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어린 자녀에게 앤틱 교육시키는 미국 부모들 많아

김인규 기자 승인 2022.08.18 18:18 의견 0

<반세기 전 한국 어머니들은 모두 원더 우먼>

제가 초등학교 다녔을 당시만 해도 늦가을이면 우리네 어머니들은 걱정이 태산같았습니다.

김장과 놋그릇 닦을 일로요. 요즘 웬만한 세대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를겁니다.

지금은 한 겨울에도 반찬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슈퍼마켓에 가서 반찬 꺼리를 사다가 요리하거나 완제품은 그냥 상 위에 차려놓기만 해도 되니까요.

예전에는 슈퍼마켓도 없었을 뿐더러 시장에 가봐야 한겨울에 반찬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러니 한 겨울 내내 온 가족이 먹어야 할 반찬으로 김장을 해야 했습니다. 저희는 부모님과 외할머니, 형제 여섯인데다 가끔 외가인 포항에서 친척들이 자주 오시고 해서 김장용 배추를 대략 두 접 이상은 준비해야 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접’이란 단위를 잘 모를 겁니다. 한 접은 배추 100포기이므로 두 접은 200포기를 말합니다.

200포기의 배추를 다듬고 소금물에 저리는 것만도 얼마나 힘이 들지 상상이 됩니까. 게다가 김장독 몇 개를 깨끗이 씻는 것은 물론이고 독을 파묻을 수 있도록 마당을 파야합니다. 마당을 왜 파야 하는지도 우리 세대는 당연히 알겠지만 젊은이들은 잘 모를 거란 생각이 드네요. 예전에는 딤채도 냉장고도 없었습니다. 김치를 상온에 보관하면 얼마 뒤 시어져 한 겨울 내내 먹을 수가 없습니다. 마당을 파서 김치독을 묻어 놓으면 겨울 동안 적당하게 익은 김치를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들이 하루 정도 지나면 다음날은 본격적으로 김장에 들어갑니다. 배추 김치에다 동치미까지 만들다 보면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하루가 후딱 지나갑니다.

김장을 아버지들은 대체로 도와주지 않습니다. 설사 일요일에 김장을 하더라도 옛 아버지들은 이런 일 돕는 게 "남자가 쫌스럽게 여편네 일이나 거든다"는 평판이 두려워 외곽으로 빙빙 도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늦장가를 드신 제 아버지는 열두살이나 밑인 어머니가 안쓰럽게 여겨져서인지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일손을 많이 거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으로부터 ‘자상하다’는 평가를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자상하다는 본래 의미 외에 약간은 빈정거리는 의미를 내포시킨 이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김장에 이어 늦가을 어머니들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던 또 하나의 숙제는 놋그릇 닦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여름과 겨울의 음식 그릇이 달랐습니다. 여름에는 밥 그릇은 물론이고 반찬 등 음식을 모두 사기 그릇에 담았습니다. 반면 겨울은 모두 놋 그릇을 사용했습니다. 놋 그릇은 싼 것도 있지만 방짜 유기라 불리는 고급도 있었습니다. 사기 그릇과 놋 그릇은 일년 주기로 사용된 셈입니다.

사기 그릇은 일년 뒤 다시 내어 사용하더라도 별 문제가 없습니다. 한번 정도 씻으면 깨끗해지니까요. 그런데 놋 그릇은 그게 아닙니다. 깊숙이 넣어 두었다가 다시 사용하려고 내어 놓으면 때가 많이 끼어 있습니다. 요즘처럼 세척, 광택제도 없었던 만큼 기왓장을 아주 곱게 빻은 가루로 놋 그릇을 닦습니다.

김장 때와는 달리 놋그릇을 닦을 때는 애들도 제법 일손을 돕습니다. 그러나 애들은 진득하게 일을 하지 않지요. 딱지 따먹기, 구슬치기를 하자는 동네 개구장이들의 유혹이 있으면 총알같이 달아나므로 어머니들에게 별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김장이나 놋그릇 닦기가 끝나면 어머니들은 보통 며칠간 심하게 몸살을 앓습니다. 몸살을 앓는다고 해도 쉴 형편은 못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해야할 일이 산더미처럼 닥아오니까요. 세탁기 없이 빨래를 해야 하고, 전기 밥솥없이 밥하고, 아궁이에 불때고. 그러면서 ‘소도 먹였으니’(우리집엔 소는 없었습니다만).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 어머니들은 모두가 ‘원더 우먼’들이었던 같습니다.


