조사가 끝난 뒤 식당 주인이 그 경찰관에게 질문 겸 당부를 했다.
피해자의 체류 신분을 체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러자 두 경찰관들은 “우리는 당연히 피해자의 체류 신분을 묻지 않을 거고 관심도 없다. 지금부터 우리의 목표는 범인들을 잡는 것이다. 피해자의 상처나 잘 치료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우리의 통역을 통해 이같은 말을 전해들은 피해자는 그제서야 얼굴에 안도하는 빛이 나타났다.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 109경찰서 경찰관들은 범인들을 체포했다며 빼앗긴 돈 가운데 전액은 아니지만 일부는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해왔다.
범인들은 그 식당 근처 다른 업소에서 일하는 소수계 직원으로부터 피해자의 주급받는 날짜를 제보받은 뒤 범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강도 피해가 일어났을 당시 식당 주인과 나 역시도 이를 경찰에 신고해도 괜찮을까 하는 걱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비록 경찰들은 불체자 단속을 하지 않는다는 말은 듣고 있었지만 9.11 직후 이민자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했던 시기임을 고려할 때 어쩌면 피해자의 체류 신분을 파악할지 모른다는 우려도 든 게 사실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나는 미국 경찰에 대한 이미지를 다시 갖게 됐다.
미국 경찰들은 한국 경찰들과 달리 일반적으로 상당히 고압적이다. 과속이나 기타 미미한 실수를 단속할 때도 경찰들은 대부분 오른손을 권총집 위에 얹고 질문을 하기가 예사다. 여차직하면 권총을 뽑겠다는 무언의 시위라 할 수 있다.
말투도 착 가라앉혀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기 일쑤였다.
물론 친절한 경찰관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상대방에게 한껏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태도를 보여주곤 한다.
평소 이같은 대 경찰 이미지를 갖고 있던 나로서는 109경찰서 경찰관 두 명으로 인해 편견을 상당히 불식할 수 있게 됐다.
이와 함께 나는 9.11 이후 미국내 이슈로 떠오른 불체자 처리 문제를 보고 미국 경찰과 지역 경찰을 관할하는 주지사, 시장들에 대해 경탄과 함께 호의를 갖게 됐다.
미국내에서 가장 격렬하게 대립하고 기관들을 들라면 지역 경찰과 이민세관단속국(ICE. 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일 것이다.
ICE는 미국 국토안보부 소속으로 국경, 세관, 출입국 관련 법을 집행하고 해당 사범을 수사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밀수 단속, 밀입국자, 사기결혼, 위장결혼 입국자 등을 색출하고 불법 체류자들을 강제 추방한다.
직원은 2만명 이상이며 미국과 전 세계에 400개의 지부가 있고 52개국에 요원들을 파견해놓았다.
규모로나 수사 영역으로나 미 연방정부 내에서 가장 큰 수사기관이다. 심지어 전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미 연방수사국(FBI. Federal Bureau of Investigation)보다 수사하는 영역이 넓다.
이처럼 방대한 조직과 막강한 권한을 가진 ICE지만 지역 경찰은 나름대로 소신을 가지고 ICE에 맞서고 있다.
ICE는 불체자 색출 및 단속에 지역 경찰이 협조해줄 것을 언제나 강하게 요구한다. 경찰이 가진 수사력과 정보를 협조받아 불체자 색출 및 검거에 나설 때는 훨씬 큰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지사, 시장, 지역 경찰들은 한 두 주나 시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ICE의 불체자 단속 요청을 단숨에 거부한다.
이들은 불체자도 자신들이 보호해주어야 할 지역 주민이기에 ICE의 요청에 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주나 시, 지역 경찰은 외국 이민자들이 범죄 피해를 당했을 경우 체류 신분을 파악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민자들에 대한 체류 신분 파악이 행해질 경우 불체자들은 범죄 피해를 신고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결국 범죄가 더욱 확산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9.11 이후 불체자 문제를 둘러싸고 ICE와 주지사, 시장, 관할 경찰국 간의 갈등은 종종 보도되곤 했으나 그렇게 심각하게 부각되진 않았다.
