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의 짧았지만 감동을 받은 인연에 대해 말씀드리겠다.
1978년 12월27일자 한국일보 1면에는 4단 기사로 “김대중씨 새벽에 석방”, 서울대 병원 수용중, 구속 2년 9개월 만에“라는 기사와 7면 사회면에 ”성경과 지팡이 들고 저고리에 청색 바지, 김대중씨 석방되던 날“이란 2단 기사가 나온다.
이 기사가 나오기 전날 즉 새해를 얼마 앞둔 1978년 12월26일 밤 나는 한국일보 사회부 특근 기자였다. 특근기자란 일상적인 야근 기자 외에 중대 사건이 발생했거나 인력을 더 동원해야할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투입된 기자를 말한다.
이날 내가 특근기자로 투입된 것은 그날 밤 김대중 선생이 풀려나게 됐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김대중 선생은 1976년 3월 1일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함께 '명동 3.1 민주 구국선언' 주도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면서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이듬해인 1977년 3월 23일에는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형을 확정(긴급조치 9호 위반) 받은 후 옥고를 치렀다.
1977년 5월 7일에는 진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접견 제한에 항의하며 단식투쟁을 했으며, 같은해 10월 31일에 진주교도소 수감중 격려차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과 면담하였고, 이후 12월 22일에는 서울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어 수감 되었다.
김대중 선생이 서울대 병원에서 댁으로 이송되던 날이 바로 내가 특근을 했던 1978년 12월26일 밤과 12월27일 새벽이었다.
그러나 당시 언론을 심하게 통제, 탄압하고 있던 당국은 김대중 선생이 풀려나는 것과 관련 어떤 기사도 써서는 안된다는 강력한 지침을 내려 놓고 있었다.
나 역시 특근자로서 취재에 나서기는 했지만 기사는 써지 않고 그저 취재만 하고 오라는 지시를 받고 있었다.
밤 10시경 서울대 병원에 도착했다. 곧 당시 조간 신문인 한국일보와 조선일보는 물론 석간, 통신, 방송 기자 등 수십명의 취재진이 모여들었다.
우리 기자들은 현장에서 긴급 회의를 했다. 중앙정보부 등 관계 당국이 어느쪽으로 김대중 선생을 데리고 나올지 모르므로 그기에 대비를 하자. 즉 서울대 병원에는 출입구가 여러 군데이므로 정문 한 곳에만 모여있지 말고 각 언론사들은 흩어져서 모든 출입구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날 저녁 상황은 특종이 없다 모두가 서로 풀(정보 공유)하기로 약속했다.
나는 당국이 기자들의 눈을 피해 이상한 출입구로 김대중 선생을 빼돌리려 할지 모르지만 김 선생은 그래도 한국 민주화 투사인데다 야당 지도자므로 그런 곳으로는 나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정문으로 당당히 나올 것이라고 판단, 나는 정문을 지키겠다고 제일 먼저 제안했다. 이에따라 나는 정문에 지켜섰고 나머지 언론사 기자들은 다른 출입구로 향해갔다.
취재기자들이 많이 와서 지키므로 오늘은 김대중 선생을 내보내지 않는 것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즈음인 27일 새벽 1시 반경이 되니까 경찰 순찰차 한 대와 승용차 2대가 병월 정문앞에 도착했다. 아! 이들이 김대중 선생을 집으로 데려갈 인물들이구나 생각하고 나는 부근에 있던 한국일보 취재 취량에 갔다. 취재차량 기사에게는 일단 시동을 걸고 대기하라고 하고 차 안에서 쉬고 있던 사진 기자와 함께 서울대 병원 정문 입구로 갔다.
새벽 1시55분에 김대중 선생을 좌우로 둘러싸고 중정 소속으로 보이는 요원들이 정문을 통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김대중 선생 옆으로 다가가 “현재 소감이 어떠십니까”하고 묻은 순간 내 왼쪽 옆구리로 강한 팔꿈치 가격이 들어왔다. 순간 숨이 막히면서 주저앉았지만 바로 일어났다. 그 사이 요원들은 김대중 선생을 데리고 승용차 안으로 밀어넣고 바로 출발했다.
