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나지 못한 2명의 오스왈드, 그들의 행복을 빌며

김인규 기자 승인 2021.07.31 13:46 의견 0
사진=위키피디아

뉴욕 한국일보 편집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우연찮게 라티노 아메리칸 2명과 인연을 맺었습니다.

미국의 라티노 아메리칸, 소위 히스패닉은 4,840만명에 이릅니다. 이는 미 전체 인구의 15.8%로 흑인을 제치고 소수계 1위로 올라섰습니다. 그러나 이는 인구 센서스에 잡힌 공식적인 통계에 불과할 뿐 불법 체류자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훨씬 많아질 것입니다.

뉴욕은 물론이고 웬만한 대도시 주요 도로 곳곳에는 수많은 히스패닉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체류 신분에 문제가 있는 불법 체류자들이 대부분이므로 정식 직업을 갖지 못하고 일당제나 시간제 일거리를 잡기 위해 거리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알았던 히스패닉 2명은 이들과는 달리 그나마 번듯한 직장을 가진 행운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이 오스왈드로 같았지만 한 명은 젊은 인텔리였고 또 다른 한 명은 마음씨 좋아 보이던 노인이었습니다.

젊은 오스왈드는 뉴욕 플러싱 노던(Flushing Northern) 한아름 마트 야외 과일 매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각종 과일을 나르고 진열하고 닦는 단순 노동을 하고 있었지만 자부심이 굉장히 강했습니다.

노던 한아름은 당시 저희가 살고 있던 플러싱 집에서 가까웠습니다. 게다가 과일이 한국에 비해 값이 엄청 싼데다 싱싱한 사실이 반가워 자주 찾곤 했습니다.

젊은 오스왈드는 그곳에서 자주 만났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대 연수와 브라질에서 특파원 생활을 하면서 익힌 어줍잖은 스페인어를 활용해볼 요량(사실은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치기어린 뻐김도 있었을 것입니다)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스왈드와 안면을 텄습니다. 이후 조금씩 친밀감이 싹트며 깊은 이야기도 하게 되었지요.

그는 적도가 지나는 중미 국가 에콰도르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자기네 나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재직했었다고 밝혔습니다. 비록 몸으로 떼우는 노동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뉴욕에는 많은 히스패닉들이 있지만 정통 스페인어를 하고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고교 역사 교사를 한 만큼 정통 스페인어에다 읽고 쓰기가 완벽하다고 은근히 자랑하곤 했습니다.

그는 많은 히스패닉들이 힘겹게 번 돈으로 자주 옷을 사입고 외식하는데 허비하며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혀를 차곤 했습니다. 또한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면서 돈을 낭비하는 사례도 자주 본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돈만 지출하고 나머지는 모두 에콰도르 가족들에게 송금한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이곳에서 고생한 뒤 반드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 사람답게 살아갈 작정이라고 다짐삼아 말하곤 했습니다.

그는 늘상 같은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언제나 깨끗이 빨아 손질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히스패닉들이 수염을 깎지 않거나 부스스한 머리로 나돌아 다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항상 단정한 모습이었습니다.

또 다른 한 명의 오스왈드는 플러싱에서 베이사이드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있는 ‘TACO BELL’(따꼬 벨)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뉴욕에 온지 얼마 안 돼 어느 날 집 사람과 함께 따꼬 벨에 갔습니다. 늙은 오스왈드는 당시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화장실을 청소할 때 미국서는 어떤 업소건 간에 사람들의 출입을 금합니다. 사용금지 시간은 길지 않으므로 대부분 입구에 기다렸다가 청소가 끝나면 들어가게 됩니다.

나중에 이름을 알게 됐지만 당시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나오던 오스왈드는 저에게 “Sorry”라고 영어로 말을 합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의례적 표현이었지요. 이런 경우 “Sorry”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대답이나 반응을 하지 않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스페인어로 "de nada"(데 나다. 천만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역시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표티’를 내기 위한 치기의 발로였던 셈이지요.

오스왈드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느냐고 물어봅디다. 조금 한다고 했더니 아주 반가워하더군요.

늙은 오스왈드는 페루 출신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맘보 박’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맘보 박을 모르면 페루 국민이 아니다”며 낯빛이 달라지더군요.

맘보 박은 페루 여자 배구 대표팀을 지도해 1982년 세계선수권 은메달. 1988년 서울올림픽 은메달을 따게 한 페루의 국민 영웅입니다. 박만복이란 이름 대신 부르기 쉽게 ‘맘보 박’이란 애칭으로 불립니다.

여자 배구 대표팀이 딴 은메달은 페루 올림픽 참가 사상 첫 메달인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페루인들치고 당시 서울 올림픽 당시 여자 배구 대표팀의 경기를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히딩크가 갖는 무게나 인기보다 맘보 박이 페루에서 차지하는 그것이 훨씬 큰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제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얘깁니다.

