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군의 독특한 지명 유래

김인규 기자 승인 2021.09.02 15:35 의견 0

거운리(巨雲里)
천상면(川上面)지역으로 아랫말(거운분교), 중말(마을회관), 윗말(송어장 부근)로 구분되며 지금은 영월읍 거운리출장소가 있다. 옛날에는 '거탄소(居呑所)라는 천민 집단 구역이 있어서 고리짝이나 치등을 생산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거운리는 남한강 상류로 정선 조양강에서 내려오는 골뗏목으로 유명한 곳이며, 행정1개 리에 64가구 219명(1992년 기준)이 벌메, 장화동, 노가리, 만지, 마차, 길운 등지에서 담배, 옥수수, 고추, 콩 등 밭농사를 주로하고 있다.

▣ 앞여울
거운리의 용마굴 밑에 있다. 강폭이 좁고 물살이 빠른곳으로, 거운과 문산리 사람들이 청솔가지를 베어서 둑다리를 놓고 건너다니던 곳이다. 거운리 앞에 있는 여울이므로 '앞여울'이라 한다. 지금은 교각이 세워져 있다.

▣ 용마굴, 용담
거운리에 사는 정씨(丁氏)네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3일만에 시렁 위에 올라가서 병정놀이를 하는 등 보통아이와는 달랐다. 집안에서는 역적이 될 것을 두려워하여 작두로 목을 잘라도, 큰 연자방아로 눌러도 죽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기장수에게 독한 술을 3일 동안 먹이고 잠이 든 후에 겨드랑이 밑에 있는 참새 날개 만한 쭉지를 인두로 태워서 죽였다. 그 후 거운 다리 밑의 용마굴에서는 흰 백마가 나와서 만지 쪽으로 뻗은 백말등(산능성이)을 치달리며 3일 동안 울부짖다가 죽었다. 그 무덤은 강건너 섭사에 있었는데, 1936년, 1972년, 1990년의 대홍수를 겪으면서 없어졌다. 그리고 아기가수의 무덤은 성황당 터 건너편에 있는데, 지금도 장수묘라고 부르고 있다.

▣ 납작굴
비둘기굴 서남쪽에 있는 작은 굴인데 납작하게 생겼으므로 '납작굴'이라 한다.

▣ 비둘기굴
딱밭소와 용마굴 사이에 있다. 역암(礫岩)으로 된 강가의 가파른 벼랑 굴속에 산비둘기들이 많이 산다고 하여 '비둘기굴'이라 한다.

▣ 딱밭굴
서낭당 터 밑으로 거운리 남족 강가에 있다. 백 여명이 앉아 놀 수 있는 넓은 굴로 둔덕 위에 있는 밭두렁이 문종이를 만드는 닥나무밭이 있어서 '딱밭굴'이라고 한다. 그 앞에 있는 '딱밭소'에다 닥나무를 담그었다가 가마솥에 푹 삶은 다음 노끈이나 종이를 만들었다.

▣ 서낭당터
거운리 마을 입구에 있다. 1970년대 정부의 미신 타파 정책으로 불태워졌으며, 지금은 큰나무를 신목으로 모시고 있다.

▣ 덜미기
예전에 숯막이 있었던 숯검은골 좌측에 있다. 나무들이 울창하고 양지 바른 산등성으로 짐승을 잡기 위한 '덫'을 많이 놓았기 때문에 '덫메기'에서 '덜메기→덜미기'로 와전되었다.

▣ 숯검은골
선바우와 안검은 골의 남쪽에 있다. 이곳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등을 이용하여 숯을 만드는 숯가마가 있었으므로 '숯검은골'이라고 한다. 숯검은골 안쪽에도 숯장이들이 막을 치고 숯을 구어 내던 '안검은골'이 있다.

