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14-신혼생활

김인규 기자 승인 2021.08.05 15:54 | 최종 수정 2021.08.09 00:08 의견 0

결혼을 하고 중곡동 단독 주택에 부엌을 사이에 둔 방 두칸 짜리 전셋집을 120만원에 얻었다. 이 집은 당시 주변 시세보다 쌌다. 집 주인이던 당시 동양통신 오근영 사회부장이 내가 언론계 후배인 점을 들어 꽤 많이 깎아준 것이었다.

방 한칸은 우리 부부가 사용했고 다른 한 칸에는 내 바로 밑 남동생을 데리고 있었다.

비록 방 두칸, 그것도 우리는 한칸만 사용했지만 신혼집에서 그녀와 보낸 시간은 꿈속같았다. 회사에서는 신입 기자라 선배들이 돌아가며 술집에 데리고 다녀 밤늦게 귀가했지만 그녀가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좋았다.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그녀가 옆에 있거나 아니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아침 준비하는 소리를 들으면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여겨졌다.

그녀가 결혼 휴가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가기 전 근처 작은 누나 집에 와있던 어머니가 우리 둘을 불러앉혔다.

“이제 결혼도 하고 했으니 남편하고 시동생 뒷바라지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러니 새 애기는 학교를 그만 두거라”

그녀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통고였다. 경북의 오지인 청송의 구천중에 있다가 이제는 교통편이나 생활 여건이 훨씬 좋은 안동 임동 중학교로 옮긴 뒤였다.

특히 그녀는 취미와 특기가 많은 수예를 학습 교재로 개발, 경북도 교육위원회로부터 상도 받고 해 교사 생활에 아주 만족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대구 시내 학교로 옮아올 수 있고 더 나아가 서울이나 경기도로도 전입이 가능할 거라고 내심 희망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시어머니가 학교를 그만 두라니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것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런 반대 의사나 표정도 나타내지 않고 “네 알겠습니다”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녀는 내게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다.

내 입장에서는 결혼한 뒤에도 계속 떨어져 지내다 주말 부부로 사는 것이 싫은 점도 있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이 좋아하는 교사라는 직업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아쉽다는 이중적인 관점도 갖고 있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녀가 교사 생활을 계속했을 경우 자신감과 삶의 의미를 훨씬 두텁게 느끼고 더욱 더 성장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 큰 후회가 되기도 한다. 그녀는 학교로 돌아가 얼마 뒤 사표를 쓰고 신혼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그 후, 당시 학교를 그만 둔 것이 너무 아쉬웠다고 토로하곤 했다. 왜 그때 교사 생활을 좀 더 하면 안되겠냐고 물어보지 그랬냐고 질문하자 “어머님이 그만 두라는데 어떻게 이설을 달아요”하고 씁쓸한 표정을 짓기만 했다.

아마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 내가 완강하게 반대, 교사 생활을 계속하게 해줬으면 좋지 않았겠느냐는 불만도 조금은 묻어 있는 듯했다.

요즘 젊은이들로서는 도저히 이해못 할 상황이겠지만 당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갑 대 을’이 아니라 ‘갑갑갑 대 을’이었던 데다 특히 그녀는 당시 며느리들 가운데서도 가장 순종적인 성격인 탓이었다.

신참 기자라 일년 365일 중 거의 매일 술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남편을 기다리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불평다운 불평을 해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그러다 당신 건강 다쳐요” 라거나 “술자리에 빠질 수 없다면 요령껏 슬쩍슬쩍 피해가며 마셔요”라고 하는 게 전부였다.

허니문 베이비를 가졌던 우리는 이듬해인 1978년 3월28일 저녁 7시 5분 전에 몸무게 3.2kg의 건강한 아들을 얻었다.

나는 아들 몸무게가 3.2kg이라는데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신의 키를 항상 150cm라고 주장했지만 솔직히 나는 이보다 더 작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다. 나도 남자 키치곤 작은 편이지만 그녀의 키는 여자 키로는 아주 작았고 몸무게도 40kg을 밑돌았다. 그것 역시 그녀의 부끄러움 가운데 하나였기에 남들은 물론 나에게 마저 항상 자신이 150cm라고 주장하곤 했다.

그렇게 작고 연약한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신생아가 3.2kg이라는 것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혹시 그녀가 내게 과장된 숫자를 얘기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직접 보고 나니 3.2kg은 너끈할 것같았다.

나는 그렇게 두드러진 새가슴은 아니지만 보통 사람들보다 가슴이 튀어나와 무척 두터운 편이다. 아들 녀석도 신생아였지만 가슴이 새가슴처럼 툭 튀어나와 나를 닮았고 체중도 제법 나갈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체중이 제법되는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나로서는 기쁜 일이었지만 ‘또 다른 불가사의’라는 생각이 들어 이후 그녀를 놀리는 소재로 사용하곤 했다.

즉 그녀는 그렇게 작고 바싹 마른 체격임에도 임신 시절 배가 그렇게 많이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고 한편으론 이상스럽기도 했다.

그 체구에 애기를 가지면 배가 앞으로 한참 많이 돌출해야 함에도 그녀의 배는 약간, 아주 약간 불룩할 뿐이었다. 물론 숨이 차고 피곤을 자주 느끼긴 했지만 체형상으로는 산달까지도 임신 초기처럼 보이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인체의 신비’라고 놀리곤 했다. 배가 심하게 부르지도 않았는데 그 정도의 몸무게를 가진 신생아를 출산했다는 사실 또한 ‘인체의 신비’였다.

체형상으로는 별달리 힘들어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임신 시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은 물론 생활하는데 무척 괴로워 했다. 출산 당시도 근 이틀을 진통하다 제왕절개 수술 일보 직전에 출산했기에 자식을 하나 더 가졌다가는 사람을 잡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 하나만으로 족하니 이제 더 이상 애기를 갖지 말자고 아내에게 다짐했다. 그녀도 동의했지만 부모님의 반응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물론 이후 특히 어머니는 “둘째 소식은 없냐”, “아들 하나면 나중에 커서 굉장히 외로워 한다”, “둘째는 아주 큰 인물이 된다는데......”라며 우리를 압박했지만 그 문제에서만큼은 나도 단호하게 대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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