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썰매 만들던 기억이 새삼 떠올라>
날씨가 다소 쌀쌀해졌습니다. 이제 조금 더 있으면 겨울이 오고 어린이들은 부모님을 따라 스키장에 가거나 친구들과 함께 스케이트장을 찾겠지요. 이런 모습들을 보노라면 요즘 어린이들이 누리는 물질문명의 혜택은 참으로 풍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스케이트나 스키를 타는 사람들, 특히 어린이들을 보면서 ‘물질문명의 혜택’ 운운하는 것은 너무 편협하거나 시대착오적이라고 비난할 분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이는 저의 어릴 적 상황과 비교해 볼 때 그렇다는 것이지 무슨 거창한 의미나 이념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님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어릴 때는 한겨울 놀이래야 연날리기와 팽이 돌리기, 썰매 타기가 거의 전부였지요. 그 중에서도 썰매 타기는 어린이들에게 상당히 고급 놀이에 해당했습니다. 스케이트는 감히 꿈도 못 꿨습니다. 연은 종이와 풀, 실만 있으면 쉽게 만들어 즐길 수 있었습니다.
팽이는 동네 구멍가게서 사거나 적당한 나무를 골라 직접 깎기도 했습니다. 비록 모양은 세련되지 못했지만 대구에서는 ‘차랑’이라 불렀던 금속 베어링을 밑에 박으면 오래 잘 도는 팽이가 됐습니다.
그러나 썰매는 다릅니다. 우선 일정한 두께를 지닌 나무 판자를 구해야 했고 썰매 날로 사용할 철판이나 적당한 굵기의 철사가 필수적입니다. 판자는 그나마 구하기가 쉬운 편에 속했습니다. 문제는 철판이나 철사인데 철판은 아예 처음부터 구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워낙 귀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썰매 날을 대신할 철사는 어떡하든 찾아내야 했습니다.
당시만해도 썰매 날로 사용할 제법 굵은 철사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철물점도 드물었을 뿐 아니라 설사 철물점에 맞춤한 철사가 있다하더라도 값이 비싸 우리 개구장이들로서는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포함한 동네 개구쟁이들이 썰매 만들기를 포기할리는 없었지요. 우리가 썰매용 굵은 철사를 구하는 곳은 ‘방천’ 혹은 '신천'이라고도 불렸던 수성천이었습니다. 대구가 고향이 아닌 외지인들에게 수성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하자면 일찌기 스스로 세상을 떠난 가수 김광석 거리 앞으로 흐르는 하천이라고 해야 할 듯합니다.
지금은 수성천의 하상이 높아진데다 물도 예전처럼 많이 흐르지 않습디다. 그러나 저희 어렸을 때 방천은 평상시에도 수심이 아주 깊었습니다. 여름철에 꼭 한 두 명이 물에 빠져 익사할 정도였습니다. 지금 중앙상고 앞 신천교 자리에는 수심이 깊은데도 다리가 없어 나룻배가 운행되기도 했습니다.
방천은 특히 여름철 비가 많이 오면 엄청난 양의 황토물이 쏜살같이 흘러 공포를 안겨주곤 했습니다. 혹 제방이 터지지나 않을까 해서 수시로 방천에 나가 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수압에 못 견딘 방천이 군데군데 터지면 대구 시내가 물바다가 되므로 제방 한군데를 대포로 쏘아 허물어 물을 뺄 거라는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고의로 제방을 무너뜨릴 곳이 우리가 사는 동네 쪽이 되지 않을까 안절부절 못했고 때로는 급류에 떠내려가는 악몽을 꾸기도 했습니다.
당시의 방천은 하상 부근에서부터 적당한 높이까지 큰 돌들을 비스듬하게 쌓아올려 제방을 보강해놓았습니다. 또한 물이 최대한 불어나도 돌들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굵은 철사로 촘촘하게 엮어놓았습니다.
그물망을 만든 굵은 철사야 말로 우리 개구쟁이들이 노리는 보물이었습니다. 보통 서너명이 모여 방천으로 가서 한명은 망을 봅니다. 나머지는 맞춤한 돌로 철사망을 수십차례 내려 찍어 철사를 끊어냅니다. 소위 공공기물 파손 행위를 저질렀지만 개구쟁이들로서는 그렇게 큰 죄의식을 갖지 않았답니다. 이렇게 끊어낸 철사가 바로 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썰매 밑에 부착돼 ‘철판 날’을 대신합니다.
잘 달리지 못할 것같다구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얼음판에서는 훨훨 날고 웬만큼 다져진 눈길에서도 잘 나갑니다.
<초창기 스케이트는 속도보다는 얼음판 위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주목적>
저는 시카고에 있을 때 일리노이주와 위스컨신주 경계지점에 위치한 앤틱 샵을 즐겨 다녔습니다. 샵은 규모도 제법 클 뿐아니라 새로운 아이팀이 자주 소개됐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이 샵의 한 코너에서 녹이 쓸대로 쓴 스케이트 몇 쌍을 발견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부츠를 끈으로 매어 사용토록 한 130살 정도된 스케이트였습니다.