▣ 선바우(立石)
숯검은골 산능성이에 약 5m 정도의 큰 바위와 그 보다 조금 작은 바위가 있어서 '선바우'라 한다. 삼월 삼짓날(3월 3일)이나 사월 초파일(4월 8일)에 인근 마을 사람들이 이 선바우를 찾아가 '산멕이'를 하던 곳이다.
산멕이란 호환(虎患)이 극심하던 옛날에 우리의 조상들이 산의 주인이신 산신(山神, 호랑이)에게 제(祭)를 지내던 토속적인 원시신앙의 한 형태로 토테미즘(Totemism)과 무격신앙(Shamanism)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산멕이는 가족이나 집안단위로 이루어지는데, 삼베나 광복, 색동천 등의 삼멕이 금줄을 바위나 큰 나뭇가지에 걸고, 가지고 간 메와 주과포 등을 차려 놓고 집안의 안녕과 호환의 방지를 기원하는 우리의 전통적인 민간 신앙으로 '산을 모신다.'고도 한다.
지금도 어머니들이 '너는 산에 치성을 드려서 낳은 자식이니 절대로 개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이 산멕이 신앙으로 득남(得男)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옛날에 어느 장수가 이곳에서 무술 연습과 도를 닦았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 펀채
딱밭소와 납작굴 위쪽에 있다. 강가 지역으로 예전부터 무, 배추, 아욱 등을 심는 넓은 남새밭인 '펀디기(넓은 들)'이 있었으므로 '펀채'라 한다.

▣ 진구비
펀책의 남서쪽에 있다. 남한강 상류인 동강이 불어 강을 건널 수 없을 때 거운리와 문산리 사람들은 이 곳의 '진구비'와 '짜른구비'를 넘고 당목이재와 삼옥재를 지나서 영월읍내로 다녔다. 강물 옆의 길게 휘어서 굽은 언덕배기를 '긴구비, 진구비' 짧게 구비진 곳은 '짧은구비, 짜른구비'라 한다.

▣ 강달미
거운리의 서남쪽에 있다. '달'은 '산전밭'을, '미'는 '끝'을 뜻하므로 강이 내려다보이는 끝 동네로 산전(山田)을 붙여 먹고사는 마을이므로 '강달미'라고 한다.

▣ 귀두둑
강달미 마을의 귀퉁이로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다. 귀는 귀(耳)를 의마하며, 사람의 옆얼굴을 '귀두둑'이라고 한다.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 벌메(坪山)
장화동 서쪽 도장골을 지나서 있다. 남쪽으로는 안검은골과 통하며, 예전에는 7가구가 살았던 화전민 촌으로 집안에 큰 행사(결혼, 회갑)가 있을 때면 식수가 모자라 멀리 꽃밭양지에서 물을 길러다 먹었다. 이곳의 지명은 넓고 평평하게 생긴 벌판이 산(메)위에 있으므로 '벌메'라고 한다. 1970년대 화전 정리사업으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 되었다.

▣ 꽃밭양지
도장골과 두무치 사이에 있는 양지바른 들이다. 이곳에는 물맛이 좋고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어서 벌메와 두무치 사람들도 이곳의 물을 식수로 이용하였다. 이곳은 두무치 산자락이 정남향으로 자리잡은 양지로 봄이 되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붉게 물든다. 어린이와 부녀자들이 봄에 쌀가루와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붙여 먹으며, 화전(花前)놀이를 하던 곳으로 꽃이 많이 피는 양지바른 곳이므로 '꽃밭양지'라 한다.

▣ 도장골
장화동 서쪽골짜기에 있다. 옛날 산에다 불을 질러 나무를 태우고 밭을 일구어 먹던 화전민(火田民)들이 가을에 잡곡을 추수하여 보관하던 도장(창고)이 있었으므로 '도장골'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도장골이라는 지명의 마을은 모두가 깊은 산골짜기 안에 있다. 즉, '달(산)안골이→돋안골→도잔골→도장골'로 변하였다. 이곳을 지나면 북면 마차리로 갈 수 있다.
도장골 북쪽에는 화전민들이 일구어 먹던 사슬밭(여러 곳으로 나누어져 있는 밭)이 많이 있었다.

