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이후 가장 놀란 점은 한국의 사회 복지 제도가 엄청나게 좋아졌다는 것이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강원도 영월은 물론이고 종종 들리는 평창군, 정선군 등 인근 군에는 외양적으로도 멋있어 보이는 사회 복지 시설이 다양한 형태로 활동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이들 지역 외의 복지 시설도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음을 직간접적으로 듣고 느끼고 있다.
이렇게 발전한 여러 가지 복지 시설, 제도를 보면서 현역 기자 시절 취재 보도했던 충격적인 노인정 실태가 떠올라 오늘은 그 문제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977년 11월 초. 날씨가 쌀쌀해져 계절에 맞는 주제로 기사를 쓸 게 없는지 열심히 출입처를 훓고 다녔다. 그러다 당시 용산구 효창 공원 근처에 있던 ‘한국 노인문제 연구소’를 찾게 되었다.
그곳 박재간 소장을 만나 노인 문제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됐다. 국내에 그런대로 시설을 갖춘 노인정이 태부족하고 그나마 존재하고 있는 노인정 가운데는 노인정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열악한 시설도 상당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욱이 충격적인 사실은 길거리에 움막을 치고 있거나 다리 밑 난간을 의지해 비닐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노인정들도 있다고 했다.
박재간 소장께 노인문제 연구소가 파악한 노인정 실태 조사 자료를 받고 검토해보니 실제로 비참한 곳이 많았다. 곧 당시 이문희 사회부장께 보고하고 취재에 들어가 기사를 작성해 넘겼다.
그 기사가 바로 1977년 11월10일자 7면 사회면 ‘톱으로 나간 ‘다리 밑, 움막집 노인정’이란 것이다. 당시 지면은 ‘다리 밑, 움막집 노인정’이란 큰 가로 컷 제목 밑에 ‘연탄 한 장없이 막연한 겨울 채비’란 부제목이 달렸고 세로로 ‘천막, 비닐조각 울타리. 회관없는 노인회도 24곳’, ‘한국 노인문제 연구소서 실태조사’란 부제목들이 달려있다.
당시 기사를 앞 부분만 잠시 소개하면.
“겨울은 가장 먼저 노인정에 찾아왔다. 할 일을 뺏기고 갈곳조차 마땅치않은 노인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외로움을 달래는 노인정은 전국에 3천9백67개소나 있으나 이들 대부분이 사회나 정부의 관심으로부터 소외된 채 연탄 한 장의 월동대책도 세우기 어려워 찬바람을 더욱 세차게 느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노인정 가운데는 다리밑에 자리잡은 노인정 2개소를 비롯해 천막 5개소, 움막 2개소 비닐하우스 2개소 등 상상하기 조차 힘든 ‘버림받은 노인정’도 상당수가 있어 말로만 떠드는 노인복지문제의 실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이 기사가 나가고 난 이틀 뒤 속보꺼리라도 있을까하고 노인문제연구소를 다시 방문했다. 박재간 소장은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기자를 맞아 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박재간 소장은 53세였다. 당시 박 소장은 허리가 약간 꾸부정한 모습인데다 오랫동안 노인 문제에 천착하셔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꽤나 늙어보였다. 나중에 박 소장의 실제 나이를 알고 난 뒤 다소 놀라기도 했다.
노인 문제 연구소를 재방문했을 때가 점심 시간이어서 함께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박 소장과 나 외에 연구소의 봉 연구위원 등 세사람이 함께 갔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봉씨로 알고 있는 봉 위원이 돌아오는 도중 나에게 슬쩍 이런 말을 했다.
“김 기자 박 소장님, 며칠간 엄청 시달렸어요”하고 말을 꺼냈다.
얘기인 즉슨, 우리 한국일보 기사가 나가자 중정에서 펄펄 뛰고 난리났다는 것이었다.
역시 사단은 북괴였다.
