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 중에 과전불납리 이하부정관(瓜田不納履 李下不整冠)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유래한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을 고쳐 쓰지 마라"라는 말인데, 갓을 고쳐 쓰려고 손을 위로 올리면 자두를 따려는 것 같이 보여 오해를 살 수 있다는 데서, 주로 오해를 받을 만한 짓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 ‘오얏’을 ‘배’로 잘못알고 있으나 배가 아니라 ‘자두[紫桃]’이다.

오얏의 한자는 이(李)로 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을 뜻한다.

조선시대 오얏나무가 주요 과수로서 능묘나 사찰, 저택 주변에 심는 풍습이 있었다.

자두[紫桃]는 신석기 시대의 고고학적 유적지에서 올리브, 포도, 무화과와 함께 발견되었다. 켄 알발라(Ken Albala)에 따르면, 자두는 고대 이란에서 기원했다.

오얏이 우리 문헌에 등장한 것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복숭아와 함께 백제(百濟) 온조왕(溫祚王) 3년에 처음 등장한다. 이처럼 오얏은 적어도 2천 년 전부터 우리와 함께한 과일나무이다.

신라말기의 국사였으며, 음양지리학 설에 도통한 스님인 도선선사(道詵禪師)가 저술한 『도선비기(道詵秘記)』에 왕씨(王氏:高麗)를 이어 이씨(李氏)가 한양에 도읍한다는 설이 있어서 고려 중엽부터 고려 왕조에서는 한양에 벌리목사(伐李牧使)를 두고 백악(白岳) 지금의 북악산(​北岳山)의 남쪽에 이수(李樹)를 심어 그것이 무성할 때면 반드시 모두 찍어서 베어 버려 왕의 기운(王氣)을 눌렸다 한다.

이미 500 여년 전에 이씨왕조(李氏王朝)를 예견한 도선(道詵)국사의 예언이 무학대사에 의해 실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무학대사가 도읍지를 정하려고 만경대(국망봉)의 한 맥(脈)을 밟아서 남으로 가다가 비봉(碑峰)에 이르러 무학오심도차(無學誤尋到此) ​즉 무학은 잘 못 이곳에 이르렀다는 여섯 자를 새긴 돌 비석을 발견했는데 이는 옛날 도선 국사가 세운 것이라 한다.

무학대사는 길을 잘못 잡았음을 알고 그 길을 되돌아가 만경대의 정남백(正南脈)으로 쫓아 바로 백악에 이르니 삼맥(三脈)이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는 명당이라 그 아래 궁성의 터를 잡았다 한다.

그곳이 , 즉 벌리(伐李 : 오얏나무를 베던 곳)하던 곳이라는 전설이다. 고려 왕조는 오얏나무(李)를 찍었으면서도 이씨를 잡지 못해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북악산(白岳山) 아래인 자하문 밖은 자도나무의 명산지 였다.

‘오얏꽃’을 한자로는 ‘이화(李花)’라고 쓰며, 대한제국 왕실의 상징으로 오얏꽃 문양은 왕실 건축물이나 장식품, 공예품 등에 널리 사용되어 왔다.

오얏은 전 세계에 약 30종이 있는데, 유용하게 쓰이는 18종은 아시아·유럽·북아메리카 대륙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중부 지방에서 잘 자란다.

이 ‘오얏’을 ‘자주색 복숭아’또는 복숭아를 닮은 열매의 색이 자주(紫朱)색이라 하여 자도(紫桃)라 부르다가 15세기부터 자두[紫桃]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자도(紫桃)’는 처음에는 자두류의 통칭이 아니라 오직 자두의 하위 품종인 자리(紫李)의 속칭이었다.

자리(紫李)외에도 이수(李樹), 작도(酢桃), 내리(柰李), 열녀목(烈女木), 가경자(嘉慶子), 산리자(山李子), 가응자(嘉應子), 모경리(毛梗李), 오얏나무, 추리나무, 자도나무라 부르기도 하고

말린 자두를 가경자(嘉慶子)라고 부르며 울진지방에서는 토종 자두를 '꽤기'라 부른다.

그리고 자두 꽃을‘이화(李花)’잎을 이수엽(李樹葉), 열매를 이실(李實), 이자(李子), 뿌리를 이근(李根), 뿌리껍질을 이근백피(李根白皮), 수지(樹脂)를 이수교(李樹膠), 종자를 이핵인(李核仁)이라고 한다.

가경자(嘉慶子)는 소금에 절여 햇볕에 말리거나 설탕에 절여 저장하거나 꿀물에 졸여 과자를 만들기도 한다. 햇볕에 말린 것을 백리(白李)라 하여 인체에 유익함이 많다’고 했다. 자두는 생으로 먹는 것보다는 햇볕에 말려 건자두로 먹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이다. 달고 새콤한 맛의 자두는 어혈을 풀어주고, 기침을 멈추게 하며, 소변을 잘 통하게 하고 장을 건강하게 한다. 타박상이나 독충에 물린 상처에 자두를 갈아서 바르는 외용약으로도 사용한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