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치미 이야기

김인규 기자 승인 2021.10.04 15:41 의견 0

겨울철 장독에 살 어름이 언 동치미 국물은 '이냉치냉'(以冷治冷)의 대표적인 음식이며, 냉면국물에 요긴하게 쓰인다.

기원전 11세기 공자가 편찬한『서경(書經)』에는 "만청(蔓菁)을 저(菹)로 담가먹는다"고 적었는데 '무를 소금 절임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4세기말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재배된 무는 고려시대에 아주 귀한 채소로 취급되었다.

고려시대 중엽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가포육영(家圃六詠)」에

得醬尤宜三夏食(득장우의삼하식)순무를 장에 넣으면 삼하(三夏)에 더욱 좋고

淸鹽堪備九冬支(청감감비구동지)청염(淸鹽)에 절여 구동지(九冬至)에 대비한다'

根蟠地底差肥大(근반지저차비대)땅속의 뿌리는 날로 커지고

最好霜刀截似梨(최호상도절사리)서리 맞은 후에 수확하여 칼로 베어 맛보네

여기서 '삼하’는 여름 3개월로 순무를 장에 넣어 만든 김치는 상고시대의 ‘지’를 뜻하는 것이

며, ‘구동지’는 겨울 3개월로 청염에 절인 것은 소금물에 담근 동치미(冬沈)를 뜻한다.

동치미(冬沈)이는 이미 고려시대 부터 만들어 먹기 시작 했다.

조선후기 학자 홍석모(洪錫謨)가 1849년(헌종 15년)에 편찬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작은 무로 김치를 담그는데 이것을 동침(凍沈)"이라 하였으며, 조선중기 김유(金綏, 1481~1552)가 쓴『수운잡방(需雲雜方)』이나 1800년대 말 작자미상의 『시의전서(是議全書)』등 음식조리 문헌에서 동침(冬沈)으로 표기했다가 동치미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 어원은 순수우리말이 아니라 동침(冬沈)이라는 한자에 '이' 또는 '미' 접미사를 붙인 단어인 셈이다.

조선 중기 문신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1556~1615)가『오산집(五山集)』속집 제3권 / 오칠언잡록(五七言雜錄)에

氷江夜火可叉魚(빙강야화가우어)언 강에 횃불 잡고 물고기를 낚으니

玉膾眞堪替嚼蔬(옥회진감체작소)옥 같은 그 회가 나물보다 맛있었지

却憶少陵王倚飮(각억소능왕의음)소릉이 왕의의 집에서 술을 마실 때

土酥還與薦冬葅(토소환여천동저)우유와 동치미 차린 것이 생각났지

라며 주(註)에『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권2 '病後過王倚飮贈歌(병후과왕의음증가)에 "長安冬葅酸且綠 金城土酥淨如練(장안동저산차록 금성토소정여련)장안의 동치미는 시고도 푸르고, 금성의 토산 소유(酥油)는 흰 베처럼 깨끗했지"라고 했다.

그러나 동치미는 중국에서 유래 된 것이 아니라 포로로 잡혀 간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서 만들어 먹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동치미가 전파된 것이다.

조선 숙종 (1712년)때 김창업(金昌業)이 청나라를 다녀온 사행(使行)일기인 『연행일기 ( 燕行日記 ) 』에 보면 이미 조선의 동치미가 중국에 전래되어 “우리나라에서 귀화한 노파가 그곳에서 김치를 담가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담근 동치미의 맛이 서울의 것과 똑같다”라고 나와 있다.

이 할머니에 관해서는 동관역(東關驛)에서 머무른 사행들의 기록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사행들 사이에 김치할머니[沈菜老婆]로 불리는 이 할머니는 병자호란 때 잡혀와 이곳에 살았던 조선 피로인(被虜人) 2세다.

조선 순조 때의 문신 이해응(李海應, 1775-1825)이 동지사 서장관으로 중국 연경에 갔을 때의 견문을 1803년에 기록한 『계산기정(薊山紀程)』제5권 부록(附錄) 음식(飮食)에 '풍윤현(豐潤縣), 영원현(寧遠縣)에 동치미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것과 맛이 같으나, 풍윤현 것이 더욱 좋다.'라고 했다.