나도 곧 이어 우리 취재차에 타고 앞 차 뒤를 따라가자고 했다. 그리고 언론사 기자들끼리 모여 사전 회의에서 약속했던 것처럼 클랙션을 길게 몇차례 누르라고 말했다. 클랙션이 울리자 서울대 병원 곳곳에서 출입구를 지키고 있던 각 언론사 취재차량들 역시 경적을 울리며 질주해 나오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경찰 순찰차와 승용차도 이같은 현상에 놀랐는지 엄청난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하면서 바로 뒤따르던 우리 차량을 상대로 지그재그로 진로 방해를 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교동 김대중 선생 집 앞에서 급정거한 요원들은 김대중 선생을 에워싸고 집안으로 들어가면서 나무 대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당시 김대중 선생 댁은 대로에서 골목길로 조금 들어가다 오른쪽에 있던 단독 주택이었다. 잘못하면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전 속력으로 달려가 오른쪽 어깨로 강한 택클을 했다. 대학 시절 4년간 미식축구를 했고 누구보다 강력한 택클 파워를 가졌다고 자부하곤 했다. 그것을 이런 곳에서 써먹을지는 몰랐는데 대문을 닫으려던 요원 너댓명은 그대로 휘청거리며 나가 떨어졌다. 곧이어 타사 취재기자들도 우루루 몰려와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마루를 지나 그렇게 크지 않은 응접실에 들어갔더니 미국 일본 등 외신기자들이 진치고 있었다. 특히 일본 기자들은 김대중 선생에게 무어라고 질문들을 쏟아냈다.
김대중 선생은 특유의 미소를 띠며 오른손을 들어 인사하더니 바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얼마뒤 아래위로 짙은 양복에 넥타이 차림에다 머리를 단정히 빗어넘긴 모습으로 응접실로 다시 돌아와 이희호 여사와 함께 응접실 쇼파에 자리를 잡았다.
외신 기자들 특히 일본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그들은 몇 년간 김대중 선생과 관련한 기사나 심지어 조그만 동정조차도 기사화하지 못했던 나를 비롯한 한국 기자들을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고만장하는 태도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몇 년간 제대로 언론다운 모습을 보이지 못한데 따른 죄의식과 부끄럼 탓에 별다른 질문도 못하고 주눅들어 있었다.
그때 김대중 선생이 의외의 말을 했다.
”밤늦게까지 취재하러 와주신 외신기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우리 한국 기자분들이 많이 와 계시므로 한국 언론부터 먼저 30분간 기자회견을 한 뒤 외신 기자 여러분과 회견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과 코끝, 눈시울로 순간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우리들은 이날 김대중 선생이 풀려나는 기사를 써서는 안된다는 당국의 통보를 이미 받았다. 김대중 선생 역시 이같은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을 것임에도 이같은 발언을 함에 따라 나를 비롯한 모든 국내 기자들은 감동을 받았다.
이 발언은 또한 나를 포함한 모든 한국 기자들에게 감동, 용기와 함께 ”좋다 어떡하든 이 기사는 내보낸다“하는 투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30분뒤 응접실에서 나온 한국 기자들에게 나는 병원 정문을 나서던 순간의 상황을 브리핑했다. 이 순간을 지켜본 기자는 나와 우리 사진부 기자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브리핑을 끝낸 뒤 나는 기사를 송고하기 위해 근처에 있던 마포 경찰서 동교동 파출소로 향했다. 그러나 파출소 안에는 사복 차림들이 버글버글했다. 그 안에서 기사 부를 환경이 전혀 아니어서 김대중 선생 집앞 길거리에 있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전화부스 3개가 설치돼있었다. 통행인이나 주민들을 위하기 보다는 평소 김대중 선생이나 부근의 동향을 살피던 기관 관계자들이 정보를 보고할 목적으로 설치된 공중전화였다고 본다.
당시는 핸드폰도 없고 이메일도 없던 시절이라 우리 경찰 기자들은 공중전화를 걸기위한 용도로 동전을 한웅큼씩 갖고 다닐 때였다.
회사로 전활 걸어 기사를 송고하겠다고 했더니 야근하던 선배가 ”오늘 이 기사 안 넣기로 했잖아. 이미 강판(기사를 마감하고 인쇄에 들어가던 단계)도 했어“라는 게 아닌가. 물론 나도 특근 나올 때 오늘 사건은 취재는 하되 기사는 쓰지 않고 단지 비사 등을 수집, 기록해놓는 ‘영구 보존철’에만 간직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이 국내 기자들부터 먼저 인터뷰를 하겠다며 우리들의 체면을 살려준 말에 받은 감동과 투지로 인해 어떡하든 이 기사를 신문에 내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야근 국장을 바꿔달라고 했다. 야근 국장이란 정치, 경제, 사회, 국제, 체육부 부장 등이 하루씩 돌아가며 야간에 야근 국장으로서 편집국을 지휘하는 것을 말한다.
