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후 세계가 있다고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금은 믿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록 가톨릭 영세를 받았지만 천국이나 지옥 등 내세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나의 이 생각이 바뀌었다기 보다는 잘못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곤 한다.
아내가 떠난 바로 다음날 한국에서 날아온 아들과 나는 아내를 눈물로 화장했다.
아들 말마따나 우리는 남다른 가족이었다. 기자 생활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다른 직장인에 비해 많이 적었지만 가능하면 가족들과 함께 보내려 노력했다.
특히 스페인 연수와 브라질 특파원 시절에는 가족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지내는 시간이 그런대로 많았다. 그러다 보니 우리 가족 셋의 유대는 다른 가족들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깊고 강했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 남자애들이 중, 고교생 시절 사춘기나 반항기를 겪는 바람에 부모와의 갈등이 많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것을 전혀 느낀 적이 없었다.
자신의 몸이 약해 아들 하나로 그친 아내는 딸이 하나 더 있었으면 좋겠단 말을 가끔 하곤 했다. 그러나 이내 “우리 아들은 딸 노릇할까지 하므로 굳이 딸을 가질 필요가 없지......”하고 스스로 위안하기도 했다.
그래서 늘상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아들은 딸같은 아들’이라고 자랑하곤 했다. 아들 역시 자기 엄마를 끔찍이 생각하는 살가운 아들이었다.
둘이 백화점을 가거나 동대문, 남대문 시장을 돌아다니며 같이 쇼핑하는 걸 좋아했다. 심지어는 아내와 함께 수를 놓거나 곰인형을 만들며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잦았다.
"엄마 덕분에 많이 해본 바느질이 외과 수술할 때 제법 도움이 된다"는 말로 제 엄마의 마음을 기쁘게 하곤 했다. .
식당에 가면 항상 엄마에게 먼저 수저를 챙겨주고 앞에 맛있어 보이는 반찬이 있으면 엄마 앞으로 밀어주곤 했다.
오죽했으면 아들이 고 3때까지도 아침 등교 시 현관앞에서 우리 세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소위 ‘삼각자 뽀뽀’를 하곤 했을까.
초중고교 시절은 물론이고 대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에도 학교와 친구들간에 있었던 얘기를 자세히 얘기하곤 서로 깔깔 웃기도 했다. 우리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모자간은 물론이고 우리 세 사람의 관계를 진심으로 부러워했다.
아내가 마지막 가는 길에 입었던 파란색 정장도 아들과 함께 롯데 백화점에서 산 옷이었다. 가지런한 아내 손에 올려진 얌전하면서도 예쁜 손수건은 아들이 해외 출장다녀오면서 선물로 사온 것이었다. 아내는 그 손수건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그저 보고 만지는 것만으로 좋아했다.
이런 사연들로 인해 나보다 적지 않은 눈물과 회한을 쏟아낸 아들이 장례 끝날 무렵 내게 예상외의 말을 했다.
“아버지 이제 우리 그만 우십시다. 우리가 너무 슬퍼하는 것도 하늘 나라로 가는 엄마의 발길을 잡는 겁니다. 틀림없이 엄마는 저 위 세상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며 우리가 씩씩하게 살아가고 성공하기를 기원할 겁니다”
유신론자든 무신론자든 흔히 하고 듣는 위로의 이 말이 이상하게 내 마음으로 날아 들어왔다.
“너는 다음 세상이 있다고 믿느냐?”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질문이지 아버지가 아들에게 할 물음은 아니란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지만 하도 가슴이 아프기에 한번 던져보았다.
아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있죠. 분명히 있습니다” 아들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고등학교 때 경희대 의대 정신과 교수인 김영우라는 분이 쓴 '전생여행'이란 책을 읽고부터 저는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게 됐습니다”
외과 의사인 아들이 확신에 찬 어조로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는다는 의외의 대답을 하는 바람에 나는 꽤나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아들은, 아내의 갑작스런 떠남에 슬퍼하는 아버지를 위로할 의도가 더 컸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이 말이 내 가슴을 감싸안는 기분을 들게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언젠가 나도 저 세상에 가게 된다면 그기서 다시 아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가냘픈 기대가 돋아나 위안이 된 것이 사실이었다.
아들처럼 나에게 또다른 세상의 존재를 말해준 이는 브라질 특파원 시절부터 알게 된 홍성학 선배였다. 한국일보 선배이자 브라질 한국일보 지사를 운영하다 지금은 무역업을 하고 있는 홍 선배가 장례식 얼마 뒤 저녁에 술이나 한잔하자고 전화해왔다.
브라질 특파원 시절은 물론이고 서울,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는 홍 선배로부터 많은 보살핌을 받았다. 특히 내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는 항상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해결책을 함께 고민해주는 고마운 선배였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가슴 아픈 시기를 맞고 있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나를 불러 낸 것이었다.
