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하루에 세 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며, 음식을 먹는 시간에 따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세 끼 사이에 간식을 먹기도 하는데, 간식은 끼니에 속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잘 안 쓰지만 "조석(朝夕, 아침과 저녁) 끼니"라는 표현이 이를 방증한다. 한마디로 정식 끼니로서의 점심은 없었고, 그 시간대에 뭘 먹는다면 간식 취급이었다. '점심(點心)'이라는 말부터가 허기가 져서 현기증 나서 가라앉은 마음[心]에 불을 붙일[點火] 정도로 간단히 먹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한 낮에는 아침이나 저녁에 먹는 것처럼 푸짐하게 먹었을 때는 점심이라 하지 않고 따로 ‘주반(晝飯)’ ‘오반(午飯)’이라고 불렀으며, ‘낮밥’이라 하여 ‘점심(點心)’과 구분했다. 궁중에서는 ‘주반(晝飯)’과 달리 ‘점심(點心)’이라고 하는 ‘낮것상’은 주로 다과나 국수로 간단히 올렸다.

조선시대에는 몸을 쓰지 않는 선비들은 죽조반(粥早飯)과 석식만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죽조반(粥早飯), 새벽조반, 자릿조반이라고 하는 죽(粥)을 먹었다.

여기서‘조반(早飯)’ 은 ‘아침 끼니를 먹기 전에 간단하게 먹는 죽이나 미음을’을 말하고, ‘조반(朝飯)’은 ‘아침 끼니로 먹는 밥’을 말한다.

1734년 영조10년 황재(黃梓, 1689~1756)가 진주사 서장관과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쓴 기행문인 '갑인연행록(甲寅燕行錄)' 1권 도강록(渡江錄)에 '동틀 무렵 자릿조반으로 죽을 먹고 출발했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선중기 문신이며 시인이었던 송강(松江) 정철 (鄭澈, 1536~1594)도 ‘속미인곡(續美人曲)’에 ‘죽조반 조석뫼 녜와 갓티 셰기난가’ 라고 했는데, 이 시구를 현대어로 하면 ‘죽조반 조석메 예와 같이 잡수시나’라는 말이 된다.

이 시(詩)를 보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죽을 먹고 아침에 아침밥을 먹고 점심은 안 먹고 저녁을 먹었다는 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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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대학자였던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84)가 명종 20년(1565)부터 선조 14년(1581)까지 약 17년간 조정에서 펼쳐진 경연(經筵)의 강연과 정계 동향 등을 일기로 엮은 경연일기 『석담일기(石潭日記)』에 보면 선조 때 영의정·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까지 지낸 이탁(李鐸, 1509~1576)은 지위가 정승에 있으나 집에서는 조석끼니를 겨우 이었다. 지방에서 보내온 선물은 반드시 친족과 이웃에 나누어 주어 부엌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 고 나온다.

청빈한 이탁은 정승에 이르렀지만 자릿조반은 고사하고 하루 아침 저녁 두끼만 먹었던 것이었다.

우리 말글 중에 ‘짬’과 ‘참’이 있다. ‘짬’은 누워서 잠시 쉬는 것을 말글로 ‘짬’이라 하고, 일하는 도중 잠시 쉬는 것을 ‘참’이라고 한다.

여기서 ‘짬’은 말글이고, ‘참’은 서글인데, ‘참’은 우두커니 설‘站(참)’에서 비롯된 말이다.

일을 하다가 도중에 잠시 짬을 내어 음식을 먹는 것을 사이참 또는 새참이라고 한다.

옛 사람들은 일을 힘든 육체적인 노동으로 해결하였다. 때문에 소모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세 번의 정식 즉 끼니 외에도 세 번의 끼니 사이에 세 번의 새참을 먹었다.

세 번의 새참은 새벽에 먹는 조식(早食), 아침과 점심 사이의 11시에 먹는 새참, 점심과 저녁 사이인 오후 4시인 포시(晡時)에 먹는 새참 이렇게 여섯 번을 먹었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