그날밤 야간 국장은 이성표 경제부장이었다.
이 부장 역시 먼저 전화받았던 선배처럼 “오늘 이 기사는 지면에 내보내지 않는다. 그냥 들어오라. 아쉽겠지만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고 취재했다는 사실 자체로 의미를 찾아라”고 말했다.
나는 이 부장에게 시건방을 떨었다. ”기자와 언론에게 역사의 현장이라는 것은 기사로 탄생되어야지만 역사의 현장 기록자이지 기사화하지 않은 것은 패배자의 변명일 뿐“이라고 강하게 어필했다.
이성표 부장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그래 알았어 기사 불러”라고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다. 결국 내가 부른 기사는 1면과 사회면인 7면 등 두 개 면에 게재됐다.
그런데 기사를 다 송고하고 나니 다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서울대 병원 정문을 나서던 순간을 묘사한 ‘오른손엔 지팡이, 왼손엔 성경’이란 스케치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한창 외신기자들과 인터뷰 중이던 김대중 선생에게 가서 왼손에 들고 있던 책이 성경이 맞느냐고 확인해본 결과 성경이 아니었다. 역사가의 철학인가 하는 책이었다. 표지가 까맣고 두께도 제법 되고 해서 성경으로 봤던 것이다. 이 사실을 확인했을 때는 잘못된 부분을 고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현장 일을 마치고 회사로 들어가서 이성표 부장께 이 사실 보고했다.
이 부장은 “이 친구들(정보부 관계자들)이 이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지도 모르겠군. 어쨌든 당신 취재 노트에 성경이 아니라는 사실은 뒤늦게 확인했다는 점을 적어놓아라”고 지시했다.
야근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서 자고 있는데 6시반이나 7시 경이 됐을까 집으로 전화가 왔다. “틀림없이 기사 관련일 것”이라고 전화를 받았더니 아니나 다를가 이성표 부장이었다.
이 부장은 “김인규씨 김대중 선생이 왼손에 들고 있었던 책은 성경이 아니라며”하고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결국 당국이 이것을 문제삼으려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나에게 변명꺼리를 적어놓으라고 지시까지 했던 이 부장이 이 사실을 처음 안 것처럼 질문하는 것은 분명히 외부에서 트집잡기가 들어온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나 역시 시치미를 딱떼고 “부장 죄송합니다. 기사를 부를 때만 해도 성경인 줄 알았습니다. 두께도 그렇고 책 표지 색깔도 성경하고 똑같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확인했을 때는 시간이 너무 늦어 고칠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하고 대답했다.
이 부장은 “제대로 확인했었어야지. 하여튼 실수라는 거지?”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와 이 부장은 김대중 선생이 다른 책을 들고 나왔음에도 상징성이 큰 성경이라고 의도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느냐고 당국이 몰아부칠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특히 김대중 선생 형집행 정지 기사를 넣지 말라고 그렇게 압력을 넣었던 정보 당국 입장에서는 기사 게재 여부보다는 기독교계의 시선이 모아질 성경을 고의로 끌어드렸다고 판단, 탄압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자는둥 마는둥 눈을 부치고 난 뒤 출입처로 나갔다. 언제 나를 찾는 전화가 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성경 문제는 나로부터 풀을 받은 국내 언론들은 물론이고 국내 언론 기사를 참고한 외신들까지 모두 ‘오른손엔 지팡이, 왼손엔 성경’을 들었다고 보도했기에 더 이상 문제시되지 않았다.
나중에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얘기론 소위 ‘보도지침’을 어기고 김대중 선생 기사를 지면에 그것도 2개면에 걸쳐 실었고 ‘성경 휴대’ 문제까지 제기됐기에 이 부장은 정보당국으로부터 다소 시달림을 받기는 했으나 걱정했던 것만큼은 아니었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김대중 선생은 억압적인 언론상황으로 주눅들어있던 한국 기자들을 무시하기는커녕 감동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줌과 동시에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보여준 위대한 정치인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또한 당국의 거칠은 압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선생 기사를 두개 면에 각각 사진과 함께 넉넉한 크기로 지면에 소화한 이성표 부장의 용기와 결단에 존경심을 갖고 있다, 과연 내가 이 부장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면 그같은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성표 부장께서는 일간 스포츠, 한국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뒤 사업을 하시다 1990년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언제나 온화한 표정과 시원스런 키와 체구를 지녀 흡사 영국신사같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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