미국에서 금속 제품 앤틱을 수집해오고 나서 집에서 이를 손질할 때면 가끔 어릴적 놋그릇 닦던 어머니가 생각나곤 합니다. 어머니 혼자서 그 많은 놋그릇을 닦을 때 진득이 도와드리지 못하고 눈치보다 동네 친구들에게 달려 갔던 철부지 시절과 함께 말입니다.

<알루미늄, 스탠식기, 놋그릇 닦는 수고 덜어주며 한국 주방 점령>

그러다 1950년대 말 혹은 그보다 조금 더 뒤 등장한 알루미늄과 스텐레스 스틸 식기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매년 가을 놋그릇 닦기로 인한 고단한 노동과 몸살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탓이었겠지요. 아마도 대한민국 가정의 거의 100%가 스탠 식기로 교체하고 놋그릇은 골방에 처넣거나 버렸을 겁니다.

지금도 저는 아주 무거운 금속 그릇 한 박스를 갖고 있습니다. 결혼한 이후 몇차례 이사다닐 때마다 이 박스를 계속 옮기느라 여간 힘드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그릇을 사용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용도 하지 못하면서 이것을 움켜쥐고 다니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속은 방짜 유기고 겉은 스텐레스 스틸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예전 스텐레스 스틸 식기가 유행할 시절, 저희 어머니는 유기 그릇 닦는데 질렸다며 돈을 주고 겉에다 스텐레스 스틸을 입혔습니다. 그것을 물려받아 갖고 다니는 거지요. 요즘은 유기 그릇에 스텐을 입히거나 반대로 겉을 벗기는 ‘고도의 기술’을 가진 업체는 없는 것같습디다.

왜냐하면 제가 겉의 스텐을 벗겨내고 속에 있는 방짜 유기그릇을 사용하고 싶어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그런 회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 제가 가진 그릇의 겉을 벗겨낼 수 있는 회사를 아시는 분이 있으시면 꼭 좀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이 그릇을 볼 때마다 “대체 어머니는 값어치가 한참 더 떨어질 일을 왜 돈까지 들여가며 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은 속도 상합니다. 그러나 늦가을마다 그릇 닦는 일이 오죽 힘들었으면 그렇게 하셨을까 하고 이해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희의 골치 덩어리 ‘겉 희고 속 노란 혼혈’ 유기는 아마도 현 상태로는 그렇게 귀중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스텐 겉껍질을 고스란히 벗겨낸다면 귀중한 골동품 방짜 유기로 대접받을 수 있을 걸로 기대합니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우아한 백조’로 단숨에 변신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죠.

저희 어머니도 그렇지만 옛 어른들은 우리 것의 귀중함에 대해 제대로 몰랐던 것같습니다. 물론 저 역시도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우둔한 인간입니다. 저희 외할머니가 시집오셨을 때 혼수품으로 갖고 오셨던, 오동나무 장롱을 엿장수에게 팔 때 울릉도 호박엿에 눈이 어두워 신나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물론 철딱서니 없던 어린 시절 얘기입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까맣게 윤기돌던 오동나무에 백통 장식이 다양하고 화려하게 수놓여진 그 앙증맞았던 오동나무 장롱은 최상의 예술 공예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것의 소중함을 몰라 저질렀던 어리석음>

고교생 때 다락방에 있던 약장가사(藥章歌詞)란 고서를 제대로 간직하지 않아 나중에 찾지못한 뼈아픈 실수도 생각납니다. 이 고서는 아마도 우리나라의 유명한 옛 시가집 악장가사(樂章歌詞)의 형식을 빌어 어떤 병에 어떤 약을 써야 한다는, 가사(歌詞) 형식의 한방 처방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비슷한 고서 얘기만 나오면 아쉬움이 커집니다. 혹 그것이 허준 선생의 동의보감만큼 귀중한 의서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더욱 가슴이 아립니다.