요즘 스케이트는 부츠 밑에 블레이드를 뗐다 붙였다 할 수 있도록 돼 있습니다. 그러나 이 스케이트는 블레이드와 붙은 철 깔판 자체에 부츠를 얹어 끈으로 고정시키게 돼 있습니다.
또한 이 스케이트는 사용자의 발 폭에는 맞도록 조절할 수 있게 돼있으나 발 길이만은 고정돼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신발처럼 수많은 사이즈의 철판 스케이트를 생산해낸 것같습니다. 특히 블레이드는 두께가 6mm나 되어 속도를 내기 보다는 얼음판 위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기능에 중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케이트는 발 폭은 물론이고 길이까지 조절토록 진화>
130세보다 조금 젊은 스케이트는 당연히 연장자에 비해 진화했습니다. 사용자의 발 폭은 물론이고 길이까지 맞출 수 있도록 조임 장치가 돼 있습니다. 그러나 블레이드 폭은 오히려 1mm가 더 넓습니다. 여전히 스케이트는 얼음판 위에서 빨리 달릴 수 있게 하는 수단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나마 블레이드 없이 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것보다는 효율적일 수는 있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초기 1, 2세대 철판 스케이트는 몇시간 사용할 경우 스케이터들에게 몸살깨나 앓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게가 꽤나 나가기 때문입니다.
요즘 스포츠 세계는 용구의 무게를 얼마나 많이 줄이느냐에 초점이 모아집니다. 즉 경량화한만큼 플레이어에게 육체적 부담을 줄여주고 스피드 경기 경우 또 그만큼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당초 무게나 스피드, 외양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이들도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면서 철판 스케이트에 대한 불만이 싹텄을 것입니다.
<블레이드 고정판이 철판 대신 나무로 대체>
이를 개선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철판 대신 가볍고 질긴 나무로 대체한 스케이트라 할 수 있습니다.
철판 스케이트는 블레이드가 쇠판에 고정돼있는 것과 달리 나무 스케이트는 블레이드가 나무에 홈을 파고 들어가 있습니다. 블레이드는 종전 것에 비해 폭이 1/3이나 줄어든 2mm에 불과합니다. 모양도 세련됐을 뿐 아니라 쇠판을 나무로 대체해 무게가 훨씬 줄어들었습니다. 당연히 힘이 적게 들어 스피드 향상은 물론이고 장거리 운행에도 도움이 되었겠지요.
<1940년대부터 스케이트도 외양에 신경>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스케이트도 외양에 신경을 써기 시작합니다. 블레이드 날은 2mm로 여전히 두껍지만 무쇠로 만들어진 종전 것과 달리 당시로서는 최신 소재 금속인 스탠레스 스틸이 쓰여집니다. 녹이 잘 쓸지도 않을 뿐아니라 사용 후 닦으면 윤기가 나 사용자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았을 것입니다.
뒷꿈치를 감싸는 부분 역시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어 세련됨이 돋보입니다.
이후 스케이트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 속도와 모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오늘날의 작품으로 거듭났습니다.
<스케이트의 발전은 인간 두뇌의 진화 과정>
스케이트의 발전 상황을 보노라면 인간 두뇌의 진화 과정의 한 단면을 보는 것같아 신기한 생각이 듭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130년전에 스케이트를 만든 사람들은 다소 우스꽝스럽게 비칩니다. 폭은 물론이고 길이까지 바로 조절이 가능한 스케이트를 왜 처음부터 못 만들었을까. 무게가 훨씬 가벼운 나무 재질은 왜 한참 뒤에야 사용했을까하는 의문이 생기는 겁니다. 별 것도 아닌 중간 과정을 건너 뛰지 못한 것이 답답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130년전 스케이트 제작자들의 사고 능력은 그것밖에 되지 않았기에 폭만 조절이 가능한 철판 스케이트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미켈란젤로같은 세기적 천재가 아닌 한 자신이 속한 시간적 공간 속에서만 나름대로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같습니다. 즉 처음부터 몇 단계의 고리를 생략한 발명품은 바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에서는 왜 이같은 편의적 발명품이 제작, 진화하지 못했을까하는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저처럼 대구 방천의 철사를 잘라 썰매를 만들 정도면 그 전이나 그 후에도 제품화내지는 상품화한 썰매, 스케이트의 수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한국에서는 이것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필요성이 조금이라도 제기되면 서양에서처럼 이를 물질화, 제품화, 상품화하는 토양을 가꾸어 가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자녀들이나 주변 청소년들부터 무엇이든 만들려는 의지를 보이면 이를 격려하고 도와주도록 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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