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2022년 3월24일 오전 8시32분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퇴원했다. 곧이어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 묘역을 참배하고 대구 달성군에 마련된 사저에 도착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곳 사저 앞에서 짤막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국정 농단 사건’ 등으로 2017년 3월31일 구속된 이후 박 전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 선 것은 5년 만이다. 지난해 12월31일 0시를 기해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이후로는 83일 만이다.
지난해 11월22일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4개월간 지병 치료를 받아온 박 전 대통령은 최근 통원 치료가 가능할 정도로 건강 상태를 회복해 퇴원하게 됐다.>
이 일정을 접하면서 필자는 나와 박 전 대통령의 '지극히 간접적인 인연'을 되돌아 보게 됐다.
여기서 '지극히 간접적인 인연'이라고 한 것은 박 전 대통령과 직접적 교류 등은 없었으나 '같은 대한민국 국민' 정도의 관계가 아닌, 그나마 일방적이지만 나름 특별한 사연이 존재했다는 의미로 해석해주기를 바란다.
1977년 1월, 한국일보에 입사, 사회부에 발령받은 필자가 처음 취재하고 쓴 기사가 바로 박 전대통령 관련 기사였다.
사회부가 어떻게 돌아가고 분위기는 어떤지를 파악하라며 사회부에서 내근하라고 지시받았던 기자에게 1977년 3월16일 사회부 차장이 외근 취재를 지시했다.
박근혜 영애가 동대문구 용두동 경로병원 개원식에 참석하는 행사를 취재해 기사를 쓰라는 것이었다.
처음하는 취재가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박정희 대통령의 영애라는 VIP 관련 행사라는 점에서 긴장감이 일었지만 사진부 선배와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에서 내린 영애가 경로병원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영애는 이보다 앞서 서울 시민회관서 열린 ‘새마음 갖기 범국민 대회’에 참석하고 오는 길이었다. 이와 관련한 보도 자료를 기자는 이미 받아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기에 영애의 동선을 따라가며 현장 스케치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당시 현장에 타 언론사는 아무도 없었고 오로지 한국일보 뿐이었다. 기자로는 나 혼자라는 의미였다.
그러다보니 사전에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엉뚱한 취재욕이 발동했다. “직접 대면 인터뷰를 해보자”하는.
물론 어떤 내용의 인터뷰가 이루어질지 조차도 불명확했지만 즉시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당시 나는 영애가 걸어오고 있는 방향에서 왼쪽 앞에 먼저와 있었기에 빠른 걸음으로 영애 쪽으로 닥아갔다.
그러나 웬걸, 경호원들이 영애에게 접근을 허용할 리가 만무했다. 태도는 거칠지 않았지만 그들은 완강하게 나를 제지했다. 당연히 더 이상 닥아갈 수 없었다.
왼손에는 노트를, 오른손엔 볼펜을 들고 있고 옆에 카메라를 든 사람까지 있는 걸로 미루어 괴한은 아니고 언론사 취재 기자라고 판단, 그나마 그 정도 선에서 제지를 한 것같았다.
우리쪽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던 영애도 이 장면을 당연히 목격했다. 이 상황을 지켜보며 지었던 당시 영애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는다.
영애 특유의 옅은 미소는 나의 객관적 기억에 근거한다.
그러나 영애의 표정에 ‘미안한데’라는 감정도 포함된 것같다는 주관적 느낌 역시 갖게 됐다. “왠 물정모르는 신참 기자가 허용되지 않는 근접 취재를 시도하다 제지당하는 사실이 조금은 우습고 안타깝다”고 생각했기에 이같은 표정이 포함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는 순전히 나의 아전인수식, 주관적 판단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이같은 해프닝을 빚어면서 작성한 기사는 1977년 3월17일자 한국일보 7면에 게재돼있다. 또한 이 기사는 기자의 취재 스크랩북 제일 첫 머리에 철해져있다. 말하자면 기자 인생 45년 가운데 첫 데뷔작이다.
이 기사를 훓어본다.
주 제목: 새마음 갖기 汎國民 대회
부 제목: 朴槿惠양 등 參席
孝 중심사회 强調
본문: 새마음 갖기 범국민궐기대회가 16일 하오 2시 시민회관 별관에서 10개 민간단체 회원 1천5백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새마음갖기국민운동본부 주최로 열린 이날 대회에는 救國女性奉仕團 명예총재인 대통령 영애 朴槿惠양과 金致㤠 내무장관 및 10개 사회단체 대표 3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朴槿惠양은 격려사를 통해 “孝가 중심이 된 사회는 부패라는 말이 없을 것이며 남을 속이고 속고하는 불신은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오 3시20분 대회가 끝난데 이어 朴槿惠양은 서울 東大門區 龍頭洞 233의31에 신설된 경로병원 개관식에 참석, 테이프를 끊었다.
사실 영애와의 간접적 인연(나 스스로 만든 억지지만) 가운데 첫 번째는 대학 입학과 관련된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70년 성심여고를 졸업하고 그해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나도 같은 해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다. 같은 70학번이다.
박 전 대통령은 1952년 2월2일, 기자는 1950년 9월2일 각각 태어났다. 두 살 차이임에도 70학번 동기가 된 이유는 나는 8살에 초등학고에 입학한데다 재수로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아마도 박 전 대통령은 7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가 고교 졸업하던 해에 바로 대학에 입학했기에 나보다 두 살 아래임에도 70학번 동기가 된 것으로 본다.
이것만으로 박 전 대통령과의 간접적 인연 운운하는 것이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이 서강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은 많은 70학번들 사이에서 수시로 화제나 상상력의 소재가 되곤 했다.
특히 중학 시절 나와 친했던 이모군이 70년도 서강대 전체 수석 입학한 사실이 박 전 대통령과의 간접적 인연으로 삼는 이유다.
이모군은 집안이 좋을 뿐아니라 키가 크고 용모도 준수했다. 여기에 서강대에 수석 입학했으므로 영애와 특별한 사이로 발전할지도 모른다고 우리 중학 친구들끼리 입방아를 찧곤 했다.
심지어는 “이**가 부마도위(駙馬都尉. 임금의 사위)가 된다면 덕분에 우리도 폼 좀 잡을 수 있을텐데.....”하고 객적은 농담도 하곤 했다.
물론 친구 이군은 당시 영애와 어떤 사적인 인연을 전혀 맺지 않아(못해) 우리로부터 수시로 애꿎은 구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해 우리는 한때나마 보름달을 따러가려는 철모르는 어린이가 되기도 했다.
비록 그것이 현실화할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이긴 했지만 우리들로서는 그런 상상속 농담만으로도 즐겁고, 유쾌했다.
이제 이 두가지 간접적 인연도 52년, 45년 전 일이 됐다.
그 사이 기자는 언론계에 머물며 결혼해서 외아들을 낳고 길렀다. 이제는 든든한 아들, 상냥한 며느리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와 손녀를 두고 있다.
영애는 존경받는 국회의원을 거쳐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비록 뜻밖의 불행에 처하기도 했으나 그 불행이 얼마나 작위적이고 과장된 모함에서 비롯됐는지 아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다.
첫 번째 간접적 인연이 발생했을 때인 ‘불타는 청년’ 시절을 되돌아 보면 지금, 몸과 마음은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기자는 이를 노쇠했거나 의기소침해졌다고 표현하고 싶지 않다. 이는 자연스런 단순한 변화일 뿐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변화한 몸과 마음이라도 그기에 걸맞는 쓰임새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고 믿는다.
특히 박 전 대통령께 더욱 그렇다고 굳게 믿는다.
<daylightnews.kr 발행인 김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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