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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개혁군주는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 1752~1800)라고 생각한다.
직제학(直提學) 서유방(徐有防)이 정조(正祖)7년 (1783, )에 쓴 기록을 보면, 정조(正祖)는 ‘食是民天(식시민천)음식은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라 했다.
일찍이 여말선초(麗末鮮初) 3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은 『목은시고(牧隱詩稿)』에 게재된 그의 시(詩)에서 ‘食是民天簡帝心(식시민천간제심)밥은 백성의 하늘이니 상제가 살피리라’라 했다.
그뿐인가? 『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 8년(1426) 5월 4일 원단(圓壇) 기우제(祈雨祭) 제문(祭文)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民惟邦本(민유방본)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고
食是民天(식시민천)먹는 것은 백성이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니
苟失其天(구실기천)진실로 하늘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으면
國何賴焉(국하뇌언)나라가 무엇에 의지하겠습니까-이하생략-”
절대 군주제였던 조선에서도 이처럼 민생문제를 제일로 여겼던 것이다.
개혁군주였던 정조(正祖)는 거재 유생(居齋儒生) 즉 성균관(成均館)의 기숙사에서 숙식하며 학문을 닦던 선비들을 전정(殿庭)에 불러서 제술(製述)과 강경(講經)을 시험 보이고, 식당(食堂)을 설치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대신, 각신, 승지가 모두 있었는데, 정3품 대사성이 직접 한 상을 올리자 상이 수저를 들어 한 주발의 밥을 거의 반이나 들었다. 대신이 아뢰기를, “이것은 옛사람이 말한 해염(薤鹽 : 소금에 절인 파 나물)입니다. 성균관(成均館) 기숙사에 머물며 늘 먹는 자들도 오히려 어렵게 여기는 것인데 전하께서 오늘 드시니 실로 박하게 드시는 성덕(盛德)에서 나온 것입니다.”이라고 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음식에 대해 가릴 줄을 모르는데, 이는 타고난 천성이 그럴 뿐만이 아니라 음식은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이니 좋고 나쁨을 가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이 밥을 먹은 것이 모두 세 번이었는데 배부르게 먹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대내로 돌아와서 규장각(奎章閣)의 벼슬아치들에게 시권을 고시(考試)하라고 하니, 제신이 물러나 식사하도록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조금 전 연석의 식당에 동참했으면서 또 조반을 먹으려고 하는가. 나는 조금 전에 중관(中官 : 내시부(內侍府)의 벼슬아치)이 다시 밥을 먹으라고 청하였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거친 밥에 나물국이었지만 배불리 먹었는데 또 굳이 밥을 먹겠는가.” 하였다.
정조(正祖)와 함께 성균관(成均館) 식당에서 기숙사 유생(儒生)들이 평소에 먹던 거친음식을 규장각(奎章閣)의 신하들이 먹었지만 정조(正祖)처럼 진정성있는 식사를 한 것이 아니라 먹는 흉내만 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正祖)는 유생(儒生)이 먹던 해염(薤鹽)과 함께 식사를 맛있게 한 것이다.
그 뿐인가 정조가 병을 앓고 있을 때, 바닷가 고을에서 전복을 따 바쳤다. 전복하나 바치는데 드는 비용이 수십 금이나 되니 수고롭게 하지 말라 했다.
저녁 수라를 올리다가 내시가 소반을 떨어뜨려 큰소리가 침소까지 들리자 정조는 느긋하게 하교하였다. “다친 사람 없느냐? 사람이 중요하다. 깨진 그릇은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정조(正祖)는 “지도자는 덕본재말(德本財末), 덕을 근본으로 하고 재물을 말단으로 삼아야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는다.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고 했다.
임금에게 백성들의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아무리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가졌다 해도 민심이 멀어지면 그 권력은 무너지게 마련이다.
민생이 어려워지면 민심은 사나워지게 마련이다.
정조(正祖)는 그것을 안 것이다. 그래서 위민정치(爲民政治)에 더 힘 쓴 것이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