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가정 늘어나는 한국이 벤치마킹해야 할 부분>
한국은 오랫동안 단일 민족 국가임을 자랑해왔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우리의 운동회나 매스게임을 보곤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는 말들을 하곤 했습니다. 피부색도 그렇지만 공연자들의 머리 색깔이 하나같이 새까맣게 통일된 현상이 경이롭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로서는 당연히 받아 들였던 모두 다 새까만 머리 색깔이 외국인들에게는 상당히 특이하고 충격이었던 모양입니다.
이제는 한국에도 다문화 가정이 늘고 있습니다. 전체 인구의 10%가 다문화 가정이란 통계도 있는 걸 보면 정말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한국 사회와 외국 이민자들이 화학적으로 결합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오랫동안 단일 민족으로 살아오다 보니 피부색이 조금 다른 이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요즘 각종 매스컴에는 다문화 가정 및 2세들을 진정한 우리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컨센서스가 형성되도록 노력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다문화 가정이 더욱 늘어나게 될 한국은 인종의 용광로란 미국에서 벤치마킹해야 할 부분이 많으리라 봅니다. 특히 이민자들이 미국 사회에 기여한 부분을 보면서 우리도 유입 외국인들이 한국에 착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브라이어드,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조지 패튼 장군의 참모도 지내>
미국의 식기 디자이너 가운데 가장 성공한 이민자를 들라면 조지 브라이어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브라이어드는 현재 러시아로부터 침공을 받고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 출신이어서 더욱 눈길을 끕니다.
그는 유리, 동, 자기 등 그릇류에 금과 은 등 금속으로 화려한 그림을 그린, 독특한 영역을 개척했지만 미국에 오지 않고 고향 우크라이나에 계속 살았다면 그저 평범한 일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브라이어드는 1917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스무살 나던 해에 폴란드를 거쳐 미국 시카고로 이민을 왔습니다. 시카고시 근교 오크파크에서 친지들과 함께 생활하며 AIC(Art Institute of Chicago)를 수학, 미술학 석사(Master of Arts) 학위를 땄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전공을 살리지 않다가 2차 대전이 벌어지자 군에 뛰어듭니다. 러시아어는 물론이고 몇 개 외국어에 능통한 덕분에 최고의 야전 사령관 조지 S. 패튼 장군의 참모로 활약했습니다.
1947년 제대한 뒤 시카고 아트 스쿨에서 만나 알았던 막스 윌과 함께 뉴욕에서 식기 제조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접시 등 식기류에 금속을 칠하기 시작했고 이의 성공 가능성을 직감한 윌이 상업용 제품에 조지 브라이어드라는 이름을 넣었습니다. M Wille 컴퍼니에서 생산한 그의 제품은 그의 예명과 함께 유명세를 타기 시작, 인기리에 판매됐습니다.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작품에는 본명인 Jascha Brojdo라는 이름을 넣기도 했지만 상업용 제품에는 조지 브라이어드라는 이름만 사용했습니다. 그는 후에 윌과 헤어져 필립 스테선과 동업을 했습니다.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그릇 디자이너로 수많은 상을 탔으며 글라스웨어, 컵, 접시 등에 금과 은으로 그리는 작품이 독보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또한 세라믹 산업 발전에도 크게 기여해 2004년에는 소사이어티 오브 글라스로부터 프랭크 S 차일드 라이프타임 어치브먼트 상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의 사인이 들어있는 작품들은 니만 마커스, 보닛 텔러 등 최고급 백화점 등에 지금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2005년 7월30일 사랑하는 부인 브라냐가 지켜보는 가운데 88세로 영면했습니다.
<조지 레프튼, 가장 인기높은 수집용 그릇 회사>
레프튼사는 George Zoltan Lefton(Geo Z Lefton, Geo Zoltan Lefton, and G.Z. Lefton)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설립한 도자기 회사입니다. 그는 헝가리에서 스포츠웨어를 제작하다 1939년 미국으로 이민왔습니다.
이후 도자기에 대한 취미가 열정으로 변하면서 1941년 시카고에 Lefton Company를 설립했습니다.
레프튼사의 제품은 종종 일본색을 띄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일본 도자기에 매력을 느낀 레프튼이 2차 대전 이후 일본에서 제품을 만들어 수입해왔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전후 일본과 사업을 한 첫 번째 미국 사업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주둔국 일본에서 제작했다’(Made in Occupied Japan)고 명시된 제품은 초기 작품으로 아주 희귀합니다. 레프튼사는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 제품을 만들어 수입해왔으나 생산 단가가 올라가는 바람에 일본과의 거래를 끊었습니다.
이는 일본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등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근로자들의 임금도 가파르게 상승한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레프튼사의 도자기는 일본과의 관계를 단절한 이후에도 대량 생산품 외에 도자기에 직접 손으로 만들거나 그린 조각과 그림을 넣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레프튼사의 상품은 현재도 일상생활에 필수품으로 쓰이고 있으며 어떤 것들은 단지 소장용으로 보관되기도 합니다.
스티커에 회사 이름를 붙인 것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연륜이 있는 작품에는 제작 당시 회사명과 함께 시리얼 번호가 붙어있습니다.
George Z. Lefton는 1996년 사망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인기있던 수집용이자 식기 제조회사인 레프튼사는 창업자가 세상을 떠난 5년뒤인 2001년 60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다른 회사에 팔렸습니다.
다문화 가정의 제2, 3세대는 물론이고 1세대 외국 이민자들이 브라이어드나 레프튼처럼 한국의 각 방면에서 자기들의 꿈과 능력을 펼칠 수 있는 토양을 지금부터라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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