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23-아내에게 고백한 어머니의 회한

김인규 기자 승인 2021.08.08 14:50 | 최종 수정 2021.08.09 00:31 의견 0

아내는 결혼 초기부터 꽤 심한 시집살이를 살았다. 전세 신혼집을 차린 첫날부터 큰 시동생을 시작으로 내리 두 명의 시동생을 데리고 살았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겉으로는 싫은 내색을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대구에서 자주 불쑥 불쑥 올라오는 부모님 때문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면서도 언제나 웃는 낯으로 맞았다. 특히 어머니는 우리의 결혼을 반대했던 그 관성이 남아있었던 탓인지 종종 아내에게 스트레스를 주곤 했다.

우리 부부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피기보다는 시동생이 형수로부터 제대로 대접받고 있는지, 눈치나 보고 살고있지나 않는지에 더 관심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 동생들이 형수의 눈치를 볼 정도로 여리지 않음에도 어머니는 혹 소흘하게 취급되지 않는지 늘 신경을 쓰고 잔소리를 하곤 했다.

그럼에도 아내는 시부모 앞에서는 거슬리는 말이나 싫은 낯빛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단언한다.

두 분이 대구에 있을 때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이것저것 지적하는 바람에 종종 전화벨이 울리면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그럼에도 아내는 부모님들에게 진심으로 잘하고자 했다. 많지 않은 기자 봉급에도 매달 생활비를 보내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두 분의 생일은 우리 집에서 형제들을 불러모아 제법 떡 벌어지게 차려드리는 것은 당연했다.

컬러 TV가 대중화할 때는 우리집보다 대구 부모님 댁에 컬러 TV를 먼저 들이고 다음 차례가 우리였다. 진공 청소기도 우리보다 먼저 어머니에게 사드렸다.

어머니가 양쪽 다리 관절염으로 재래식 화장실 사용이 불편하다며 의료용품점에 가서 이동식 좌석 변기를 구입해 보내 드리기도 했다

내가 해외 출장을 다녀오며 사온 특별한 선물은 반드시 부모님이나 우리 형제 집으로 보내곤 했다. 일본 출장길에 사온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소형 TV겸 라디오는 부모님을 거쳐 내 여동생에게로 갔다. 국내에서는 너무 비싸 감히 엄두도 못내던 밍크 목도리도 큰 맘먹고 사왔으나 아내 대신 어머니가 걸치게 되었다.

아낸들 이같은 물건이 탐나지 않았을까만 언제나 새로운 물건, 좋은 물건은 시집으로 보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많지 않은 봉급에도 어떻게 이같은 일을 할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자신에게 투자하는 돈은 거의 없었다. 옷도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을 찾아 싼 걸로 구입했다. 그러면서도 감각이 남달랐던 탓에 멋쟁이 옷을 구해 남들로부터 아주 고가의 고급일거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내가 봐도 아내는 부모님은 물론 시댁 식구들에게 진심으로 대하고 존중했다. 때론 우리 부모님 특히 어머니가 심하다고 느낄 때도 있었지만 나는 아내 편을 한 번도 든 적이 없었다.

반대했던 결혼을 허락해주었다는 마음의 빚에다 고부 갈등이 생기면 반드시 어머니 편을 드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집안을 평안하게 하는 기본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합가해서 살지는 않았지만 고된 시집살이를 하던 아내에게 당시 소박한 즐거움 중 하나는 내 월급날과 여성지나 잡지 등에 쓴 원고료를 받는 날이었다.

특히 경찰 기자 시절 같은 지역을 커버했던, 매너좋고 능력이 뛰어났던 고영재 경향신문 선배는 해직된 후 샘터 편집장으로 가 있었다. 경찰 기자때의 인연으로 고 선배는 그 잡지에 내 원고를 장기 게재케 해주었다. 월급 외에 고정적인 고료 수입이 있다는 것은 나와 아내에게 정신적 자부심을 준 것은 물론이고 재정적으로도 도움이 컸다. (고영재 선배는 지금 어디 계신지 모르나 당시 참 고마웠음을 이 자리를 빌어 전하고 싶다)

월급이나 고료를 받는 날이면 나는 종로 2가 무과수 제과에 아내와 아들을 나오라고 했다. 무과수 제과의 맛있는 빵, 특히 도너츠로 배를 제법 채우고 나서는 종로나 명동 일대를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다 배가 꺼지면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찾아 본격적인 저녁을 즐기곤 했다. 이것이 아내에겐 일상에서 느끼는 가장 평온하면서도 행복한 순간이었다.