한편 1832년(순조 32) 6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 서경보(徐耕輔)의 서장관(書狀官)으로 김경선(金景善)이 청나라를 다녀와 쓴 사행기록(使行記錄)『연원직지燕轅直指』에 '동치미[冬沈葅]의 맛이 우리나라의 것과 같다 하는데, 이는 정축년(1637, 인조 15)에 포로로 잡혀 온 우리나라 사람의 유법(遺法)이라 한다. 그러나 가져다가 맛을 보니 그렇지가 않았다.'다고 썼다. 비록 동치미 만드는 법을 우리나라 것과 같다해도 실제 먹어 보니 조선에서 먹던 맛과는 틀리다는 내용이다.

다만 순조 32(1832년) 12월 15일 풍윤현(豐潤縣)의 '동치미[冬沈葅]도 맛이 좋아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과 같다고 한다.'라고 했지만 이야기만 들었을 뿐 직접 맛본것은 아닌것 같다.

1760년 북경(北京)에 간 자제군관 이의봉의 기록인『북원록(北轅錄)』1권 산천풍속총론(山川風俗總論)에도 ' 영원위, 산해관, 풍윤현에는 모두 동치미가 있었는데 우리나라의 동치미 맛과 비슷하였으며 풍윤현의 것이 더 나았다.'고 하였으며, 1760년 12월 23일 풍윤현(豐潤縣) 주방에서 저녁 식사를 내오는데 동치미〔冬沈菜〕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것과 같아 맛이 매우 청량하고 상쾌하였다. 이는 여기서 산 것이었다. 산해관에 들어온 이후로 이미 있었는데 이 모두 지금 맛에 미치지 못하였다. 고 하였다.

조선시대 정조(正祖) 1년 (1777) 이압(李押1737~1795)의『연행기사(燕行記事)』「문견잡기(聞見雜記)」에 '영원(寧遠)ㆍ풍윤(豐潤)의 무동치미[蘿葍冬沉]는 맛이 우리나라 것만은 못하나, 동치미는 역관들이 우리나라에서 담그는 법을 썼기 때문에 한번 먹어 보면 역시 산뜻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1792년 청나라를 다녀온 김정중(金正中) 은『기유록(奇遊錄)』에서 12월18일 풍윤현(豐潤縣) 객줏집 저녁상의 동치미는 아주 좋아서 과연 소문과 같았다.라고 했다. 이렇듯 풍윤현(豐潤縣)의 동치미 맛은 중국에서는 제일 좋았던 것 같다.

개침채(芥沈菜)ㆍ송침채(菘沈菜)는 가는 곳마다 있는데 맛이 나쁘면서 짜고, 또한 갖가지 장아찌[醬瓜]가 있는데 맛이 좋지 못하다. 혹 통관(通官)의 집에는 우리나라의 침채 만드는 법을 모방하여 맛이 꽤 좋다 한다.'라며 동치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호남성 장사(長沙) > 남악 형산(衡山) > 광서성 계림(桂林) > 양삭(陽朔) > 용승(龍勝) > 삼강(三江) > 호남성 봉황고성(鳳凰古城)> 장사 > 악양(岳陽))등에 '중국의 동치미'가 분포 되어있다.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광서성 용승에서 35Km 떨어 진 금갱홍요제전(金坑紅瑤梯田)에 '신무'라는 이름의 초절임은 무에다 식초와 설탕을 넣어 만들지만 한국의 동치미와 다를바 없는 맛이다.

조선 후기 학자 성대중(成大中:1732∼1812)의 잡록집『청성잡기(靑城雜記)』제3권 성언(醒言) 에 신풍 장씨(新豊張氏)의 서자 중 절름발이가 있었는데, 오랑캐들은 김치를 허겁지겁 배불리 먹고 갈증이 나자 동치미 국물을 마시려 하였지만 국물이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퍼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손을 땅에 짚고 머리를 독 속에 넣고 마시니, 시원하고 새콤한 것이 입맛에 맞아 벌컥벌컥 마셔 댔다.