▣ 두무치(斗茂峙)
장화동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사슬골을 지나서 가는데 도장골과 꽃밭양지를 거쳐서 갈 수 도 있다.
전에는 3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으며, 지명의 유래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둠)산골 마을이므로 '둠+실→두무실→두무치'라고 불렀다.

▣ 사슬골
거운리에서 문산리로 넘어가는 절운재 좌측이 사슬골로 가는 입구이다. 산세가 험악하며, 도장골과 장화동 사람들이 이곳에서 화전(火田)을 일구었다. 화전이 한 버덩으로 붙어있지 않고 여기 저기 떨어져 있었으므로, '사슬밭'이라고 하는데, 이 골짜기에 사슬밭이 있었으므로 '사슬밭골' 또는 '사슬골'이라고 한다.

▣ 어개골
도장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은 돌서덕이 있는 큰서덕 어구에 있다 하여 '어구골→어개골'이라고 한다.

▣ 큰서덕
장화동 서쪽에 있는 넓은 벌판이다. 밭둑에 쌓아놓은 큰 돌더미(서덕)가 많이 있었으므로 '큰서덕'이라고 한다.

▣ 절운재(絶雲峙)
거운리에서 문산리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로 산세가 험악하다. 이 지방은 지대가 높고 강을 끼고 있으므로 구름이 많은데 구름이 낀 모습을 마을에서 보면 이고개가 구름에 의해서 잘라진 것과 같다고 해서 '절운재(絶雲峙)라 한다. 지금은 고개 일부에는 시멘트 포장이 되었으며 시내 버스도 다니고 있다.

▣ 장화동(長花洞)
절운재 밑으로 길게 뻗은 마을로 봄철에 들꽃이 많이 피어나므로 '장화동'이라 한다.

▣ 이앗벌(梨田坪)
당두둑과 도장골 사이에 있는 넓은 벌판이다. 에전에 큰 신배나무가 서 있었던 밭이 있었다. '이'는 배나무 '梨'자며, 밭의 고어(古語)인 '왓'이 '앗'으로 변화되고, 넓고 평평하다는 뜻인 '벌'을 취하여 '이앗벌'이라고 한다.

▣ 당두둑
장화동의 이앗벌 남쪽으로 언덕 위에 서낭당(城皇堂)이 있다. 당두둑에는 커다란 버드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맑은 샘이 솟아 거운리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당두둑의 숲 밑에는 물이 고이는 소(沼)가 있는데 예전에 어떤 무당이 이곳에서 굿을 하다가 산신령의 노여움으로 살(煞)을 맞아 소(沼)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지명의 유래는 당(堂)이 있는 둔덕이므로 '당두둑'이고 무당이 죽은 소(沼)는 '무당소'라고 한다.

▣ 소금실
당두둑 앞에 있다. 소금이 귀하던 시절 소금 장수가 이곳에 주막을 정해놓고 소금을 팔았던 마을이라 하여 '소금실'이라고 한다. '실'이란 '마을'을 뜻하는 고어이다.

▣ 호상터골
소금실 위쪽으로 절운치(絶雲峙)자락에 있다. 이곳은 산촌으로 인가(人家)가 많지 않아서 옛날에는 호랑이가 나와 가축이나 사람들을 물어갔다. '호상터골'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호랑이에게 물려간 사람의 시신을 화장(火葬)하여, 그곳에다가 돌을 쌓고 시루를 엎어놓아 '호식총'을 만들었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 배양거리
소금실과 호상터골의 남쪽에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여러 가구가 살았으며 남쪽으로 향한 양지 바른 마을이므로 '배양거리'라 한다.

▣ 쉼맛들
거운 송어장 앞에 있는 넓은 들이다. 이앗벌이나 배양거리 등에서 일을 하다가 쉬는 시간에 이곳에 있는 큰 소태나무 아래에 모여서 참을 먹었기 때문에 '쉼맛들'이라고 한다.

