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윤(54)씨는 무대포로 귀농했다. 딱히 어디에서 어떤 농사를 지을 것인지도 정하지 않고, 로망이던 농촌에서의 삶을 동경해 귀농을 결정했다.
서울에서 대기업들을 상대로 컴퓨터의 하드 혹은 소프트 웨어를 납품, 판매하던 소위 최첨단 비즈니스맨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제는 서울에서의 삭막한 생활을 끝내고 농촌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부인과 주변의 만류가 극심했다. 그러나 더 이상 미루다가는 평생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겠다는 생각에 무작정 강원도로 향했다.
이곳저곳 땅을 보러 다니다 우연히 영월에서 마음에 드는 경매 물건을 발견했다. 바로 입찰에 나서 경락받고 2014년 6월 영월군 중동면 화원리 231로 왔다. 주거할 집도 없어 한달 정도 텐트를 치고 살았다.
말하자면 돈키호테형 귀농인인 셈이었다.
그러나 7년이 지난 지금 그는 첫째 본인을 살리고, 둘째 주변 농가를 살리고, 셋째 농토를 살리고, 넷째 잠재적 귀농인도 살리는 큰 그림을 완성해가고 있다.
시중드는 산초 판사, 애마 로시난테도 없이 홀로 영월로 쳐들어온 돈키호테 귀농인의 얘기를 들어보자.
-소위 잘나가던 첨단 비즈니스맨이 갑자기 귀농을 결심하게 된 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원래부터 농촌 생활에 로망이 있었다. 그러다 40대 중반에 이 시기를 놓치면 평생 서울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남은 인생 2막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주변의 만류와 특히 아내의 반대를 물리치고 귀농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결단을 잘한 것같다.
-현재의 땅은 얼마를 주고 경락받았으며 집도 없었던 곳에서 어떻게 숙식을 해결했나.
*6,600만원에 경락을 받았다. 이 땅에는 집은커녕 움막도 없었기에 텐트를 치고 한달을 살았다.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캠핑하며 즐기고 있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텐트에 살다가 구입비 130만원, 운반비 200만원을 들여 가로 세로 3, 6m짜리 컨테이너를 들여놓고 안팎을 직접 손을 봐 집으로 사용했다. 그러다 약 5년전 판넬형 집을 지었다. 텐트나 컨테이너 하우스에 비하면 궁궐인 셈이다.
-그럼 귀농 직후 바로 농사를 시작했는지.
*아니 어떤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데다 돈도 벌어야겠기에 주변 농가에 날품을 팔러 다녔다.
-사무실에서만 일하던 사람이 농사일을 거들기엔 무척 힘이 들었을 텐데. 그리고 아무리 본인이 원해서였다지만 막상 농사 현장에서는 자괴감이 들지는 않았는지.
*일반인이라면 못 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농촌, 즉 자연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기에 힘들다거나 나 스스로가 부끄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1년 정도 이런 생활은 일반 직장에서의 오리엔테이션 과정이나 적응 기간이라 여겼다. 또한 일을 도와주다보면, 물론 돈은 받고 하지만 식사도 함께 하게되면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같았다. 당시 나는 이곳으로 내려올 때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돈은 갖고 오지 않았다. 이것이 귀농 초기에 단단한 적응력을 길러주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집 근처에 있는 5가구는 모두 귀농 선배들이었다. 이 분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친하게 지내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본인의 농사가 시작됐는지.
*농사에 본격 뛰어들기 전인 2015년, 영월군 농촌관광 협의회에서 사무국장을 뽑는다기에 지원, 선발됐다. 비록 최저임금을 받는 자리였지만 돈을 넘어 농촌의 삶, 환경 등을 제대로 파악하기에 아주 좋은 기회였다. 유급직은 약 4년 정도 했고 이후 지원기관으로부터 지원이 끊겼지만 나름대로 보람을 느껴 지금은 재능기부를 하고 있다. 여전히 보람을 느낀다.
-농촌관광 협의회의가 하는 일은 무엇인가.
*50여개 회원 농가가 채택하고 있는 체험 행사를 돕는 일이 주다. 즉 사과 포도, 곤충 사육, 물놀이 체험을 하러 단체 청소년들이나 가족들이 오면 회원 농가의 일손을 돕거나 해설사를 파견하는 등으로 돕고 있다. 또한 언론사 등을 상대로 홍보 업무도 하고 있다. 협의회 사무실이 있는 영월읍 태화산로 135(전화 033-375-3300)에서는 카누, 카약 사업도 함께 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로 인해 카누 카약 체험을 하지 못했지만 평소에는 한국 최고의 카누 카약 장소로 늘 체험인들로 붐볐다.
-그럼 본인이 직접 짓고 있는 농사는 없는가.
*관광협의회 사무국장을 맡은지 얼마 지나지 않은 2016년 3월 표고 버섯 농장을 처음 시작했다. 약 50평의 크지 않은 비닐 하우스를 지었다. 물론 표고 버섯을 재배하기 전 표고농장을 방문 약 두 달간 재배 노하우를 배웠다.
-이것으로 생활이 되는가
*물론 규모가 작다는 것은 잘 안다. 전업을 하려면 150여평은 되어야 하지만 나는 다른 의도를 갖고 있기에 더 이상 확장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의도란 무엇을 말하는가.
