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덴버 한국일보 사장으로 있던 2009년 6월20일 한 미국인 할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내가 사는 집 근처 한인 교회 관계자에게 물어보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불쌍한, 많은 한국 어린이들의 사진을 갖고 있어요. 이 사진들을 기증하고 싶어 연락을 합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불쌍한 많은 한국 어린이 사진’이라고 해서 반한 인사들이나 한국을 음해하는 세력들이 수집한 부정적 사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이든 미국 할머니가 한국 어린이 사진이라고 한만큼 직접 받아보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다음날 덴버 아르바다에 있는 그 할머니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주소지에서 저를 맞아준 분들은 아주 곱상스러웠지만 모두 산소 호흡기를 코에 낀 할머니(제랄딘 카라식)와 할아버지(레오나드 카라식)였습니다. 특히 할아버지는 어느 정도 길게 말하기가 힘들 정도로 건강이 좋질 않았습니다.
뜻밖에도 두 분은 저에게 수백장이 들어있는 사진첩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진첩에는 6.25 참전 용사였던 카라식씨가 당시 한국 사회를 담은 비참하지만 다양한 종류의 사진이 들어 있었습니다.
카라식씨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56년이 지났습니다”며 “당시 젊고 정의감에 불탔던 23세 청년은 이제 늙고 병든 늙은이가 되었네요”라고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 청춘의 일부분을 바쳤던 한국이 오늘날 눈부시게 발전해 있는 모습을 매스컴 등을 통해 접할 때마다 무한한 기쁨과 자부심을 느낍니다”고 참전의 보람도 피력했습니다.
카라식(당시 79세)씨는 1952년 5월에 파견돼 53년 7월27일 휴전된지 3개월여 뒤인 10월까지 한국에 머물며 당시 한민족, 한반도의 비극을 실제로 체험한 인물입니다.
그가 전해준 사진들에는 참전 기간 중 자신이 직접 찍었던, 비참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었습니다. 피란 도중 다쳐 왼쪽 다리 절반이 잘려 나간 어린이, 헤진 옷차림에 철로변에 서서 기차칸의 미군들에게 구걸하고 있는 남녀 어린이들, 초등학교에 입학 전이거나 저학년 쯤 나이에도 지게를 지고 돈벌이에 나선 남자 아이.
뒷모습 뿐이어서 나이를 짐작하지 못하지만 절박한 처지가 괴력을 발휘하게 했는지 큰 장롱 두 짝을 지게에 짊어지고 가는 남자, 산비탈 혹은 개울가에 기둥을 세우고 얼기설기 엮어 지은 판잣집들, 받쳐놓은 지게 위에서 불안정한 자세임에도 단잠에 빠져든 지겟꾼,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반공 및 인민군 포로 등등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저는 이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 정부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청춘 일부분을 바쳤거나 하나뿐인 목숨까지 담보해가면서 한국 전쟁에 참가했지만 그에게 주어졌던 한국 정부(어느 정부 시절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의 “감사”의 표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라식 할아버지가 당시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유일한 감사의 표시는 “한국전에 참가한 귀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는 너무나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글귀가 인쇄돼 있는 감사장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감사장은 A4 용지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약간 빳빳한 종이에 몇마디가 인쇄돼있고 카라식씨의 이름만 손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똑같은 내용의 글을 담은 감사장을 수만장 인쇄한 뒤 해당자의 이름만 각각 써넣은 것으로, 감사장을 보는 순간 그 초라함과 무성의에 제 얼굴이 뜨거워집디다.
솔직히 우리나라 유치원 졸업장보다도 더 형편없는 외형을 갖춘 감사장 한 장이 할아버지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감사 표시의 전부더군요.
그럼에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 감사장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부끄럽고 미안했습니다. 한국인이, 한국 사회가, 한국 정부가 과연 이렇게까지 남의 도움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민족인가하는 생각에.
카라식씨가 저에게 기증한 사진속 주인공들은 살아 계신다면 저보다 나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진 속에는 여전히 소년 소녀로 남아 있습니다. 이분들을 만나 그 어린 나이에, 또 그 어려웠던 시기를 어떻게 견뎌왔는지를 들어보고 싶다는 비현실적인 생각마저 듭디다. 제가 만약 사진 속의 그 소년이었다면 인고의 세월을 과연 극복해왔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상황에서 찍힌 사진들임에도 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하나의 결론을 얻어 내게 됐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남들이 다들 놀라워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룩하게 된 단서랄까 해답일까를 찾아낸 듯도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사진 속 주인공들은 밝은 표정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는 다리 한쪽을 잃은 소년까지도 웃고 있습니다. 절망보다는 희망, 비관보다는 밝은 내일을 품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사진속 피난민 판자촌에는 개울에서 깨끗하게 빤 옷가지 등을 널어 말리고 있습니다. 무언가를 배급받기 위해 모여든 어른들은 질서있게 줄지어 서있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현실속에서도 학생들은 통학 기차를 타고 학교로 향합니다. 어제나 오늘보다는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비극이 빚어졌을 때 사진 속 우리 선배들보다 더 희망적인 몸짓을 할 나라나 민족이 과연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삶에 대한 긍정이, 내일에 대한 기대가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었을 것이라 해석해봅니다.
저는 미국 생활 20년을 끝내고 영구 귀국한지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카라식씨가 전해주었던 사진첩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우리 선조들의 저력에 놀라워하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야만성, 호전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바뀌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 한국 정치에서는 북한과 관련한 우려스런 현상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6.25 전, 남침 조짐이 이미 보였음에도 당시 한국군과 정부는 이를 무시했습니다. 심지어는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며 큰 소리치다 비참하게 당했습니다. 작금의 한국 사회 분위기가 이보다 낫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다시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봅니다. 느슨했던 대북 경계심을 바짝 조이고 그들의 도발에 강하게 대처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아울러 6.25 당시 피를 흘리며 우리를 도와주었던 나라, 개개인들에게 정말 진심어린 감사의 표시를 지금이라도 해야한다고 저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오래전에 받아 간직해왔던 카라식씨의 사진들이 우리의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는 조그만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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