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앤마리 데이비슨의 동과 나무에 입힌 애나멜 작품은 추상 예술로 평가받아

김인규 기자 승인 2024.08.19 13:40 의견 0
앤마리 데이비슨
앤마리 데이비슨의 애나멜 작품. 푸른 바다에 떠있는 겨자색 원형 해초처럼 보이는 애나멜 추상작품

‘푸른 바다 위에 떠다니는 크고 작은 원형 해초들’,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은 나무와 조화를 이룬 애나멜 화’.

미국의 대표적 여류 '구리 애나멜' 예술가 앤마리 데이비슨(Annemarie Davidson)의 작품과 생애를 더듬어보면 작품의 예술성도 뛰어나지만 참으로 의지의 여인이란 느낌이 강하게 전해집니다. 전공이 인문학이었음에도 뒤늦은 나이에 '구리 애나멜' 예술에 뛰어들어 일가를 이루었으니 말입니다.

기하학적 무늬와 유기체를 결합한 독특한 그녀의 작품은 화려하지만 깊은 울림이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스크라피토(sgraffito, 표면에 칠한 도료나 플라스터 등이 굳기 전에 긁어 바탕 색깔을 드러나게 하는 기법)를 이용한 제품으로 정상에 올랐습니다. 이런 이유로 20세기 후반 가장 훌륭한 에나멜 예술가란 평을 듣습니다.

그녀는 1920년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1936년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민왔습니다.

1941년 뉴욕대에서 경제학 학사 학위를, 1942년 컬럼비아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해 화학자이자 분자생물학자인 노먼 데이비슨과 결혼했습니다. 노먼 데이비슨은 1946년 칼텍 교수이자 미생물학 분야의 선구적 과학자였습니다.

앤은 지나치게 잘 나가는 남편과 어느정도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나 노먼이 하버드에 있던 1957년부터 생소한 구리 애나멜 예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녀는 37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임에도 매사추세츠 캠브리지에서 당시 가장 저명 작가로 평가받던 도리스 홀(Doris Hall, 1907~2001)에게서 사사했습니다. 이어 1958년 시에라 마드레로 돌아온 뒤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에나멜리스트 커티스 탄과 함께 공부를 계속했고 로스앤젤레스에 본거지를 둔 에나멜 화가 메리 샤프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후 캘리포니아 시에라 마드레(Sierra Madre)에 스튜디오를 꾸미고 90세라는 고령에 이를 때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다 2012년 9월 24일 사망했습니다

앤은 생전에 에나멜의 일부가 되는 유리 파편들을 작품에 사용했고, 그녀의 작품은 독특한 자유 형태의 조각 양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크기의 구리 에나멜 판과 그릇을 생산하기도 했고, 상자나 가구의 상감으로 사용될 구리 에나멜 타일도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독특한 그녀의 작품은 '전국 최고의 선물과 가구점'에 의해 판매되었습니다.

앤마리 데이비슨의 작품은 주로 추상화 쪽이 대부분을 이루나 이것처럼 구상작품도 있습니다.
앤마리 데이비슨의 작품 뒤에 새겨져 있는 트레이드 마크
나무에 애나멜을 접목한 드문 작품

이같은 이력으로 앤은 1930~80년대에 활동한 미국 애나멜 작품의 대가들(Masters of Enameling in America, 1930~1980) 가운데 한 명으로 꼽힙니다. 2007년 1월에는 롱비치 뮤지움 오브 아트에서 작품전을 연 대표적 애나멜 작가 30명에 포함됐습니다.

그의 작품 뒤에는 골드 스티커로 ‘Annemarie Davidson handcrafted enamels Sierra Madre, California’,와 ‘AD’마크가 함께 붙어 있습니다.

그녀는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네 자녀를 키우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한국보다는 나았겠지만 1950년대 미국 역시 직업을 가진 엄마들이 자녀들을 키우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자녀들을 뒷바라지 하다보면 자신의 일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반대로 직장에 다니려면 자녀들을 방치하기가 십상이구요.

특히 미국 경우 어린이들을 혼자 집에 두면 아동 학대죄로 걸립니다. 우리가 어릴 적 배운 동요 가운데 이런 노래가 있지요. “엄마가 섬 그늘에 굴따러 가면 아가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이같은 상황이면 미국서는 영락없이 아동 학대죄로 경찰에 끌려가 조사받아야 합니다. 특히 자주 어린이를 집에 혼자 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부모로서의 자격을 의심받아 자녀를 사회 복지기관에 뺏기는 상황도 빚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미국서는 비즈니스 우먼이 어린 자녀들을 아무 걱정없이 100% 안심하고 맡긴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그녀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50, 60년대에 비하면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 할 수 있습니다.

앤의 얘기를 하다보니 한국 커리어 우먼들의 현실을 자연히 돌아보게 됩니다. 혹 앤마리 데이비슨처럼 대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많은 여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자신의 꿈을 접어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네 자녀를 키우면서도 자신의 꿈과 소질을 최대한 살려 대가로 올라선 그녀의 치열한 삶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녀의 애나멜 접시나 장신구 등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동에 새겨진 추상화로까지 평가받으며 뉴욕의 알란 로젠버그 갤러리(Alan Rosenberg Works of Art) 등에서 전시, 판매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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