▣ 거운리 송어장
윗말에 있으며 수온 13℃의 차디찬 물과 수량이 풍부하여 송어를 기르고 있다. 거운천(巨雲川)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 곳집거리
마을회관 북쪽인 중말에 있다. 장사 때 사용하는 상여를 보관하는 집이 있는 곳이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귀신소리가 들리고 도깨비불이 보인다는 노인들의 얘기 때문에 어린이들은 이곳을 지나는 것을 꺼려하였다. 1995년 2월 1일(음력)에는 마을 돈으로 꽃상여를 구입하여, 돼지를 잡고 마을잔치를 한 후 곳집에다 안치하였다.

▣ 노가리(路街里)
중말의 마을회관 뒤쪽을 말한다. 거운리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큰 느티나무와 감나무가 있는 정남향의 따뜻한 곳이다. 마을 앞산이 곡식을 쌓아 놓은 가리처럼 생겼으므로 '노가리'라고 한다. 이곳에서 느릅재를 넘으면 작은마차와 큰마차로 갈 수 있다.

▣ 진밭들(長田坪)
거운리의 아랫마을과 윗말 사이에 있다. 밭 이랑이 길게 뻗어져 있고 사래가 긴 밭이 있어서 긴밭들인데 '긴'이 '진'으로 변하여 '진밭들'이라 한다.

▣ 꽃절굴(花折窟)
곳집거리의 동북쪽인 잣바우산 밑에 있다. 양지 바른 잣바우산의 산자락으로 봄이 되면 진달래와 철쭉꽃이 산 전체를 붉게 물들인다. 마을 어린이들은 참꽃(진달래)밭에 가면 문둥이가 잡아먹는다는 노인들의 이야기 때문에 참꽃을 꺾은다음 이곳 굴 앞에 와서 여럿이 함께 먹었다. 꽃을 꺾어 먹던 굴이므로 '꽃절굴(花折窟)'이라 한다.

▣ 잣바우산
거운리에서는 가장 높은 산으로 마을 건너편에 있으므로 안산(案山)에 해당한다. 산세가 험하며 문산리(文山里)의 굇들과 둔전(屯田)으로 넘어갈 수 있다. 천지 개벽 때 이 산 만은 잣송이만큼 남고 마을 전체는 물에 잠겼다는 전설이 전해지므로 '잣바우산'이라 한다.

▣ 토끼들
아랫말 동북쪽에 있다. 밭 두둑에 토끼가 잘 먹는 수애풀(꺾으면 흰색의 진이 나오고 맛이 쓰다)이 많으므로 '토끼들'이라 한다.

▣ 앞 골
아랫말 건너편 골짜기이다. 아랫말 앞에 있으므로 '앞골'이라고 하며 이 골짜기의 산을 넘으면 중말 앞에 있는 '본골'로 간다. 지금은 한 가구가 살고 있다.

▣ 느릅재
본골과 작은마차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거운리 사람들이 본골을 지나고 이 느릅재를 넘어서 마차와 문산리의 팔운(八雲)으로 다녔다. 이 고개의 중턱에는 활엽수로 여름에 둥근 꽃을 피우는 느릅나무가 많아서 '느릅재'라고 한다.

▣ 마차(磨磋)
거운리의 본동(本洞)인 중말에서 느릅재를 넘으면 작은마차와 큰마차가 있다. 이곳은 옛날 연자매, 맷돌 등 돌로 된 물건들을 만들었던 곳이므로 '마차(磨磋)'라는 지명이 생겼다.
현재 삼옥리(三玉里) 먹골의 평창 이씨 열녀각 앞에 남아 있는 연자매와 섭사에서 4H 표시판으로 사용되는 연자매도 이곳에서 만들었다. 또한 큰마차에서 강을 건너고 노루목재를 넘으면 문산리(文山里)의 팔운으로 갈 수 있으며, 큰마차에는 인가(人家)가 없고, 작은마차에는 5가구가 살고 있다.

