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고교생 시절에 영세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집안에는 어머니가 개신교, 아버지는 무교, 4명의 오빠 중 둘째 오빠만 가톨릭 신자였다. 그럼에도 아내가 가톨릭 신자가 된 것은 오빠의 영향도 아니고 순전히 자신만의 결정이었다.
아내는 나중에 결혼을 하지 않고 수녀가 되겠다고 어릴 때부터 다짐했다고 한다. 영적으로 순수한 정신과 함께 다소 불편한 다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였다. .
우리가 만나고나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기에 나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짐했지만 그녀의 핸디캡은 결코 얕지 않은 상처로 마음 속에 남아 있었던 듯했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영세를 받은 이후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우리 둘이 비밀리에 사귈 때만 해도 그녀의 종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결혼을 앞두고 였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다.
소위 ‘하동 마님’이라 불렸던 친 할머니는 대구 앞산에 있는 ‘안지랭이 절’을 창건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종신제 신도회장을 지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수십년이 지난 뒤인 내가 고교생 시절에도 할머니의 사진은 이 절에 붙어 있었다.
부모님도 보통 신자가 아니었다. 안지랭이 절 주지 스님이 시내에 내려올 일이 있으면 반드시 우리집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하고 가시곤 했다.
사월초파일이나 중요 행사날 절에 가면 우리 가족은 일반 신도들과는 좀 다른 대접을 받았다.
아버지는 저녁마다 천수경을 독송하는 바람에 나 자신도 모르게 천수경을 암송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집안 사정이었기에 어머니는 우리 결혼을 승낙하고 나서 그녀에게 제일 먼저 다짐한 게 가톨릭을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한 집안에서 믿는 종교가 다르면 안된다. 그리고 인규는 부처님 원력을 빌어 얻은 아이므로 더더우기 네가 다른 종교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어머니는 위로 딸 둘을 낳고 시어머니인 ‘하동 마님’으로부터 엄청난 구박을 당했다고 한다.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고 빌어서 (뭐 그렇게 대단한 인물도 아닌) 나를 얻었기에 아내도 당연히 불교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렵게 결혼 허락을 받아낸 상태에서 자신의 종교를 고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그녀는 가톨릭을 믿지 않겠다고 어머니께 약속했다. 그러면서도 성당에 나가지 못하는 것을 영적으로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종교적 숨통이 트인 것은 내가 스페인 마드리드대 (꼼쁠로뗀세) 정보 신문학과로 연수를 떠나게 되면서였다. 1987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출장을 갔을 당시 나는 스페인이란 나라에 매혹당했다. 날씨며 사람들의 성품, 그리고 많은 문화 유산 등에 반해버렸다. ‘따르르 따르르’하며 혀를 굴리는 스페인어까지도.
”그래 이렇게 멋진 나라에서 우리 가족들과 한번 살아보자“고 다짐했다. 한국 외국어대학 통역대학원에서 6개월간 저녁 시간에 스페인어를 배웠다. 첫 번째는 실패하고 두 번째 도전에서 서울 언론재단 연수생으로 선발돼 1989년 드디어 마드리드에 가게 됐다.
서울에서 회사 생활하랴, 취재하랴, 술마시랴 바쁘게 돌아다니다 연수생이 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푸근했다. 단기 연수다보니 애초 학위 딸 능력도 없었고 시도도 하지 않았다. 단지 스페인어만 어느 정도 수준에 올려 귀국한 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취재 때 써먹으면 된다고 판단했다.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가족들과도 종전에 비해 여유있는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내는 이 기회에 그간 떠났던 성당에 나가고 싶어했다. 아내는 결혼한지 12년 만에 집 앞에 있던 스페인 성당 미사에 참여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으로 종교를 믿는다하나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스페인 성당에서의 미사는 왠지 공허하다고 말하곤 했다.
마침 우리보다 근 2년 먼저 스페인에 연수를 와서 근처에 살던 공군 정희진 중령 가족이 가톨릭 신자였다. 정 중령의 소개로 2주에 한번 보는 한국인 미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당시 마드리드에는 주재상사라고는 코트라와 ㈜대우뿐이었고 스페인 교포들도 별로 많지 않을 때였다. 대사관 직원, 유학생, 각종 직장의 연수생 등 10여 가족이 스페인 성당을 하나 빌려 2주에 한번씩 한국인 미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사는 역시 마드리드 인근 지역에서 연수를 하고 있는 한국 신부님들이 번갈아가며 집전했다.
아내는 마음 속 한 구석에 응어리져있던 배종에 대한 죄의식을 어느정도 씻었다며 아주 좋아했다. 결혼 당시 가톨릭을 믿지 않겠다고 했던 부모님과의 약속을 어기는데 대해서는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은 듯했다.
2주마다 아내와 아들을 한인 미사에 데려다 주고 나는 근처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그래도 나는 미사가 있는 날을 좋아했다.
미사가 끝나면 한인 성당 식구들은 인근 나바세라다 산에 가서 불고기 파티를 하거나 유쾌한 소풍을 즐겼기 때문이다. 해발이 상당히 높아 예전에는 한 여름에도 꼭대기에 눈이 쌓여 있었다던 나바세라다는 적당한 수의 키큰 나무들과 얼음장처럼 시원하고 맑은 냇물이 흘러 몸과 마음을 상쾌하게 씻어주곤 했다.
약 1년반 정도의 연수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 아내는 성당에 다닐 수가 없었다. 비록 몰래 슬쩍 슬쩍 성당에 나갈 수도 있었지만 스페인에서와는 달리 그렇게 하는 게 부모님을 속이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었다. 마드리드와 서울이라는 공간의 차이가 그렇게 만드는 셈이었다.
스페인 연수를 마치고 다시 체육부에 복귀했다 전국부 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는 각 언론사들의 경쟁이 아주 치열할 때였다. 한국일보는 전국 일간지 중 최초로 연중무휴 신문 발간과 전국 동시 인쇄를 시도, 타 신문사들도 울며 겨자먹기로 따라오게 만들었다. 또한 조간이면서 석간도 동시 발행하는 등 국내 언론계의 도약과 경쟁을 선도했다.
여기에 더해 한국일보는 종전 워싱턴, 도쿄, 파리에만 두었던 상주 특파원을 대폭 늘였다. 베이징, 베를린, 런던, 싱가포르에 상주 특파원들을 임명한데 이어 브라질 상파울루도 추가하였다.
상파울루 경우 포르투갈어를 사용하지만 스페인어와 유사하므로 한국일보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하는 내가 선발되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정부가 정식 출범하기 얼마 전 나는 가족들과 함께 상파울루에 도착했다.
3년 가까운 상파울루 특파원 시절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는 색다르면서도 보람있는 시기였다. 특히 아내에게는 스페인 이후 국내 체류 기간 중 어쩔 수 없이 멀리했던 가톨릭에 다시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영성적으로 흥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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