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동양 도자기에 반한 유럽(서양의 유리 문명과 동양의 도자기 문화2)

김인규 기자 승인 2022.08.15 16:09 | 최종 수정 2022.08.17 09:57 의견 0
덴마크 로얄 코펜하겐
독일 마이센
헝가리 헤렌드

유리로 인해 문명을 한껏 발달시켜온 서양인들이지만 14세기까지 그들은 동양의 도자기를 제대로 접해 보지 못했습니다.

서양에 중국 도자기를 처음 소개한 사람은 마르코 폴로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베니스 상인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갖고 들어간 도자기는 너무 소량이어서 이탈리아 왕가나 일부 귀족에게만 선보여 졌습니다.

중국 도자기가 선물용으로 이용된 문헌상 첫 기록은 이집트 왕이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로렌조 데 메디치가에 보낸 15세기 말이 처음입니다.
중국 도자기가 그나마 서양 사회에 어느 정도 선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세기입니다. 당시 스페인과 신세계 탐험에 쌍벽을 이루던 포르투갈이 1517년 케이프 타운을 돌아가는 새로운 해상 루트를 개발한 뒤 중국 광주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1557년이 돼서야 겨우 마카오를 통해 교역할 수 있다는 중국 왕조의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나마 학자 및 제수이트교단 성직자들과 함께 일년에 두 차례만 마카오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중국 도자기가 유럽에 소개되는 아주 미미한 시작이었습니다. 중국과의 교역에 나섰지만 포르투갈은 도자기의 잠재적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에 이어 해상 무역 주도권 쟁탈에 나섰던 화란은 17세기 초엽 포르투갈 무장 상선 Carrack을 두 척 나포했습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해적질을 했습니다. 한 척은 1602년 세인트 헬레나에서, 또 다른 한 척은 1603년 조호르에서.

그 배에는 주력 품목으로 차, 실크, 향신료가 가득 실려 있었습니다. 당시는 국제 해양법도 없었을 뿐아니라 힘있는 자가 다른 나라 배를 노략질하면 처벌받기는 커녕 자국 왕들로부터 칭찬과 함께 작위를 받을 때 였습니다.
포르투갈 상선을 나포한 화란은 배에 실려있던 화물을 암스텔담으로 옮겨 경매에 부쳤습니다. 그러나 주력 상품이던 차나 실크, 향신료 보다 오히려 차를 담고 있던 중국 도자기가 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청자, 백자로 만들어진 차 단지, 즉 도자기는 포르투갈 무장 상선 Carrack의 이름을 따 'Kraak Porcelein'으로 불려졌습니다.

<서구인들 동양 도자기의 예술성에 매료돼>

화란은 이 도자기의 잠재적 시장성을 간파하고 델프트에 도자기 가마를 짓고 급하게 모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 도자기를 유럽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든 나라는 바로 화란입니다.
암스텔담 항을 통해 퍼져나간 중국 도자기는 유럽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고 우아하고 고귀한 그릇이 있다니”. 당시 유럽인들은 동양 도자리를 '하얀 황금'이라고 칭송했습니다.
화란에 이어 모든 유럽 국가들이 도자기 모방에 나섰지만 ‘며느리도 모르는’ 비법 때문에 번번히 실패할 수 밖에 없었죠. 당시 중국은 북쪽 국경의 분쟁 때문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켜야 했고 그 비용 마련에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중국 왕실에 돈을 대주고 도자기를 수입하거나 제조 기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중국 도자기는 대략 세 종류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왕가 진상품이 최상품, 국내 판매용이 중품, 차 단지 등 외국 무역품이 최하 등급이었습니다. 처음 마주한 도자기가 최하품임에도 유럽인들이 놀라 넘어질 정도였으니 그 품질은 가히 짐작할 만합니다.
오늘날 도자기 그릇으로 최고급을 자부하는 ‘본차이나 도자기’의 나라 영국은 의외로 한참 늦게 도자기 산업에 뛰어들 수 있었습니다.
화란 동인도 회사의 성공을 지켜보며 속을 끓이던 영국은 1683년 아모이와 마카오에 전진기지를 마련합니다. 이어 1699년 중국 황제가 외국인과의 통상을 완화하는 조례를 발표하자 광동항으로 서둘러 들어갔습니다.

후발 주자임에도 영국은 무서운 저력을 발휘합니다. 영국도 다른 유럽 국가들처럼 초창기엔 왕실이나 귀족 등에게만 도자기를 공급했습니다. 이런 환경 때문에 영국 도자기 회사 이름은 로얄 달튼, 로얄 알버트, 로얄 스트레포드 등 로얄이란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1720년 경에는 영국 무역선 선장들이 중국 도자기 기술자들에게 바로 제작을 의뢰하고 영국내 개인 고객들로부터도 주문을 받으면서 대중화가 이루어집니다.
영국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섬에 따라 중국 도자기는 18세기부터 세계화하기 시작합니다. 자국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식민지로 도자기를 수출했기 때문이지요. 1765년까지 껍질이 단단하고 반짝이는 하드 패이스트 도자기를 생산하지 못하다가 스트레포드셔 석탄 광산에서 도자기 생산에 적절한 붉은 점토를 발견하면서부터 전기를 맞게 됩니다.
이 지역에 도자기 제조회사들이 앞다투어 들어서기 시작했고 동인도 제도 회사가 스트레포드셔에 있는 조시아 웨지우드사에 원료와 샘플을 대량 갖고 들어오면서 영국 도자기는 도약합니다.