▣ 조청도굴
거운리 동남쪽인 섭사 건너편 언덕 위에 있는 굴이다. 길이는 50m정도, 입구는 30°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내부로 들어가면 3개의 굴로 나누어진다. 동굴 중간에는 물과 종유석이 있으며, 예전에 난리가 나면 이곳에서 피난을 하였다고 한다. 박쥐와 같은 새들이 많았으므로 '조청도굴'이라 한다.

▣ 만지(滿池)
마차(磨磋) 동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로 현재 3가구가 살고 있다. 그 지명이 '가득찰 滿', 못 池'로서 언제인가는 이 마을 전체가 연못에 될 것이라고 내다 본 예언성지명(豫言性地名)이다.
1972년과 1990년에 영월 지방에 큰 홍수 피해가 있었다. 이때, 충주 댐만으로는 홍수조절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판단한 정부에서는 오는 2000년까지 높이 98m, 길이 18m, 저수용량 6억 5만톤 규모의 댐을 백룡동굴(천연기념물 260호) 10km 하류인 만지(滿池)에다 건설할 것을 결정했다. 수자원 공사의 타당성 조사가 끝났으며, 정선 주민들의 반대도 있지만 댐이 완성될 경우 이 마을은 수몰되어 물이 가득찬 연못(滿池)이 될 것이다. 맑은 물과 깎아지른 어라연(魚羅淵) 절벽의 노송사이에는 고기들이 놀고, 사시사철 푸르름을 자랑하는 심산계곡인 어선골(魚船谷)도 남한강의 푸른 물길에 잠겨서 그 위로는 고깃배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다.
섭사(涉砂) 또한 댐공사로 많은 모랫더미가 쌓일 것이니 먼 훗날을 예견하고 지명(地名)을 만든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감탄할 뿐이다.

▣ 만지 나루터
만지에서 길운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이다. 지금도 만지나루터에는 뗏꾼들을 상대로 술장사를 했다는 전산옥의 집터와 돌담이 그대로 남아있다. 정선 조양강에서 내려오는 골뗏꾼들을 상대로 주막집을 운영하던 그의 집은 1936년 병자년 가력으로 떠내려갔다. 지금 그가 살던 집터는 무성한 잡초와 흩어진 돌담만이 뒹굴고 있다.

▣ 너벨
거운리 동쪽인 어라연(魚羅淵)에 있다. 산 너머 마을이라는 뜻이 '너머→너메→너벨'로 변했으며 일설에는 어라연의 고여 있는 물을 뜻하는 '느뱅이'가 '너벨'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1가구가 살고 있다.

▣ 된꼬까리
정선읍 가수리를 지나 영월읍 거운리(巨雲里)의 어라연 밑에 있다. 물살이 거칠고 굽이가 심하다. 1950년대는 정선에서 베어낸 통나무로 만든 뗏목이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조양강(朝陽江)과 영월의 동강으로 이어졌다. 뗏목이 정선을 출발하여 한양에 도착하기까지는 황새여울, 된꼬까리, 둥굴바위, 범여울, 군관여울 등의 험한 뱃길이 있지만 그 중에도 이곳 여울목은 굽이가 심하여, 수많은 뗏목들이 뒤로 꼬꾸라질 정도로 심하게 꼬부라진(굽은) 여울목이므로 '된꼬까리'라는 지명(地名)이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 뗏꾼들이 부르던 노래 가사가 지금도 거운과 문산리 지방에는 전해지고 있다.