재수생 시절에는 집에서 기르던 닭에게 아무 생각없이 고색창연한 청동 주전자로 물을 주곤 했습니다. “이 주전자는 심상찮아 보인다”고 생각은 했지만 크기에 비해 너무 무겁고 용량이 작아 물을 자주 채워야하는 불편함 때문에 구박을 많이 했습니다. 몇 년 후 뒤늦게 그 청동 주전자가 귀한 것같아 부랴부랴 다시 찾았을 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습니다.

제가 가장 아쉽게 여겼던 이들 3가지 외에도 크고 작은 신기한 물건들이 꽤나 있었지만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전혀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저희 집은 그렇게 뼈대있는, 그렇다고 전혀 근본없는 집안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소장내지는 평가받을 수 있는 골동품 즉 앤틱을 꽤나 갖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저희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유서깊은 집안은 상당히 많은 귀중품을 갖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인식 부족으로 아무 생각없이 훼손하거나 버리는 경우가 없으란 법이 없겠지요. 안타깝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국 앤틱 쇼에서 열리는 어린이 대상 앤틱 설명회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앤틱 쇼장에 가면 부모의 손을 잡고 앤틱에 흥미를 보이는 어린이들과 종종 마주칩니다. 어떤 앤틱 쇼장엔 어린이들만을 위한 앤틱 강좌, 설명회가 열리기도 합니다. 그곳에서는 골동품이란 어떤 것인가, 골동품이 귀중한 이유 등 어린이 수준에 맞는 강의가 진행됩니다.

어느 곳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만 저로서는 약간은 우쭐했고 또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했던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앤틱 쇼는 복층으로 된 2층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앤틱 강좌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쇼장을 돌며 앤틱들을 살피고 있는데 늘씬한 40대 중반의 백인 여성이 나를 보더니만 반색을 하며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앤틱 쇼에 가면 앤틱 부스 주인은 물론이고 방문객들은 거의 100% 백인들입니다. 유색인종은 저와 집 사람 뿐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미국 전체 인구 3억950만명 가운데 15.8%로 소수 인종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히스패닉계는 물론이고 비록 비율에서는 밀렸지만 어떤 의미에서 주류로도 인정받고 있는 흑인 고객들도 만난적이 거의 없습니다. 당연히 아시안들은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 중국인들을 볼 때도 있지만 십수년간 한 둘에 불과할 정도입니다.

그러다보니 앤틱 쇼장에 들어서면 "저 사람들은 뭐야?"하는 다소 싸늘한 눈길이 한꺼번에 쏟아져 올 때가 많아 때론 부담스럽고 때로는 약간의 위축감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날은 백인 여자가 분명히 나를 보며 뛸듯이 반기며 다가오니 어리둥절할 수 밖에요. 그 여자의 손에는 두 가지 물건이 들려 있습디다. 하나는 윗줄에 알이 두 개가 들어 있는 중국 주판과 하나는 일본인들의 사진과 붓글씨가 잔뜩 들어있는 조그만 책자였습니다.

이 여자는 앤틱 강의 도중 한 어린이가 이 주판과 책자를 갖고와 무슨 물건인지 물었지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답니다. 어쩔 수 없이 쇼장에 내려와 앤틱 샵 주인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역시 답을 듣지 못했다는 겁니다. 대략 동양의 물건인 걸로 짐작을 하고 있던 차 나를 발견하고 닥아온 것이었습니다. 내가 간략히 설명해주자 그 여성은 “이 물건이 어떤 것인지 어떤 용도로 쓰이는 것인지를 어린이들에게 직접 설명해줄 수 없겠느냐”고 아주 정중하게 요청해왔습니다.