그러다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부터 ICE와 주지사, 시장, 경찰 당국과의 마찰은 한층 심해졌다.
2019년 7월 중순 트럼프 대통령은 대대적인 불체자 색출 작전을 벌일 것이라고 밝혔고 ICE는 2,100명을 추방하겠다고 큰 소리쳤다. 그러나 실제론 35명의 불체자를 체포하는데 그쳤다. 지역 경찰의 협조없이 작전에 나섰기에 단속 효과가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보다 앞서 몇몇 도시 시장들은 이민자들을 안심시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의 버나드 잭 영 시장과 마이클 해리슨 경찰국장은 ICE의 단속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에릭 가세티 LA 시장도 마이클 무어 LA경찰국장과 함께 같은 취지의 영상을 찍어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마이클 무어 LA 경찰국장은 ICE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이민자 140명을 체포하려 한다며 단속과 관련된 정보를 발설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LA에서는 ICE와 LA 경찰이 격렬하게 대립했다.
LA 소재 ICE 집행 담당 국장 데이비드 마틴은 “경찰국장이 공개적으로 우리 작전에 대해 누설하고 작전과 관련된 숫자를 흘리는 것을 묵과할 수 없다”며 LA 경찰국 무어 국장을 비난했다.
무어 국장은 가세티 LA 시장과 함께 출연한 소셜미디어 영상에서 “LA 경찰은 시민들의 편이다. 우리는 ICE 단속 작전에 절대 협조하지 않을 것이다. 법 집행 기관으로서 우리 행동은 ICE를 방해하거나 걱정거리를 끌어내려는 것이 아니다”며 “우리는 단지 공동체에 속한 주민들이 근거 없는 루머나 두려움에 떨지 않도록 우리의 책임을 인지시켜준 것뿐”이라고 반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인 2020년 4월에 행해진 불법체류 이민자 단속에서는 ICE가 지역 경찰 행세를 하면서 영장도 없이 불법적인 이민자 체포 작전을 벌여 집단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남가주 지부는 2020년 4월16일 LA 연방 법원에 ICE를 상대로 이같은 집단소송을 제기하고, ICE가 벌이고 있는 이민 단속은 연방 헌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ACLU 측은 연방 법원에 접수한 소장에서 ICE 요원들이 지역 경찰 행세를 하며 가택 현관까지 들어와 불법체류 이민자를 체포해 왔으며, 이들은 법원이 발부한 영장조차 소지하지 않은 채 단속 활동을 벌였다고 비난했다.
이제 과도한 반이민 정책을 펴온 트럼프가 물러남에 따라 불체자 색출 및 추방조치는 다소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럼프 때처럼 적대적 태도를 드러내며 거칠게 불체자를 색출하는 방식은 취하지 않을지 몰라도 조 바이든 대통령 정부 역시 불체자 문제에서 눈을 완전히 떼지는 않을 것이다.
불체자를 둘러싼 ICE와 주지사, 시장, 경찰당국의 마찰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한국적 상황과 지극히 대비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대통령, 중앙정부가 어떤 정책을 세우기만 하면 그 정책의 옳고 그름, 현실적 문제점, 현장과의 괴리 등과는 관계없이 지방 정부, 사법기관이 그대로 맹종하는 게 현실이다.
만약 지방 정부, 사법기관이 다른 주장을 낼라치면 대통령과 중앙정부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핍박하고 무산시키는 게 다반사다.
이 글은 미국의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인 불체자 문제를 두고 ‘트럼프 전 대통령과 ICE : 주지사, 시장, 경찰당국’과의 갈등, 어떤 의미에서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우리가 반면교사삼을 필요가 있다고 보기에 서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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