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 바위에 붙어 서식하는 자연산 ‘참홍합’을 강원도에서는‘섭’이라 한다.
조선 중기 어의(御醫)로 있으면서 구암(龜巖) 허준(許浚, 1546∼1615)이 1610년에 선조(宣祖)의 명(命)으로 편찬한『동의보감(東醫寶鑑)』에 홍합을 우리말로 ‘셥’이라 썼다.
이를 보더라도 강원도에서 ‘참홍합’을 ‘섭’이라고 부르는 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방언은 아닌 것 같다.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에 보면 강릉, 삼척, 고성, 양양, 울진 등 강원도 일대에 홍합(紅蛤)이 토산(土産)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보면 세종(世宗) 때 이미 홍합젓[紅蛤鮓]을 담가 먹었으며, 정조(正祖) 때는‘관동지방(關東地方)에서는 거친 곡식 한 포(包)를 홍합(紅蛤) 한 포로 바꾸기도 한다’라고 나온다.
특히 정조는 내가 이르기를,“홍합 미음(紅蛤米飮)이 꽤 효과가 있다.”하니, 서호수가 아뢰기를,“이것은 청담(淸淡)한 재료를 써서 몸을 보해 주는 처방이므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만큼 홍합(紅蛤)은 궁중에 진상이 되었고 임금이 즐겨 먹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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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궁(宮)의 제물(祭物) 단자에도 홍합탕(紅蛤湯), 홍합숙(紅蛤熟), 홍합전(紅蛤煎), 홍합초(紅蛤炒), 홍합해(紅蛤醢 홍합젓) 등 홍합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가 등장한다.
‘섭’인 참홍합은 지중해에서 수입하는 양식 홍합인 ‘지중해담치’보다 4배 이상 크다. 최대 20㎝까지 자라며, 단단한 검은 껍데기엔 털이나 따개비가 붙어 있어 울퉁불퉁하다. 양식도 안돼 바닷속에서 10년은 있어야 살이 찬다.
섭의 산란기는 3∼6월인데 이 시기엔 맛이 떨어지고 독성이 있어 주의해야 한다. 겨울부터 이듬해 초봄까지 제철에 먹으면 쫄깃한 식감과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고성 양양 등 강원도에서는 고추장으로 맵게 양념하여 끓여낸 국물에 섭이 들어간 요리로 시원하고 얼큰한 맛을 낸다.
눈보라가 치고 겨울바람 쌩쌩 부는 날이면 섭을 넉넉히 넣어 끓여낸 ‘섭국’은 꽁꽁 언 몸을 얼큰하게 풀어주는 강원도 향토음식이다.
강원도 사람들은 섭을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다. 식량이 부족한 보릿고개 때엔 바닷가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던 섭을 잘게 썰어 섭죽을 끓여 먹고, 쌀이 여유 있을 땐 섭밥을 지어 먹었다. 살이 가득 차는 시기엔 통째로 쪄서 먹고 섭전을 부쳐 먹었다고 한다.
특히 섭국은 특히 보양식으로 통했다. 쇠고기나 닭고기 육수에 된장을 풀어 섭과 채소를 넣고 끓이거나 국수나 수제비로 양을 불려 먹기도 했다.
요즘 식당에서 내놓는 섭국은 조금 다른데, 다시마 육수에 고추장을 풀고 섭과 팽이버섯·숙주나물·부추 등 각종 채소를 넣고 팔팔 끓여 얼큰하게 맛을 낸다. 섭죽에 들어가는 부추는 섭의 향을 가리지 않아 궁합이 좋다. 강원도의 섭국은 맑은 홍합탕과는 다른 매력으로 주민뿐만 아니라 강원도 해안가를 찾는 외지 사람들이 해장국으로 즐겨 찾아 먹는다.
섭국은 얼큰한 국물 사이로 뽀얀 흰색을 띠는 수컷 홍합과 붉은 암컷 홍합이 함께 들어 있다. 섭의 맛은 워낙 쫄깃해 크기가 작은 건 통으로, 큰 건 잘라 넣는다고 한다. 고추장 맛이 진하게 나면서 담백하고 시원한 섭 맛이 느껴진다.
비린 맛 없이 칼칼한 국물이라 밥을 말게 되면 섭국밥 한 그릇 뚝딱 비우게 되고 이내 온몸이 따뜻하게 온기가 오른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