“맘보 박은 나와 개인적으로 친한 사이”라고 자랑했더니 늙은 오스왈드는 그 순간부터 나를 아주 존경하는 눈치였습니다.

사실 박만복 감독은 제가 서울 한국일보 배구 기자 시절 처음 만난 이후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온 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옆으로 빠져 박 감독과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박 감독은 제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연수를 하던 당시 페루 여자 배구 대표팀을 이끌고 전지훈련을 온 적이 있습니다. 과거 페루 대사관에 근무했었고 당시 마드리드 주재 스페인 대사관에 있던 연원희 공보관 역시 박 감독과 잘 알던 사이였습니다.

그런 관계로 우리 세 사람 즉 박 감독, 연 공보관, 저는 너무 의외의 장소에서 만난 만큼 반가움이 더 했습니다. 친한 남자 셋이 만나면 당연히 한 잔 꺾지 않을 수 없지요.

우리 세 사람은 저의 아파트에서 저녁 식사와 함께 술도 한잔 했습니다.

멤버가 좋으니 안주가 별 것아니어도 분위기가 좋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흥에 겨운 나머지 우리는 번갈아 가며 한국 노래도 부르며 신나게 놀았습니다. 당시 박 감독은 눈을 지긋이 감고 “한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인데......”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노래를 들으면서 ‘비록 페루의 영웅이라 할지라도 고국을 떠나 머나먼 이국에서 오랫동안 살다보면 가끔은 감상적일 때가 있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도 납니다.

저는 늙은 오스왈드에게 박 감독이 저의 집에 와서 저녁을 함께 먹고 노래까지 부르며 놀다간 사이라는 점을 은근히 자랑했습니다.

오스왈드는 "페루의 국민 영웅과 친한 사람과 만나게 됐다는 사실이 신기하다"며 "혹 박 감독을 다시 만나게 되면 사인 하나를 받아달라. 자식들에게 자랑하고 싶다"고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오스왈드의 나이를 물어보지 않았지만 70대로 보였습니다. 그 나이에 따꼬 벨 바닥을 밀고 테이블을 정리하는 것은 물론 화장실, 실외 등을 청소하는 모습이 여간 안타까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늙은 오스왈드를 제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딱히 없었기에 그저 만날 때마다 최대한 반갑게 인사하고 대화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 나이에도 일을 하고, 일을 하게 해주는 직장이 있다는 자체가 본인에겐 고마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애써 가져 보았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오스왈드를 보면서 비약인지는 모르나 1960년대 서독 광산에 취업한 한국인 광부들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너무 못 살고 일자리도 없을 때여서 대학은 물론 대학원을 졸업한 고학력자까지 서독 광부로 취업을 하곤 했었습니다.

육체적 노동을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많은 고학력 광부들은 그래도 고국의 부모 형제와 자신의 미래를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습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한국에 돌아와 제2의 삶을 살아갔거나 아니면 서독에 남아 성공신화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물론 광부들은 물론 간호사들이 송금해온 달러가 우리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저는 몇 차례 서독에 갔을 때 광부 출신들을 만나 많은 얘기를 들어보곤 했습니다. 저를 만날 당시 그 분들은 경제적 사회적 가정적으로 성공한 분들이었습니다. 예전의 고생을 훈장처럼 자랑하면서도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오스왈드 특히 젊은 오스왈드를 보면 한국인 서독 광부들이 오버랩되곤 했습니다.

그 역시 몇 년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번 뒤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 또다른 비즈니스로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시카고, 덴버, 서울 살이를 거쳐 뉴욕에 다시 방문했을 때 노던 한아름을 가보았습니다. 오스왈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른 히스패닉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 조차 모른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따꼬 벨에 가서도 역시 늙은 오스왈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왠지 가슴으로 싸한 느낌이 전해져 왔습니다. 아주 친밀한 관계나 특별한 인연이 아닌, 단순히 알고만 지낸 사이였음에도 두 사람이 있었던 자리에서 모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릿하게 합디다.

아마도 젊은 오스왈드는 모국 에콰도르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해봅니다. 그의 평소 다짐대로 이곳에서 아끼고 아껴 모은 돈을 밑천삼아 에콰도르에서 제법 규모있는 사업을 하고 있을 것이란 희망섞인 기대를 해보았습니다.

늙은 오스왈드는 어떻게 됐을까요. 더욱 나이가 들어 건강이나 상하지 않았을지......

사람의 인연이라는 게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내 인생에 중요한, 의미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세월이 흐르면 단순히 내 삶의 한 부분에 적혀있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그리운, 애틋한 추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부터라도 모든 이와의 만남, 관계를 더욱 충실하고 보람있게 가꾸어 가야 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비록 새로운 만남을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현재의 인연만큼이라도 나중 되돌아 볼 때 후회하거나 마음 아파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새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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