라떼기자 첫 편인 ‘올챙이 기자의 살 떨리는 첫 사회면 톱 기사 특종’에서 ‘한국 직업병 실태 논문이 한국일보에 보도되자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북괴 선전매체가 이를 이용했다며 논문 저자인 한강성심병원 길병도 박사와 송호성 원장을 상대로 상당한 압박을 가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당시처럼 이번 다리밑 움막 노인정 기사도 나가자 북괴 선전매체들이 “북조선 인민들은 김일성 수령님의 은덕으로 아주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반면 한국 노인들은 소일할 곳이 없어 다리밑이나 비닐 움막에서 거지처럼 비참하게 살고 있다”며 우리 한국일보 지면을 보여주면서 한국을 비방하고 선전에 이용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중정에서 박재간 소장을 심하게 몰아 세웠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좋은 기사를 썼지만 박재간 소장이나 노인문제연구소에게는 본의아니게 피해를 주었기에 박 소장에게 유감의 뜻을 표했다.
그러나 박 소장은 의외로 또다시 환한 미소를 지으며 “김 기자가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고 위로할 일도 아니요. 김 기자 기사로 인해 전국 노인정으로 관심과 온정이 답지하고 있소. 라이온스클럽 등 현금을 보내오는 기관 단체들도 있지만 상당수가 월동용 연탄을 보내오고 있소. 아마 수십만장은 답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노인분들은 올 겨울은 마음껏 연탄을 때며 따뜻하게 지낼 수 있을게요. 이게 다 김 기자 덕분이지. 김 기자하고 한국일보에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보다 며칠 뒤에는 한강 오염문제를 취재하기 위해 덕소에서 만났던 봉 연구위원이 처음에 내게 해주었던 얘기를 보다 좀더 구체적으로 털어놓았다. 봉 연구위원은 중앙정보부의 압박에 대처하던 박 소장님의 태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중정에서 압력을 가해오자 박 소장은 “한국일보에 자료는 분명 내가 제공했다. 그런데 자료나 그 기사에 잘못된 부분이 있느냐. 물론 당국 입장에서는 썩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겁박하는 것은 대한민국 전체 노인들을 겁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당신네들이 해야할 일은 이같이 열악한 처지에 있는 한국 노인들에게 보다 나은 대우나 정책을 제공토록 하는 것이다”고 오히려 역공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서술했지만 박 소장은 나이에 비해 늙어보였고 자세도 다소 구부정해 나이가 꽤나 든, 나약한 노인처럼 보였다. 그러나 당시 그 태도만은 혈기왕성한, 용기넘치는 청년 이상이었다고 봉 연구위원은 내게 감탄하며 말했다.
한강 성심병원 직업병 전문의학자 길병도 박사, 송호성 원장 그리고 노인문제연구소 박재간 소장 등을 떠올리면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한치도 꿀리지 않고 당당하게 소신을 밝히고 대응한 자세는 두고두고 감탄과 존경심이 일게 한다.
요즘 비슷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관계자들은 그렇게 의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곤한다.
한국 노인문제 연구소를 창립하는 등 노인복지 발전에 헌신한 박재간 소장은 이후
2020년 7월31일 향년 96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다.
박재간 소장은 한국노년학회 창립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노인문제를 사회에 제기하는데 앞장서셨다. 1970년대 산업화 도시화로 전통적인 가족이 해체되면서 노인문제가 커져가기 시작할 때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노인 문제를 가장 먼저 헌신적으로 연구,사회화했다.
박 소장의 부음을 전한 ’시정일보‘ 기사에 따르면 박 소장은 보건복지부에서 노인복지법을 제정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법률 초안 작성에 기여했다.
결국 198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노인복지법이 탄생하는 산파역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의 노인복지상황은 많이 좋아진 것같다. 모든 노인들이 아플 때 돈 걱정 없이 병원을 이용하고 있다. 중풍, 치매 등 만성 질환으로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어려운 노인들은 요양원, 주간보호, 방문요양 등 요양서비스를 받고 있다. 근 5백만 명의 노인들이 매달 기초연금을 받거나 국민연금을 받아 경제생활을 하고 있다. 전국 지역사회 노인복지관에서 여가생활을 즐기고 있는 노인들도 많다.
소장이 만들어 놓은 한국노년학회는 이제 회원 5,000명을 가진 큰 학회로 발전했다.
요즘도 나는 멋있고 안락하게 지어져 운영되고 있는 지역 노인회관들을 볼 때마다 박재간 소장이 떠오르곤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했다. 박재간 소장님은 돌아가시면서 한국의 종합적인 노인 복지 시스팀이란 큰 업적을 남기셨다. 부디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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