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서에서 백제(百濟)에 대한 언급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송서(宋書)이다.

송서(宋書)는 남조 제나라 무제 연간인 488년에 심약(沈約 441~513)이라는 인물이 남제(南濟) 무제(武帝)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책으로 권97 열전 제57 이만(夷蠻) 편에서 백제에 대한 언급을 이렇게 시작한다.

중국 당(唐)나라의 역사가 이연수(李延壽)의 아버지인 이대사(李大師, 570~628)부터 시작하여 편찬한 수(隋)가 멸망한 618년(隋 恭帝 義寧 2년)까지 233년 동안의 역사가 기록한『북사(北史)』 「백제전」과 당나라의 영호덕분(令狐德棻 : 583년 ~ 666년) 등이 당(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칙명에 의해서 저술한『주서(周書)』49권 열전(列傳) 백제자(百濟者)에도 신라와 고구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유독 백제에 대해서만 ‘주례(酒醴)와 효찬(肴饌)이 있다’라고 기록한 것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양질의 술과 다양한 술안주가 백제에 있기 때문이고 백성들이 상음(常飮)한 까닭이다.

주례(酒醴)는 음료인 엿기름을 이용한 식혜(食醯)가 아닌 감주(甘酒)를 뜻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의『해동역사(海東繹史)』제26권 물산지(物産志) 1 에 중국 남북조시대의 『후주서(後周書)』를 인용하여‘ 백제는 토지가 낮고 습하며, 기후는 따뜻하다.

오곡(五穀)과 각종 과일, 채소 및 술, 음식, 반찬, 약재 등은 대략 중국과 같으나, 오직 낙타, 당나귀, 노새, 양, 거위, 오리 등은 없다.’라고 나온다.

백제(百濟)는 조(粟), 보리(麥), 쌀(稻) 수수(黍), 피(稷)는 술의 제조 원료로서도 이용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백제 다루왕(多婁王 재위 28~77) 6년 국남(國南)의 주와 군부터 도전(稻田)을 실시하더니 비류왕 27년연인원 322,500명이 동원되어 김제에 1,120만 여평에 달하는 최대의 저수지가 만들어진 이후, 백제 중기에는 쌀이 조(粟)를 제치고 주 곡식(主 穀食)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루왕(多婁王) 11년‘가을에 곡식이 잘 익지 않았으므로 백성이 사사로이 술 빚는 것을 금하였다’는 기록은 당시 이미 일반 민중에게 곡류로 만든 술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중국 오경의 하나인『예기(禮記)』에 ‘子曰 醴酒在室,醍酒在堂,澄酒在下, 示不淫也(자왈 , 예주재실, 제주재실, 징주재하, 시불음야)공자가 말했다.

예주(醴酒)는 실(室)에 있고, 제주(醍酒)는 당(堂)에 있으며, 징주(澄酒)는 그 아래에 있다. 백성이 맛을 탐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라고 나온다.

여기서 시(是)는 ‘밭다’에 술(酒)가 합자(合字)된 것이다. 그러므로 제주(醍酒)는 정제한 술을 의미하고, 징주(澄酒)는 ‘맑은 술’이다.

백제(百濟)의 술 주례(酒醴)는 제주(醍酒), 징주(澄酒), 감주(甘酒)로 그 전통 기법이 이어져 내려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유추해 본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祖實錄)』[태종실록(太宗實錄)]에 보면 세자가 종묘에 고하는 글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금색(禽色)의 황망함과 감주(甘酒)하고 기음(嗜音)하는 것은『하서』에 실려 있으니, 만세에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나온다.

이 말은 사냥과 여색을 좋아하고 술과 음악을 즐기는 것을 경계하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감주(甘酒)는 곧 술을 의미한다.

감주(甘酒)를 만드는 법은 『주방문(酒方文)』·『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술 만드는 법』 등에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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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만드는 법』에서는 “찹쌀 3되를 씻어놓고 누룩 2되를 물 10되에 담그는데, 봄·가을·겨울에는 미지근하게 데운 물을 쓰고 여름에는 찬물을 쓴다.

다음날 누룩 물을 체에 바치고 밥을 쪄 끓인 시루 물 3되를 부어 항아리에 넣는데 덩어리가 생기지 않도록 잘 젓는다. 더운 방에 넣고 따뜻하게 덮어두면 반나절 만에 익는데 그 맛이 꿀같이 달다.”고 하였다.

이 술은 다른 술에 비하여 찹쌀을 많이 쓰고 숙성기간이 짧은 술로, 1차 담금이 주가 되어 있는데 때로는 2차 담금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