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6.25 참전 노병이 전해준 사진, 당시의 비극 안일함 또다시 돌아보는 계기

김인규 기자 승인 2022.09.15 17:33 의견 0

북한이 최근 핵무력 정책 법제화를 발표함에 따라 한국은 물론 미국 등 국제사회가 우려를 표명함과 동시에 북한은 결코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북한의 추가 핵실험은 국제사회의 즉각적인 대응을 부를 것이라는 점도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경고와 지적이 핵을 앞세운 북한의 대남 위협을 얼마만큼 줄여줄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여전한 북한의 호전적 태도는 한참 전, 미군 출신 할아버지가 저에게 전해준 6.25 당시의 사진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참전 미군 노병이 전해준 비참했던 당시의 사진들>

저에게 6.25 당시 사진을 전해준 카라식 할아버지 부부. 할아버지가 들고 있는 사진은 지금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 6.25참전 당시의 젊은 레오나드 카라식 본인 모습입니다.*(사진 캡쳐가 좋지 않아 화질이 흐립니다.)


저는 덴버 한국일보 사장 재직 당시 한 미국인 할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우리집에서 가까운 한인 교회 관계자에게 물어보고 당신의 전화번호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불쌍한, 많은 한국 어린이들의 사진을 갖고 있어요. 이 사진들을 기증하고 싶어 연락을 합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불쌍한 많은 한국 어린이 사진’이라고 해서 반한 인사들이나 한국을 음해하는 세력들이 수집한 부정적 사진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이든 미국 할머니가 한국 어린이 사진이라고 한만큼 직접 보고 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 다음날 덴버 아르바다에 있는 그 할머니 댁으로 찾아갔습니다.

주소지에서 저를 맞아준 분들은 아주 곱상스러웠지만 모두 산소 호흡기를 코에 낀 할머니(제랄딘 카라식)와 할아버지(레오나드 카라식)였습니다. 특히 할아버지는 어느 정도 길게 말하기가 힘들 정도로 건강이 좋질 않았습니다.

뜻밖에도 두 분은 저에게 수백장이 들어있는 사진첩을 전해 주었습니다. 사진첩에는 6.25 참전 용사였던 카라식씨가 당시 한국 사회를 담은 귀한 사진들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카라식씨는 “한국전쟁이 끝난 지도 벌써 56년이 지났다”며 “당시 젊고 정의감에 불타던 23세 청년은 이제 늙고 병든 늙은이가 되었다”고 회한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 청춘의 일부분을 바쳤던 한국이 눈부시게 발전해 있는 모습을 매스컴 등을 통해 접할 때마다 무한한 기쁨과 자부심을 느낀다”고 참전의 보람도 피력했습니다.

카라식(79)씨는 1952년 5월에 파견돼 53년 7월27일 휴전된지 3개월여 뒤인 10월까지 한국에 머물며 당시 한민족, 한반도의 비극을 실제로 체험한 인물입니다.

전쟁으로 왼쪽 다리 절반을 잃었음에도 밝은 표정을 잃지 않고 있는 소년. 이처럼 삶에 대한 긍정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재건한 저력입니다. <허락없이 이 사진의 무단배포 전재를 금합니다>

그가 전해준 수백점의 사진들에는 참전 기간 중 자신이 직접 찍었던 비참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습니다. 피란 도중 다쳐 오른쪽 다리 절반이 잘려 나간 어린이, 헤진 옷차림에 철로변에 서서 기차칸의 미군들에게 구걸하고 있는 남녀 어린이들, 열살 남짓한 나이에도 지게를 지고 돈벌이에 나선 남자 아이.

뒷모습 뿐이어서 나이를 짐작하지 못하지만 절박한 처지가 괴력을 발휘하게 했는지 큰 장롱 두 짝을 지게에 짊어지고 가는 남자, 산비탈 혹은 개울가에 기둥을 세우고 얼기설기 엮어 지은 판잣집들, 받쳐놓은 지게 위에서 불안정한 자세임에도 단잠에 빠져든 지겟꾼,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 수용돼 있던 반공 및 인민군 포로 등등의 모습이 선명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남루한 옷차림에다 동생을 업고 있어 어려운 처지라는 점을 알리고 있지만 어린 소년의 표정은 천진난만하고 맑기만 합니다.

<한국 정부가 참전 미군 노병에게 전한 유일한 감사 표시는 초라한 감사장 한 장>

저는 이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 정부에 대해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청춘 일부분을 바쳤거나 하나뿐인 목숨까지 담보해가면서 한국 전쟁에 참가했지만 그에게 주어졌던 한국 정부(어느 정부 시절인지는 밝히지 않겠습니다)의 “감사했다”는 표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라식 할아버지가 지금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유일한 감사의 표시는 “한국전에 참가한 귀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는 너무나 사무적이고 형식적인 글귀가 인쇄돼 있는 감사장 한장이었습니다. 더욱이 이 감사장은 A4 용지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의 약간 빳빳한 종이에 감사하다는 내용이 인쇄돼있고 카라식씨의 이름만 손으로 쓰여져 있었습니다.