언제나 호랑이같던 어머니도 아내가 신혼초때는 물론이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까지도 변함없이 순종적이고 성품이 한결같자 아내에 대한 평가를 달리 하는 것같았다. 물론 그 사이 어머니도 연세가 들면서 마음이 약해진 탓도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잠시 한국에 나가있던 2009년이던가 어머니가 자꾸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서울에서 아들과 함께 있던 아내가 부리나케 대구로 내려가 보니 어머니 가슴에 제법 큰 종기가 나있고 여기서 진물이 흐르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간 단순한 피부 종기로 알고 연고제를 바르며 견뎠으나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자 아내에게 S.O.S를 친 것이었다. 아내는 바로 얼마전까지 대구 동산병원장으로 근무했던 셋째 오빠에게 부탁해 전문의로부터 진찰을 받게 했다.

예상했던 대로 유방암이었다. 수술은 아주 잘됐다지만 연세가 있는 만큼 보름간 입원해 있어야 했다. 아내는 보름 동안 제대로 한번 편하게 누워보지도 못하고 꼬박 곁에서 간호를 했다. 같이 입원해있던 환자나 보호자들이 저러다 아내가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어머니를 보살폈다.

어머니도 온몸을 던져 정성껏 간호하는 아내의 모습에 감동을 받았던 듯했다. 하루는 옆에 있던 아내의 손을 어머니가 꽉 잡고 약간 쉰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내가 지난 세월을 뒤돌아 보니 왜이리 회한이 많이 드는지 모르겠다. 특히 너한테 모질게 한 게 참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시동생을 둘씩이나 맡겨서 장가보내게 했고 수시로 우리가 서울로 올라가는 바람에 네가 얼마나 힘들었겠냐.

그런데도 남편 뒷바라지 잘하고 아들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의사로 만들지 않았냐. 모두 네가 고생한 덕이다. 그런 사실을 왜 지금껏 몰랐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다 잊고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고생많고 정말 고맙다”

뜻밖의 행동과 말씀에 아내는 깜짝 놀라 어떻게 반응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렇게 완고하던 시어머니가 이런 예상외의 행동을 하는 것은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는 말처럼 혹시 돌아가실려고 그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아니에요 어머님. 제가 부족한 게 많은 며느리였습니다. 못난 저를 며느리로 받아주셔서 언제나 감사하고 있는 걸요. 앞으로는 더 노력하겠습니다”

아내는 목도 메이고 가슴 아래서부터 위로 뭉클한 기운이 솟아 올라 얼른 이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배추 부침개 사갖고 올게요”하고 병실을 벗어났다.

오랜 시간이 지난뒤나마 시어머니가 진정어린 사과를 했다는 데 대한 고마움과 함께 왜 진작 내게 좀더 일찍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으셨는지 원망도 뒤섞여 한참 눈물이 흘렀다고 했다.

사실 아내가 시어머니의 병간호를 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대구집 담장 위의 호박을 따러 올라갔다 떨어져 한 달 가량 누워있을 때 병간호를 한 것도 서울서 내려간 아내였다. 이외 가끔가다 감기 몸살이라도 걸릴라치면 아내는 대구로 시어머니를 돌보러 내려가곤 했다.

한번은 어머니가 심한 변비가 생겼으나 병원엔 창피해 죽어도 못간다는 말을 듣고 아내는 또다시 대구행을 했다. 그리곤 약국에서 구입한 관장약으로 이를 단숨에 해결했다.

이처럼 예전에도 어머니가 몸에 문제가 생기면 아내가 전적으로 보살펴왔으나 유방암 수술 후에 시어머니가 한 말과 행동은 아주 이례적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돌발적인 발언으로 “돌아가시려고 마음이 저렇게 바뀌신 것 아닌가?”하고 아내는 한동안 걱정했지만 어머니는 이보다 7년여를 더 사셨다.

이후에도 틈만 나면 “내가 합가하면 영화 에미(아내)나 영효(우리집 막내 여동생)하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 하고는 못한다”고 수시로 말하곤 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혈육인 막내 딸과 아내를 동일 선상에 올려놓는 것으로 며느리에 대한 미안함과 신뢰와 사랑을 계속 밝힌 셈이었다.

아내는 결혼 이후 오랫동안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변함없이 시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들에게 헌신해온 점을 마침내 인정받은 것이다.

우리가 계속 미국 생활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한테 보살핌을 받다 말년에는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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