*나는 50평 온실에서 연간 약 800만원을 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 여느 농가에서나 느끼는 일이지만 농산품 가운데 상, 중품은 판매에 어려움이 없지만, ‘파지’라고 하는 하품은 팔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사과 복숭아 포도 등은 물론이고 표고 역시 하품을 판매하기 어려워 서울이나 도시에서 직거래로 돌파구를 열었다. 하품이라고는 하지만 모양만 안 좋을 뿐 맛이나 영양면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기에 값이 싼 하품은 직거래 장터에서 잘 팔린다. 표고로 시작된 직거래의 장점을 살려 다른 농산품 즉 사과 복숭아 포도 배 등의 하품을 수거해 다양한 직거래로 판로를 뚫고 계속 확대해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하품을 있는 상태대로 팔았으나 얼마전부터 즙이나 건조제품으로 가공해 연중 내내 판매를 이어가고 있다. 농가들도 아주 좋아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이 부분에서도 수익을 얻고 큰 보람도 느끼고 있다.
-또다른 사업을 하는 것도 있는지.
*재작년 10월부터 표고 버섯 하우스 옆에 갈색 거저리 사육장을 만들었다. 영어로는 밀웜이라고 하고 여기서 우리들은 ‘고소애’라고 부르는 식용 곤충을 키우고 있다.
-생소한 식용 곤충이어서 판매에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닌지.
*아직 판매가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소비량이 적지 않다. 고소애 성충을 세척 건조시켜 분말이나 기름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분말은 콩가루랑 같이 섞어서 먹기도 하도 기름은 조금씩 마시면 건강에 좋다. 당뇨 수치를 낮추고 건강이 약해진 수술 환자의 환자식으로 아주 좋다는 것은 이미 의학적으로 검증이 됐다. 특히 고소애 기름은 모 유명 종합병원에서 환자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모든 요리에 넣으면 참기름 향이랑 비슷해서 맛도 증진시킨다.
-귀농인으로서 상당히 독특한 분야에 손을 대고 있다.
*독특하다기보다 평범한 것을 비범한 상태로 변화시키려는 것뿐이다. 예를 들어 과일 종류의 하품을 직거래 장터로 판로를 개척했지만 이런 것들이 100%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재고가 남을 수 밖에 없다. 특히 하품은 상, 중품에 비해 유통기간이 짧고 잘 상하는 또다른 단점이 있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11월부터 팔다 남은 하품으로 젤리를 만들고 있다. 물론 사람이 먹어도 괜찮지만 기분상 그러므로 식용으로는 판매하지 않고 곤충 사육농가에 인기리에 팔고 있다. 국내 여러군데에서 구입 의사를 밝혀오고 있지만 생산량이 충분치 않아 수요에 다 맞추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하품 농산물의 직거래, 가공화와 젤리 제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기 위해 ‘못난이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못난이 협동조합은 앞으로 우리 주변 농가는 물론이고 영월군 나아가서는 전국의 농가로부터 하품을 대량 구입해 판매, 농민들이 모두 함께 살아가는 상생 농업을 지향하고 있다.
-곤충을 전문으로 사육하는 농가나 취미로 기르는 개인들에게 젤리 제품은 많은 사랑을 받을 것같다. 고소애 역시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소비층이 넓어질 것으로 보는지.
*이 두가지 제품은 국내도 노리지만 궁극적으로 시장이 큰 미국 등 해외로 수출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그는 직거래, 젤리 제작 등 농산물 하품의 판로를 개척한 것 외에도 이와 연결선상에서의 사업도 구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즉 젤리 제작 후에도 남는 부산물이나 고소애를 착즙하고 남은 찌꺼기 등을 버리지 않고 퇴비화하는 방법도 연구하고 있다. 이같은 퇴비 개발은 돈벌이 목적도 있지만 이를 사용할 경우 땅 힘이 되살아 나고 그 땅에서 자라는 식물 등이 건강한 먹거리가 된다는 점을 더욱 중시한다).
-귀농인들에게는 필수라는 농업 교육은 받지 않았는지.
*아니다. 교육을 많이 받았다. 몇 달씩 기숙하면서 받는 교육 대신 몇박 며칠 과정의 교육을 수시로 받았다. 춘천 미래농업기술원이나 영월의 농업기술센터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고 도움이 컸다. 귀농인들은 어떠한 이유에서든 농업 관련 교육을 가급적 많이 수료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부인은 여전히 귀농한 사실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는지.
*처음과는 달리 지금은 많이 생각이 바뀌었다. 한달에 최소 한 번 이상은 이곳에 온다. 고 3인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이곳으로 합류할까 하는 생각도 가진 것같다. 귀농에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가급적 35세 전에 귀농하라는 것이다.
(한동윤씨는 돈키호테 귀농인처럼 비쳐졌을지 모르나 이제는 햄릿처럼 고민하고 신중한 귀농인으로 변신에 성공한 것같다. 그는 귀농을 원하는 이들이 조언을 구하고 싶다면 언제든 자신에게 연락해주기 바란다며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었다. abcd6528@daum.net).
김인규 기자 kik04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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