‘영어가 고생은 좀 하겠지만’ 웬만큼은 설명할 수 있을 것같아 복층 2층 강의실로 올라갔습니다. 비록 꼬마들이지만 60여개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저한테 집중되니 괜히 더 긴장이 됩디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주판부터 설명했지요. 제일 오른 쪽 끝부터 단, 십, 백, 천으로 단위가 올라간다는 것부터 밑의 알은 1개가 1이고 위는 1개가 5단위라는 것 등을 알려주었습니다. 일종의 계산기라는 설명에 꼬마들은 모두 놀라고 신기해 하더군요.

그 다음, 일본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상한 글씨체(붓글씨를 처음 본 것이었습니다)는 도대체 어떻게 쓸 수 있느냐는 게 질문이었습니다. 이는 일본 어느 도시의 도예가 회원 명단집이며 글씨는 일종의 페인팅 브러쉬로 썼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어린이들 뿐 아니라 여 선생까지 신기한 사실을 알게 됐다며 아주 고마워합디다.

2층을 내려오면서 왜 하필 중국과 일본 것만 질문의 대상이 됐는지 다소 씁쓸해졌습니다. 한국 것도 포함돼 있었다면 더 신이 났을 텐데...... “미국인들의 손에 쉽게 잡히지 않을 만큼 한국 앤틱물이 귀중하다고 여기자”하고 스스로 마음을 달랬습니다.

<미국 어린이들은 의외로 앤틱에 관심많아>

이같은 어린이 전용 강좌는 어린이들을 떼어놓고 부모들이 쇼장을 푸근하게 오랫동안 돌아다니게 하려는 장삿속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들 가운데는 그같은 강좌를 좋아해 일부러 부모를 따라 쇼에 오는 경우도 있는 걸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한번은 앤틱 쇼장 옆에 어린이들을 위해 강아지, 고양이, 금붕어, 햄스터, 이구아나 등 애완동물을 판매하거나 구경하게 하는 행사도 함께 열렸습니다. 한 부부가 동반한 여자 어린이와 승강이를 하고 있더군요. 옆을 지나며 들어보았더니 초등학교도 채 다니지 않을 것같은 이 꼬마 아가씨는 부모가 앤틱을 쇼핑하는 동안 애완동물을 구경하고 있으라는 말에 잔뜩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지난번(골동품 강좌)처럼 옛날(골동품) 장난감 그림도 그리고 콧수염기른 할아버지들이 마시는 맥주잔이 어떤가를 알려주는 그런 데를 데려달라”고 떼를 써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어린이, 더욱이 여자 어린이라면 앤틱보다는 애완동물을 보고 노는 게 더 좋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것을 보고 조금은 놀란 기억이 있습니다.

또한 미국 부모들은 앤틱 쇼장에 들어오면 어린이들에게 얼마간의 돈을 주고 좋아하는 물건을 사보라고 합니다. 당연히 이들이 살 수 있는 앤틱 종류라고 해봐야 싼 것 뿐이죠. 그럼에도 부스 주인들은 어린이들이 사고자 하는 앤틱에 대해 물어보면 아주 진지하게 설명해줍니다. 어떤 질문에도 성의껏 대답해주고 귀찮아 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어린이들은 앤틱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는 듯합니다. 미국 앤틱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 이민자들이 갖고 들어왔거나 그들이 사용하던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래된 미국 물건들입니다. 개중에는 외양이 그럴듯해 보이는 물건도 있지만 오래되고 낡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이들 앤틱에서 선조들의 혼을 찾고 의미를 부여해가며 스스로 값어치를 높여갑니다. 또한 자녀들에게도 앤틱 교육을 통해 조국에 대한 역사의식, 자부심, 애국심을 배양케 합니다. 더 나아가 겉보기에는 비록 낡고 하찮아 보이는 물건이라도 이들 가운데는 소중한 것들도 많다는 사실을 체득케 해줍니다.

저도 어릴 때부터 앤틱 교육을 받았더라면 우리집에서 떠돌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보물(?)을 지켰을 것이란 아쉬움이 생깁니다. 또한 우리 어머니가 방짜 유기에 겉옷을 입힐 때 말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대한민국 부모 여러분,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우리나라 앤틱에 대한 교육을 시킵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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