홍 선배도 수년전 자신의 형님을 떠나보내고 난 뒤의 아픔과 슬픔을 내게 얘기했다. 나는 지금껏 살면서 홍 선배만큼 자기 형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이를 본 적이 없다.
심장이 좋지 않은 형을 한시라도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떻게 동생이 저렇게 형을 좋아하고 챙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형이 세상을 떠나자 형에 대한 그리움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커져만 갔다. 오죽 형이 보고싶었으면 홍 선배는 형과의 에피소드가 담긴, 형을 그리는 내용이 담긴 ‘兄(형)’이란 책을 자비출판했을까.
형님 사후 2년이 가까웠을 무렵 더더욱 형이 그리워지던 차에 어떤 지인이 상파울루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아주 용한 영매가 있다며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했다.
승용차로 몇 시간을 달려 그 집에 도착한 홍 선배는 어두컴컴한 부엌을 지나 햇빛이 한조각 비치는 방에서 영매를 만났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80이 넘은 쪼글쪼글한 할머니가 홍 선배를 맞았다.
홍 선배는 형의 생년월일이 적힌 종이쪽지를 아무 말도 않고 영매 앞에 내놓았다. 영매 할머니는 한참 초혼 의식을 치르더니 “이것은 당신 생년월일이냐”고 물었다.
홍 선배가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자 영매는 다시 초혼 의식을 하더니 홍 선배를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 사람은 2년 전에 죽었다. 방금 이 사람이 여기를 다녀갔다”
그리곤 홍 선배 형님의 외모를 묘사했는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작고 땅땅한 몸집, 벗어진 머리, 장난기 머금은 동그란 눈 등, 살아 생전의 형님을 옆에 앉혀놓고 그리는 것같았다.
그래도 홍 선배는 아무 소리도 않고 듣고 있자 영매가 말을 이어갔다.
“이 사람은 당신과 함께 한 약속을 당신이 지키리라 믿지만 한번더 상기시키고 있다. 물론 나는 당신들이 중대한 약속을 했다는 점은 알지만 그 내용은 알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 약속은 홍 선배 부인도 형수도 알 수가 없는 단 두 사람만이 아는 약속이었다. 홍 선배 어머님이 돌아가시면 현재 거처하고 있는 제법 큰 상도동 집과 공주의 땅을 팔아, 그 돈을 조카들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자는 두 사람만의 약속이었다.
그 영매는 홍 선배에게 마지막 말을 해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26살이라는 영성의 나이를 부여받고 세상에 태어난다. 영성의 나이 26살은 현실 세계에서 사람마다 다 다르다. 누구는 현실 나이 100세가 26 영성의 나이이고 어떤 사람은 열 살이 26 영성의 나이일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영성의 나이 26세를 꽉 채우고 떠났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홍 선배는 당시 이 영매를 만나고 많은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이승 넘어 저승이 있고 그기서 형님을 다시 재회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도 홍 선배의 말을 듣고 아리고 아리던 마음이 어느정도 위로받는 것같았다. 홍 선배가 영매를 만나 들었던, 단 두 형제만이 알고 있던 약속과 형의 모습 묘사는 바꾸어 말하면 저승이 있으며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의미로 내게 전해왔다.
나는 내 아들이 한 말을 믿고 싶다. 아들은 인터넷을 통해 어렵게 구한 '전생여행'이란 책을 나에게 전해주었고 나는 단숨에 이를 읽었다. 또한 홍 선배가 만났다던 영매의 말을 가끔 떠올리곤 한다. 제발 그 말들이 사실이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유골을 안고 서울로 돌아와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많은 지인들이 아내의 죽음에 슬퍼했고 우리를 위로해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나는 아내의 마지막 길을 배웅해준 그분들의 배려와 위로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는 아내와의 추억, 흔적이 곳곳에 베어있는 시카고에서 도저히 혼자 지낼 수가 없었다. 2020년 11월 중순 귀국, 강원도 영월에 왔다. 아내의 체취가 남아있는 서울이나 대구는 가기가 싫었다.
요즘 나는 가끔 갈등과 모순으로 뒤범벅된 마음으로 혼술을 하곤한다. 생각하면 슬퍼고 아프고 괴로워 피하고 싶지만 또다른 한편으론 생전의 아내를 떠올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예전 휴대폰의 보이스메일 속에 남아있는 아내의 녹음된 목소리. 시카고 아파트 입구 벤치에 앉아 핸드폰으로 검색하는 낯익은 모습 등은 마음 아파 외면하고 싶다가도 또다른 순간엔 나도 모르게 찾게되는 갈등과 모순이 반복되곤 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같은 갈등과 모순이 계속될지 알 수 없으나 아들의 믿음, 홍 선배의 경험처럼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는 또다른 세계가 존재하기만을 바라고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해뜸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