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조선 식당, 일본 엽전 받지 않아. 개인적 항일 방식인셈
김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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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15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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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당시 일본에서 1문(文)을 엽전이라 하는데, 도쿄지방에서는 10문을 엽전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군마현(群馬縣)에서는 거지엽전(乞食錢)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는 5리(里, 20km)를 조르는 어린아이도 이를 거지전이라고 싫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의 엽전은 큰것 하나에 5푼이라 하고 작은 것은 1푼에 못 미친다 했다.
1905년 대한제국에서 발행한 5전 백동화가 1909년 까지 발행되었다.
사진은 구한말 엽전운송 장면인데.
1904년 인부 품삯은 1리(4km)당 60문 즉 12전이고 말은 마부의 품삯을 합쳐 140문 즉28전이다.
1리 운반비는 말의 경우 40원5전이고 인부의 경우 39원96전, 말은 하루에 8리(32km)를 가니 13명의 호위가 필요하다.
인부는 하루에 겨우 6리 내지 7리를 가고 호위에 33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것을 차감하면 말을 사용하는 것이 편하다 했다.
경부선 철도 공사때는 대구에 엽전이 바닥나 부산, 마산에서 엽전을 매입하여 낙동강을 통해 김천, 영동, 황간 지방으로 보냈다.
특히 여행객들은 10전당 6~70돈이나 지고 다니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는 지폐와 은화를 지니고 다녀도 일본돈을 내면 조선인 밥집에서 음식을 팔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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