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전후 18-한층 강화된 신분 확인 절차

김인규 기자 승인 2021.08.15 15:22 의견 0

9.11이 터지자 미국내에서 가장 강화되고 빡빡한 절차는 바로 신분 확인 분야였다.

9.11전까지 미국인들의 신분 관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즉 우리로치면 주민등록번호같은 소셜 시큐리티 넘버(사회 보장번호)는 각자에게 부여돼있었지만 그 관리가 참으로 부실했다. 한 소셜 번호에 여러명이 등재돼있는 경우도 많았다.

말하자면 123-45-6789란 소셜 번호가 있다면 이 번호의 실질적 주인은 홍길동이라 치자. 그러나 이 번호 123-45-6789에는 홍길동 외에 임꺽정, 이수일, 심순애 등 각기 다른 사람들이 자기 소셜 번호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많게는 10여명이 한 소셜번호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미국 정부는 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서류상으로만 기재, 존재하는 소셜번호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중복 여부를 대조할 수가 없었기에 이같은 현상이 가능했었다.

이처럼 많은 다른 사람들이 한 소셜 번호를 사용하는 이유는 소셜 번호가 있어야지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이 꼭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인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미국에서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조건 중 하나는 바로 은행 구좌 개설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지만 내가 한국을 떠날 당시에는 한국에서 은행구좌를 개설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은행에서는 오히려 은행구좌 개설을 적극 장려하고 반기곤 했다.

그러나 뉴욕에 도착해서 일상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바로 은행 구좌를 개설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은행 구좌가 없으면 당연히 구좌 개설자가 받게 되는 개인 수표(퍼스널 체크) 책을 받을 수 없다.

개인 수표 책이 없으면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불편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시장이나 가게에서 물건을 구입할 땐 현금을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집세나 전기세, 전화비 등 각종 공과금을 내려면 현금 지불은 원천적으로 차단돼있다. 이들 공과금은 반드시 개인 수표에 액수를 기입해 우편으로 보내야 한다.

처음 뉴욕에 도착해 집을 렌트한 뒤 세를 내어야 하는데 개인 수표가 없어 한동안 고생했다. 개인 수표가 없는 사람은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서 반드시 현금을 내고 ’머니 오더‘라는 일종의 임시 보증 수표를 발행받아야 한다. 이를 우편으로 집주인이나 전기회사 콘 에디슨, 통신회사 브라이존 등에 보내야 하는 것이다.

머니 오더를 끊는 것도 참으로 귀찮은 일이었다. 보낼 액수는 물론이고 수수료를 현금으로 내야 하는데다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서 차례가 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도 한동안은 이같은 불편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 모 은행 뉴욕 본부에 와있던 대학 친구가 내가 뉴욕 한국일보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전화를 해왔다. 대학생 시절 같은 하숙집에서 룸메이트였던 친구에게 자주 놀러왔던 그였기에 나 역시 그와 잘 알고 있었다.

그 친구는 먼 뉴욕에서 만나 반갑다며 같이 점심을 한번 하자고 해 맨하탄 근처 식당에서 만났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그 친구가 나에게 은행 개인 구좌가 있느냐고 물었다. 뉴욕에 온지 얼마되지 않아 크레딧(개인 신용점수)이 없어 구좌를 열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럼 엄청 불편할텐데 내가 은행 구좌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현재까지 소셜 넘버도 없다며 그런데도 은행 구좌 개설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 친구는 씩 웃으며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대답했다.

며칠 뒤 오매불망하던 구좌 개설이 이루어지고 당연히 내 이름의 개인 수표책까지 발급받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특별한 경우 기존 고객의 소셜 번호를 차용, 내 이름으로 구좌를 개설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지만 특수한 관계에 있는 신규 고객에게 이같은 방식의 편의를 제공한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몇 달이 지나 나에게도 정식 소셜 번호가 나와 이를 근거로 정상적인 은행 계좌와 개인 수표책을 소유할 수 있었다.

만약 그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소셜 번호가 나올 때까지 집세, 전기세, 전화비 등을 내기 위해 수시로 은행이나 우체국을 방문, 머니 오더를 발행받느라 적잖은 시간과 경비를 낭비하는 불편을 겪었을 것이다.

이같은 변칙스런 소셜 번호 사용과 구좌 개설은 나 외에 상당수 한인, 또다른 소수계 이민자들도 이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편법에 따른 편의는 9.11 이후 근절됐다.

미국 정부가 그전까지 문서에 기재, 아날로그적으로 운용해왔던 소셜 번호를 전산화, 디지털 관리로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9.11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셜 등 이민자들의 신분 상태를 전산화함에 따라 종전같으면 모르고 지나갔을 편법이나 불법이 드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처벌을 받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같은 변화는 모든 이민자 커뮤니티에 엄청난 삭풍을 몰아왔다. 한인사회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민자들의 각종 기록을 전산화하면서 한인사회에서는 종전같았으면 묻혀있었을 과실이나 범죄가 드러나 한국으로 추방되는 가슴 아픈 사건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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