절름발이는 문틈으로 이 광경을 엿보고 있다가 손바닥이 근지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갑자기 문을 뛰쳐나가 덮치니, 오랑캐들은 모두 독 속에 거꾸로 처박혀 그대로 젓이 되고 말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동치미의 참을 수 없는 시원함 때문에 오랑캐는 젓이 되고 만 것이다.

한말 문신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의 시문집『운양집(雲養集)』귀천기속시(歸川紀俗詩)에 동치미가 나온다.

吚唔冬學閙前村(의오동학뇨전촌)웅얼웅얼 겨울 공부 소리에 앞마을 시끄럽고

榾柮爐頭講說煩(골돌노두강설번)등걸불 타는 화롯가에서는 강설하느라 정신없네

夜久欲眠喉吻燥(야구욕면후문조)밤 깊어 자려는데 목이 바싹 타면

雪中咬破冷虀根(설중교파냉제근)눈 속의 차가운 동치미를 씹어 먹는다네

조선시대 '동치미'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문헌 으로는 1766년에 유중림(柳重臨) 의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조선 후기 여성 실학자 빙허각 이씨(憑虛閣李氏, 1759-1824)가 쓴 『규합총서(閨閤叢書)』, 1827년(순조 27)에 서유구(徐有榘 : 1764~1845)가 엮어낸『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등장 한다.

그 중에서 『규합총서(閨閤叢書)』에 나오는 동치미 담는 법을 소개하면, "잘고 모양 예쁜 무를 꼬리채 정하게 깍아 간을 맞추어 절인다.

하루지나 다 절거든 정하게 씻어 독을 묻고 넣는다.

어린외를 가지째 재에 묻는 법으로 두면 갓 딴 듯하니 무를 절일 때 같이 절였다가 넣고 좋은 배와 유자를 왼쪽 방향으로 껍질을 벗겨 썰지 말고 넣고 파 흰 뿌리 부분을 한치 길이씩 베어 위를 반씩 잘라 넷으로 쪼갠 것과 생강을 넓고 얇게 저민것과 고추씨 없이 반듯하게 썬 것을 위에 많이 넣는다. 좋은 물에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고운 채에 받쳐 가득히 붓고 두껍게 봉하여 둔다. 겨울에 익은 후 먹을 때 배와 유자는 썰고, 그 굿에 굴을 타고 석류에 잣을 흩어 스면 맑고 산뜻하며 그 맛이 매우 좋고 또 좋은 꿩고기를 백숙으로 고아서 그 국의 기름을 없애고 얼음을 같이 채워 동치미국에 붓고 궝고기살을 섞어 쓰면 그 이름이 이른바 생치(生雉)김치며, 동치미국에 가는 국수를 넣고 무. 오이. 배. 유자를 같이 저며 얹고 돼지고기와 계란 부친 것을 채쳐서 흩고 후추와 잣을 뿌리면 이른바 냉면이다'라고 적고 있다.

방신영(1890-1977)이 쓴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에 '동침이별법'이라하여 비슷한 조리법이 소개 되어 있다.

고성의 동치미 막국수는 ‘이북식 막국수’에서 나왔는데, 이는 원래 금강산 절집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사찰에서는 막국수를 만들 때 육수 대신 동치미 국물로 시원한 맛을 냈고, 여기에다 강원도에서 많이 나는 메밀로 면을 뽑아 말아 먹는다. 특히 겨울이면 동치미를 담근 독을 소나무 숲에 묻어두면 숙성이 잘 되어 시원하고 깊은 맛을 냈다. 금강산 사찰에서 유래한 동치미 막국수는 무엇보다 ‘막’ 만들어 먹기가 편해, 강원도 어느 가정에서나 한밤중 출출해지면 국수를 삶아 훌훌 말아먹게 된 것이다.

고성사람들은 막국수를 ‘땅에서 났다’는 뜻으로 ‘토면(土麵)’이라고 부른다. 그래서인지 고성막국수는 유난히 메밀 함량이 높아 거무튀튀하고 툭툭 끊어진다. 하지만 그 때문에 동치미 국물이 더 시원하고 달게 느껴진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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