영국은 동시에 중국 도자기 완제품도 꾸준히 수입, 1773년에 24만점을 들여왔고 1774년에는 도자기 수입상이 런던에만도 52개가 등록됐습니다. 1790년 광동항에 정박한 도자기 수입 선박 56척 가운데 영국 선적이 46개에 달할 정도가 됐습니다. 이후 유럽의 도자기 산업은 완전히 영국이 쥡니다.

한때 독일도 만만찮은 저력을 발휘, 오히려 영국보다 훨씬 앞서 달렸습니다. 중국 도자기에 매료된 화학자 요한 프레드리히 보트거가 1709년 마이센(Meissen)에서 유럽 국가로는 처음으로 하드 패이스트 도자기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독일 동부 작센주 드레스덴에서 약 30㎞ 떨어진 소도시 마이센에서 도자기 원료인 질좋은 고령토 광산을 찾아냈습니다. 이것으로 제작한 도자기는 하얀 바탕에 푸른색 문양이 들어가 있고 일부 마니아들은 이를 유럽 최고품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

마이센 도자기는 1710년 라이프찌히에서 첫 선을 보였고 1712/3년 유럽 시장을 휩쓸기 시작했습니다. 마이센 도자기는 이후 50년간 유럽을 지배했습니다. 보트거가 죽은 1719년만해도 기술자는 20명에 불과했으나 18세기 말에는 500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후 영국의 기세에 눌렸습니다. 영국은 자국 뿐 아니라 미국, 캐나다 등 식민지로 시장을 넓혀간 반면 독일은 좁은 국내 및 유럽 시장에만 머무르는 바람에 경쟁력에서 뒤쳐졌습니다.

새로운 기술을 먼저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큰 시장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것이야 말로 비즈니스의 성공 여부가 달렸음을 알려주는 또다른 대목이기도 합니다.

<후발주자 미국, 질박한 토기(천, Churn) 만들다 이제는 세계 최고급 레녹스 생산>

미국 Churn

미국은 당초 영국에서 가져온 도자기를 사용해 왔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전쟁을 치르고 독립한 뒤에는 한동안 도자기 수입길이 막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자체 생산에 나설 수 밖에 없었겠지요. 미국으로 건너오기 전 대륙에서 어깨 넘어로 도자기 만드는 것을 보았던 소수 이민자들이 직접 뛰어들었으나 당연히 고급스런 제품은 만들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앤틱 쇼에 가끔 나타나 사랑을 받는 도자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천(churn)이라 불리는, 버터를 만드는 통이나 과거 농장에서 우유를 운반하던 용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인들은 질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천’을 무척 사랑합니다. 질박한 모습이 묘한 매력을 끄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게 아름답지는 않지만 우리네 막사발같은 이미지라고나 할까요.
그러다 1889년 월트 스코트 레녹스와 조나단 콕스가 뉴저지 트렌튼에 공동으로 만든 회사가 미국 도자기 산업의 대표주자로 나섭니다. 서로 뜻이 맞지 않아 1906년 레녹스는 독립해 나와 레녹스사를 세웁니다. 이 회사는 비록 2005년 'Department 56'에 팔렸지만 현재까지도 제품만은 미국과 전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인들은 레녹스가 세계 최상급 제품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유럽 도자기는 역사가 겨우 400여년에 불과합니다. 반면 동양의 도자기는 수천년이 넘습니다. 동양 도자기의 카피본에 불과했던 유럽 도자기의 약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동양 도자기를 베끼기 시작했던 유럽은 이제 자체 기술과 디자인 등을 개발, 나름대로 '자기네 것이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양과 달리 유럽 도자기 회사들은 아주 다양한 형태의 예술품을 개발, 제조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 일본의 도자기는 거의 그릇류에 한정돼 있습니다. 감탄하며 모방하기에도 급급했던 유럽은 그릇류에선 이제 중국 도자기보다 더 고급으로 대접받고 있습니다. 우리만 해도 결혼을 앞둔 신혼 부부들이 사고 싶어하는 도자기 그릇은 영국제가 가장 우선순위로 꼽히고 있지 않습니까. 영국 등 유럽국가들은 도자기의 용도도 다양하게 확장했습니다. 단순한 그릇에 그치지 않고 꽃, 새, 동물, 인간의 형상까지 만들어 신규 수요를 창출해왔습니다.

프랑스 특유의 화려한 색깔의 남녀 상, 너무나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정을 갖고 있는 스페인의 야드로. 기묘한 용도로 만들어진 자기 용품들. 정말 찬탄이 절로 흘러나오게 하는 예술품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과연 한국, 일본은 물론 도자기의 종주국이라는 중국의 장인들까지 야드로같은 예술작품을 제작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물론 고려청자, 이조백자, 중국의 옛 도자기 등은 그 예술성과 가치 면에서 유럽 도자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자기의 종류와 활용성 면에서는 이제 동양이 뒤지고 있는 형국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앤틱 쇼나 매장에 등장해있는 미국 레녹스, 영국 웨지우드, 프랑스 세브르, 스페인 야드로, 독일 마이센, 헝가리 헤렌드, 덴마크 로얄 코펜하겐 등 유럽계 도자기들을 보면 청출어람(쪽에서 나온 푸른 색이 쪽빛보다 더 푸르다)이란 고사성어가 자주 떠오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동서양의 창조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지난 20세기 동안 동양은 서양에 비해 창조적 발상에 대해서만큼은 뒤졌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것같습니다. 21세기인 현재는 물론이고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한국의 자라나는 새 삯들이 창조적 인물들로 거듭나기를 기대하고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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