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로 불안해진 미국인들이 태권도 수련에 또다른 관심을 갖고 있다는 현실과 관련해 평소 마음속에 갖고 있던 태권도를 활용한 관련 상품 개발과 수익 증대 문제에 대해 몇자 적어볼까 한다.
지금은 기세가 많이 약화됐지만 일본 남녀 배구는 한때 세계 정상수준에 올라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은 배구를 활용해 국가적으로 상당한 부를 창출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전세계 배구계를 관할하는 국제 배구 연맹(FIVB)은 1947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됐으며 프랑스 출신의 폴 리보드가 초대 회장으로 선출돼 1984년까지 장기 집권했다.
그러나 리보드 회장은 지나치게 오랫동안 회장직을 맡아온데 따른 일부 회원국들의 반발과 프랑스 배구의 경기력, 저변 등이 너무 낮아 1970년대 말부터는 회장으로서의 권위가 많이 흔들렸다.
결국 FIVB 부회장이던 멕시코 배구계의 루벤 아코스타 에르난데스가 1984년 제2대 세계 배구계 수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이는 절차상의 문제였을 뿐 아코스타는 이미 1980년대 초부터 국제 연맹 정식 회장으로 선출될 때까지 리보드 초대 회장을 제치고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당시 멕시코 남녀 배구 수준과 저변 역시 별볼일 없었음에도 에르난데스가 국제 연맹 회장이 된데는 일본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일본은 서양 선수들에 비해 신장과 체격이 한참 열세임에도 세계 남녀 배구대회에서 최정상에 올라섰고 인기 및 저변도 두터워 국제 연맹에서 발언권이 아주 셌다.
특히 마쓰다히라 야스다카 일본 배구협회장은 세계 어떤 배구인들보다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가 코치로 참가했던 1964년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 남자 대표팀은 홈코트에서 참패했다.
그는 이듬해부터 감독을 맡아 남자 대표팀이 1968년 멕시코 올림픽에서 은메달,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게 했다.
유럽 선수들에 비해 키가 한뼘 이상이나 작은 일본 선수들이 이뤄낸 이같은 성과는 전세계 배구인들에게는 경탄의 대상이었고 마쓰다히라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았다.
이같은 개인적인 능력과 카리스마로 마쓰다히라는 아코스타 부회장을 강력하게 지원, 아코스타가 국제 연맹을 장악할 수 있게 했다. 물론 마쓰다히라가 아무 조건없이 아코스타를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국제 연맹의 주요 직책, 즉 세계 배구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경기이사, 심판이사 등은 일본이 차지하는 반대 급부를 챙긴 것이다.
그러나 마쓰다히라나 일본 배구계가 아코스타를 움직여 받아낸 가장 큰 보상은 따로 있었다. 이는 일본 배구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일본 기업 내지는 일본 국익에 큰 도움을 안겨주는 선물이기도 했다.
종래 배구코트는 캐나다산 단풍나무가 사용됐다. 국제 공인 경기는 반드시 캐나다산 단풍나무 코트에서 치러야 했다. 바닥재 나무 가운데 캐나다산 단풍나무가 가장 탄력이 좋아 선수들의 부상을 최소화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어느날 갑자기 배구 국제 공인 바닥재는 캐나다산 단풍나무가 아니라 일본 기업 도레이가 새로 개발한 타나플렉스로 변경, 교체됐다. 당시만 해도 타나플렉스 바닥재를 생산하는 기업은 일본 도레이밖에 없었고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FIVB로부터 공인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같은 결정은 나름대로 명분을 갖고 있었다. 배구 선수들은 점프했다 바닥에 착지하는 횟수와 충격이 엄청나므로 관절 등에서 발생하는 부상을 줄이기 위해 이처럼 타나플렉스로 교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세계에 존재하는 배구코트 숫자는 파악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많다. 처음에는 각국 대표 선수들이 이용하는 코트만 타나플렉스를 깔지만 실업팀, 대학팀, 중고교팀으로 확산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엄청난 숫자의 코트 바닥재를 일본 도레이가 독점했으므로 그 수익은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잘 가지 않는다.
국제 경기에서 사용하는 공인구도 역시 일본의 다치까라로 선정됐다. 모든 스포츠 경기에 사용하는 공은 제조회사에 따라 탄력성, 반발지수가 각각 다르다. 배구공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국제 경기에서 다치까라 공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평소 연습에서도 다치까라를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 세계 국가 대표 배구팀은 물론이고 앞으로 국가 대표가 될 청소년 선수들까지 어쩔 수 없이 다치까라로 훈련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치까라가 국제 공인구로 선정됨에 따라 일본 제조회사는 당연히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운동화 역시 일본 제품인 아식스와 미즈노가 배구장을 점령했다. 물론 배구화는 공인화 제도가 확정되지 않았지만 국제 경기에 나서는 각국 배구 선수들 대부분, 아니 전부일 정도로 아식스나 미즈노를 신고 뛰었다.
이를 계기로 아식스와 미즈노는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돋움했다.
당시는 LA올림픽을 몇 년 앞둔 시점이었다. 올림픽에 사활을 거는 각국 배구협회들은 국제 연맹의 이같은 갑작스런 결정에 항의하거나 반대할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만약 일본인이 국제 연맹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면 어쩌면 세계 각국 배구협회로부터 큰 항의를 받았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국제 연맹의 이같은 결정은 일본의 마쓰다히라가 배후 조종자였겠지만 외부적으로는 국제 연맹 실권자 아코스타 부회장이 내렸다는 형식을 취했기에 별다른 반발없이 결정되고 말았다.
이같은 사례로 볼 때 태권도도 한국 입장에서 수많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
물론 태권도는 한국에서 발생, 세계화했고 세계태권도연맹(WTF)은 조정원 회장이 맡아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배경을 이유로 한국이 터무니없는 위세나 횡포를 부려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 태권도의 발전을 기하면서 태권도 발상지가 한국이라는 점을 활용해 다양한 수익 모델을 개발할 수 있다고 본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 태권도 수련생들 가운데는 태권도를 호신 무술 외에 자기 수양의 매개체로 여기는 이들이 무척 많다. 때문에 이들은 태권도 발상지에 대한 호기심과 경외감을 가지고 한국 방문을 고대하기도 한다.
태권도 하드웨어인 무주 태권도 공원, 국기원 등에 다양한 소프트 웨어를 접목시킬 경우 외국 수련생들의 방문을 한층 증가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또한 경기 진행 바닥재, 호구복, 헬멧 등 각종 장비 등을 한국 태권도 단체와 관련 업체가 손잡고 개량, 개발에 나선다면 세계로 뻗어나가는 비즈니스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이와 관련, 필자가 뉴욕에 있을 때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미국 태권도 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박동근 사범과 많은 얘기와 아이디어를 나누기도 했다.
특히 박동근 사범은 한때 국기원 사무총장 물망설이 나돌았기에 만약 선출만 된다면 많은 개혁 프로그램, 수익성 향상 방안 등을 마련하겠다고 계획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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