똑같은 내용의 글을 담은 아주 형식적인 감사장을 수만장 인쇄한 뒤 해당자의 이름만 각각 써넣은 것으로, 감사장을 보는 순간 그 초라함에 제 얼굴이 뜨거워집디다. 솔직히 우리나라 유치원 졸업장보다도 더 권위가 떨어지는 외형을 갖춘 감사장 한 장이 할아버지가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감사 표시의 전부더군요.

그럼에도 이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감사장을 아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저는 부끄러웠습니다. 한국인이, 한국 사회가, 한국 정부가 과연 이렇게까지 남의 도움을 알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민족인가하는 생각에.

당시 저는 카라식씨의 사진을 기사와 함께 덴버 한국일보 제1면을 비롯해 3개면에다 특집으로 실었습니다. 기사가 나온 하루 뒤 다시 카라식씨를 찾아 특집 기사와 사진이 게재된 덴버 한국일보를 한 뭉치 전달했습니다.

카라식씨 부부는 "자칫 파묻혀 버릴 뻔했던 이 사진들이 존재 가치와 함께 의미를 부여받게 해주어 너무나 고맙다"고 울먹이며 감사해 했습니다.

저는 당시 감사의 의미를 담은 꽃과 함께 사갔던 자그마한 케이크를 카라식씨 부부와 같이 입에 넣었지만 목이 메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카라식씨 부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우리 선조들의 희생과 노력 뿐만 아니라 카라식씨 같은 참전 용사, 그리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존재했기에 번영의 토대에 올랐음을 새삼 실감했습니다.

아마도 카라식씨 부부는 연로해 저 세상으로 가셨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분들이 부디 평온하게 영면하시기를 빌어봅니다.

철로변에서 달리는 기차안 미군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하는 소년들 모습이 가슴을 짠하게 합니다. 이같은 비극은 누구때문입니까.

<사진 속 밝은 표정이 한국 재건의 원동력 아닐까>

저는 최근 카라식씨가 전해준 사진첩을 다시 꺼내들었습니다.

사진속의 주인공들은 살아 계신다면 저보다 나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진 속에는 여전히 소년 소녀로 남아 있습니다. 이분들을 만나 그 어린 나이에, 또 그 어려웠던 시기를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듭니다. 제가 만약 사진 속의 그 소년이었다면 그 인고의 세월을 과연 견뎌내 왔을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극적인 상황에서 찍은 사진들임에도 이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하나의 결론을 얻어 내게 됐습니다. 전쟁의 참화를 딛고 남들이 다들 놀라워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이룩하게 된 단서랄까 해답일까를 찾아낸 듯도 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사진 속 주인공들은 밝은 표정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는 다리 한쪽을 잃은 소년까지도 웃고 있습니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안고 있다는 뜻이지요.

피난민을 상대로 한 구제품 시장. 여자들 옷차림이 지금과 달리 한복이 대부분입니다.
비록 전쟁 중이지만 철모르는 어린이들은 놀이에 열중합니다. 널을 뛰는 소녀는 저고리를 입고 있지 않지만 즐거운 표정입니다.

피난민 판자촌에는 개울에서 깨끗하게 빤 옷가지 등을 널어 말립니다. 무언가를 배급받기 위해 모여든 어른들은 질서있게 줄지어 서있습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현실속에서도 학생들은 기차를 타고 학교로 향합니다. 어제나 오늘보다는 내일을 기다리는 마음가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똑같은 비극이 빚어 졌을 때 사진 속 우리들보다 더 희망적인 몸짓을 할 나라나 민족이 어디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처럼 삶에 대한 긍정이, 내일에 대한 기대가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었을 것이라 해석해봅니다.

무엇을 타기 위한 배급 행렬로 보입니다. 질서있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이 당시의 민도를 짐작케 합니다.

개울에서 빤 빨래를 판잣집 앞 빨래줄에 걸어 말리고 있습니다.

전쟁 중임에도 학생들은 기차를 타고 학교로 향합니다. 아마도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향학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차의 유리창은 깨어져 있는 등 당시의 어려운 상황을 아울러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지게를 짊어지고 돈벌이에 나선 소년.
엄청나게 큰 장롱 두짝을 지게에 짊어지고 운반하는 괴력의 지게꾼. 가족을 부양하고 먹고 살기 위한 현실이 믿을 수 없는 괴력을 발휘케 한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을 보면서 우리 선배들의 저력을 실감하게 되지만 또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의 야만성, 호전성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았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6.25 전, 남침 조짐이 이미 보였음에도 당시 한국군과 정부는 이를 간과 내지는 무시했습니다. 심지어는 전쟁이 일어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며 큰소리치다 비참하게 당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다시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봅니다. 느슨했던 대북 경계심을 바짝 조으고 그들의 도발에 강하게 대처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6.25 당시 피를 흘리며 우리를 도와주었던 나라, 개개인들에게 정말 진심어린 감사의 표시를 지금이라도 해야한다고 저는 주장하고 싶습니다.

흡사 헌병처럼 보이는 여자 경찰관이 교통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드럼통으로 만든 교통 정리 단상에 부산경찰서라고 쓰인 것으로 봐서 이 경찰서 소속 여경인 것같습니다.

저작권자 ⓒ 해뜸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