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가면 귤떡, 귤오메기, 귤찹쌀떡 등 귤이 들어 간 떡들을 만든다.

귤떡을 한문으로 귤병(橘餠)이라 한다. 그렇지만 중국이나 우리의 고문헌에 나오는 귤병(橘餠)은 떡이 아니라 사탕 류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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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북학파인 담헌(湛軒)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문집『담헌서(湛軒書)』외집 10권 연기(燕記)음식(飮食)편에‘용안(龍眼)ㆍ여지(荔枝)ㆍ건포도ㆍ밀조(蜜棗)ㆍ민강(閩薑)ㆍ귤병(橘餠) 등은 우리나라에서 진귀하게 여기는 것들이다.’라고 나온다.

특히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담헌(湛軒)과 함께 북경을 갔는데, ‘담헌이 귤병(橘餠)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난공이 자기의 전대에서 계속 꺼내어 주었다.’고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제63권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에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담헌(湛軒)외에도 1777년(정조 1) 이갑(李岬)이 연행에서 견문한 바를 기록한 『연행기사(燕行記事)』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연행일기(燕行日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귤병(橘餠)이 나오나 모두 중국에서 맛을 본 것들이다.

조선 순조 때 자제군관으로 동지사 일행을 배행해 북경을 다녀온 정양(晶陽) 신태희(申泰羲, 1800∼1850)는 북경에서 돌아오던 중 중후소 희자대(戲子臺)에 이르러 주지가 내온 점심밥에 귤로 만든 병〔橘餠]이 있었는데, 귤을 꿀이나 사탕에 조리어 만든 당속(糖屬)이라 했다.-『북경록(北京錄)』-

그렇다면 정양(晶陽)이 접한 귤병(橘餠)은 떡이 아니라 사탕이다.

이의봉(李義鳳1733~1801) 역시『북경록(北京錄)』에서 같은 이야기를 한다.
정조 19년(1795) 늦은 봄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감인소(監印所)에서 직숙(直宿)하며 글을 쓰고 있었는데, 하루는 상께서 춘당대(春塘臺)에 납시어 상화조어(賞花釣魚)의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정조가 붕어(崩御)한 후 시를 써서 오희불망(於戲不忘)의 감정을 표현한 ‘부용정노래[芙蓉亭歌]에 이런 구절이 있다.

“棗糕橘餠疊金丸(조고귤병첩금환)조고에 귤병에 금환까지 쌓여 있었네”라고 읊었다.

이 말은 정조가 춘당대(春塘臺)에서 연 잔치 상에 선비들이 중국에서 맛봤다던 그 귤병이 쌓여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조선의 궁중에서도 귤병을 만들어 먹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일성록(日省錄)』을 보면 정조(正祖) 때 유독 잔치 상에 귤병(橘餠)이 많이 자주 올라갔다.

특히 1796 6월 18일에는 정조가 어머니를 위한 진찬에는 ‘사당(砂糖)ㆍ귤병(橘餠), 합쳐서 1합이다.’라고 나온다. 이는 사탕과 떡을 구별한 것 같다.

한편 이 잔치에는 귤병다식(橘餠茶食)도 등장한다. 순조(純祖)때는 귤병차(橘餠茶)가 자주 등장한다.

조선왕조의 최초 황제이자 실제 의미에서 마지막 황제였던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고 보령 51세의 축하하기 위해 고종 39년(1902년)에 행했던 잔치의 전말을 기록한『진연의궤(進宴儀軌)』는 효종 이후 사용되어 오던 격식을 갖춘 연향을 의미하는 국가 연례를 기록한 책이다. 고종 때에는 유독 이러저러한 잔치가 많았었는데, 이 진연이 있은 지 5년 후에 고종황제는 강제로 퇴위당하고 또 3년 후에는 망국의 한을 남기게 되었다. 이『진연의궤(進宴儀軌)』는 대한제국 황제의 마지막 진연을 기록한 것으로 모두 3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의궤 내입 찬안(內入饌案)에 ‘큰사탕 귤떡’이 올려져 있다.

‘大砂糖橘餠一器: 高一尺五寸 大砂糖一百二十圓 橘餠二百圓(대사당귤병 1그릇: 고임높이 1자 5치, 큰 사탕 120원, 귤떡 200원)’라고 나온다.

여기에서도 귤병(橘餠)은 떡이 아니라 귤사탕 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귤병(橘餠)은 귤을 썰어 넣고 대추를 박아서 만든 꿀떡을 귤떡[橘餠]이라고 한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