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갈나무는 참나뭇과의 낙엽수로, 도토리나무ㆍ곡목(槲木) 등으로도 불린다.

참나무의 열매인 도토리는 동글동글한 모양만큼이나 귀여운 순우리말 이름을 가졌다.

도토리는 돼지를 뜻하는 '돝'이 유래라고 하는데, 돝밤(돼지가 먹는 밤)이 변화를 거치며 발음하기 편하게 뒤에 '이'가 붙은 것으로 추정된다.

도토리는 한자로 상실(橡實) 또는 서실(芧實)이라고도 한다.

서반(芧飯)은 도토리로 만든 음식이니, 소박한 제수를 뜻한다. 서속(芧粟)이라고도 한다. 구황(救荒) : 수해(水害)나 한재(旱災)를 만나 흉년이 들었을 때 기한(飢寒)을 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산야(山野)의 초근 목피(草根木皮)를 이용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신라 말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나라에서 신라로 귀국 후에 지은 『고운집(孤雲集)』에 진감화상비명(眞監和尙碑銘) 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선사(禪師)의 성품은 질박함을 잃지 않았으며, 말도 기교를 부리는 법이 없었다. 입는 것은 허름한 옷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거친 음식도 맛있게 여겼으며, 도토리와 콩이 뒤섞인 밥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가 없었다. 현귀한 자들이 때때로 찾아와도 대접하는 음식이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문인이 배 속을 거북하게 할 것이라면서 난색을 표명하기라도 하면, 선사가 이르기를,“마음이 있어서 찾아왔을 것이니, 거친 밥인들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하였다. 그러고는 존귀한 사람이나 비천한 사람이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똑같이 대하였다.’

조선중기 문인이었던 유호인(兪好仁 1445~1494)은 안동(安東)의 별호(別號)인 화산(花山) 십가(十歌)에서

“噡彼淸涼山(첨피청량산)저기 저 청량산을 바라 보게나
山中多橡木(산중다상목)산중에 도토리 나무가 많지 않은가
今年似去年(금년사거년)금년도 작년만 못지않게
離離實可拾(이이실가습)주렁주렁 열매를 주을 만하군
擧家負戴歸(거가부재귀)온 집안이 가서 지고이고 돌아와
春屑甕中積(춘설옹중적)찌어 가루 만들어 독에 쌓아두세
凶年豈殺余(흉년기살여)흉년인들 어찌 나를 죽이리
猶可代粟粒(유가대속립)도토리도 제법 좁쌀을 대신하네”

예부터 가뭄이 든 흉년일수록 도토리가 더 잘 영근다고 했다. 그래서 도토리는 흉년에 좁쌀을 대신하였으니 죽으라는 법은 없었던 것 같다.

1596년(선조 29) 왕명에 따라 허준(許浚, 1539~1615)이 유의(儒醫) 정작(鄭碏), 태의 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應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 등과 함께 1610년(광해군 2)에 25권 25책으로 완성한 의서(醫書)『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도 도토리는 설사와 이질을 낫게 하고 위와 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먹으면 몸에 살이 오른다고 했다. 도토리를 단순히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는 열매가 아니라 건강에 좋은 별미로 취급한 것이다.

도토리 묵(纆)은 한국과 일본만 만들어 먹는다.

한국은 도토리를 콩과 함께 밥에 넣어 먹기도 하고『고운집(孤雲集)』도토리 껍질을 벗겨 쪄서 먹기도『목민심서(牧民心書)』했다.

그러나 도토리 묵은 조선 후기의 학자인 오주(五洲) 이규경(李圭景 1788-1856) 이 1800년대에 펴낸『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인사편(人事篇)⌟ 복식류(服食類) 제선(諸膳) ‘행주음선변증설(行廚飮膳辨證說)’에 도토리묵[橡實泡]이 기록되어 있는데, ‘8월과 9월 사이에 도토리를 따서 껍질을 벗긴 후 갈아 체로 거르고 가루에 물을 끓여 풀로 쑤어 굳히면 두부가 된다고 했으니 바로 도토리묵[橡實纆]을 만드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만들어진 도토리두부를 가늘게 썰어서 초장에 찍어 먹으면 산중의 진솔한 반찬이 된다고 했으니 역시 지금 도토리묵 먹는 법과 다를 것이 없다. 또 국수나 율무와 함께 섞어 먹으면 맛이 묘하다고 했고, 간장을 치거나 초장이나 김칫국과 먹으면 맛이 좋다고 했으니’ 요즘 먹는 묵밥[纆飯]과 다름이 없다.

한편 ‘도토리묵 이외에도 도토리를 따다가 껍질을 벗겨 물에 담가두면 떫은맛이 사라지니 곡식 가루와 섞으면 죽으로 쑤어 먹을 수 있고, 밥으로도 먹을 수 있으며, 가루로 빻아 누룩과 섞으면 술도 담글 수 있다.’면서 다양한 도토리 음식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일본으로 끌려 간 박호인이 두부를 제조하는 기술자로 이미 조선에는 두부를 비롯한 도토리묵은 1500년대 그 이전부터 만들어 먹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 재야학자였던 위관(韋觀) 이용기(李用基 1870~1934)의『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이화여자대학교 교수를 지낸 요리연구가 방신영(方信榮, 1890년 ∼ 1977년)『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는 도토리묵[橡實乳]만드는 법이 등장한다.

일본에선 조몬 시대부터 도토리 요리가 있었고, 아이누가 도토리를 니세우(nisew)라고 부르며 도토리를 삶아 떫은맛을 빼고 신토코(아이누어 シントコ)에 보존했다 그냥 먹거나 단자(團子)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의 도토리묵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고치현(高知県)으로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두부 제조업을 하면서 도토리묵을 만들어 팔았는데, 이 도토리묵이 일본어로는 도토리 두부라는 뜻의 카시토후(樫豆腐)라고 부른다. 지금도 일본에서 유일하게 도토리묵을 만드는 지역은 고치현(高知県) 아키시(安芸市)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