눈물로 사귄정은 오래도록 가지만
금전으로 사귄 정은 잠시 잠깐이라네
돈 쓰던 사람이 돈 떨어지니
구시월 막바지에 서리맞은 국화라
놀다 가세요 자다 가세요
그믐 초승달이 뜨도록 놀다가세요
황새여울 된꼬까리에 떼를 띄어 놓았네
만지산의 全山玉이야 술상 차려 놓게나

이 노랫가락에 나오는 전산옥은 실재의 인물인데, 만지(滿池)에서 떼꾼들을 상대로 술을 팔던 들병장수로 특히 아라리를 잘 불러서 그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지금도 만지나루터에는 전산옥이 살던 집터가 있다.

▣ 어라연(魚羅淵)
거운리(巨雲里) 동쪽인 만지나루터 위에 있다. 옥순봉(玉筍峰)을 중심으로 세 개의 봉우리 (三仙岩)가 푸른 물 속에 진주처럼 틀어박혀 있고 기암절벽 사이로 솟아난 소나무들은 계곡의 맑은 물소리와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수목화를 감상하는 느낌마저 주는 곳이다.
옛날 이곳에 어라사(於羅寺)라는 절이 있었으므로 '어라연'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지금도 그곳을 절터라고 하는데 근래에는 수운암(水雲庵)이 있었다. 영월에서 약 35리 정도의 거리로 길이 험하고 고기가 많으며 여름철에는 넓게 펼쳐진 백사장과 강 가운데 있는 커다란 너럭바위를 찾는 천렵꾼들이 많다.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기록되어 있다.

어라사연은 영월군의 동쪽 거산리에 있다. 세종 13년에
이곳에 큰 뱀이 있었는데, 어떤 때는 연못에서 뛰어 놀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물가를 꿈틀거리며 기어다니기도 하였다.

하루는 물 가의 돌 무더기 위에 허물을 벗어놓았는데
그 길이가 수십 척이고 비늘은 동전 만하고 두 귀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비늘을 주워 조정에 보고하였으므로
나라에서는 권극화(權克和)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극화가 연못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니 폭풍(暴風)이
갑자기 일어나면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그 후부터는 뱀도 또한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원지명은 於羅淵이었으나 후에 魚羅淵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 길운(吉雲)
만지(滿池)나루터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거운리의 동남쪽으로 이 마을에 있는 앞구봉의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끼면 비가 온다고 한다. 비가 오면 그 해 농사는 풍년이 들었으므로 '길운(吉雲)'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다. 길운은 땅이 기름지고 농사가 잘되는 곳으로, 앞구봉 꼭대기에는 샘이 솟아나는 큰 동굴이 있는데 일제 시대 때 공출을 피하기 위해 이 굴속에다 베틀을 설치하고 몰래 베를 짰는데, 얼마 전까지도 그곳에는 베틀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길운 뒤쪽 묵정밭에는 낙엽송이 가득하고 뱀이 많이 서식하는 돌서덕골을 지나면 가정리로 질러가는 길이 있다.

▣ 아창골
만지나루터 건너편으로 길운과 팔운 사이에 있다. 예전에 어린이들이 죽으면 이곳에다 묻고 돌을 쌓아서 짐승의 먹이가 되자 않게 하였던 애창터가 있었던 곳이므로 '애창골, 아창골'이라고 부른다.

▣ 팔운(八雲)
어라연 건너편으로 산멕이굿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팔운약수 위에는 큰 돌탑과 함께 세종 임금 때 있었던 어라사(魚羅寺)라는 절터가 있다. 길운에서 아창골을 지나 팔운으로 가는 길이 벼랑사이로 나 있는데, 얼마 전만해도 4가구가 만 여평의 토지를 부치면서 살았으나 지금은 폐촌이 되었다. 거운과 문산리는 남한강 상류지역으로 물이 많고 산이 높아 안개와 구름이 많이 끼는 지역이다. 이러한 자연적 여건때문에 운(雲)자와 관련된 절운재, 길운, 무운, 옆굴운, 달운, 뉘운, 거운, 팔운의 여덟 곳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끝 쪽으로 여덟 번 째에 있는 마을이므로 '팔운'이라 하였다고 한다.

<출처=영월 문화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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