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나는 것은 인간의 오랜 꿈>
그리스 신화에는 이카루스(Icarus)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카루스는 미노스 왕에게 미움을 산 아버지 다이달로스와 함께 감옥에 갇힙니다. 부자는 떨어지는 새의 깃털을 모아 만든 날개를 달고 감옥을 탈출합니다. 이카루스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고 하늘로 너무 높이 올랐다 깃털을 이어주는 초가 태양에 녹는 바람에 추락해 숨집니다.
이 신화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카루스의 신화에는 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인류의 오랜 소망이 담겨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하늘을 나는 인간의 꿈은 이제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을 탐사하는 정도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항공 산업이야 말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비약적으로 발전을 이룬 과학문명 분야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가 처음으로 유인 동력 비행을 한 것은 1903년 12월17일입니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만든 비행기로 13초 동안 하늘을 난 것입니다. 육상 선수가 100m를 달리는 것보다 조금 더 긴 시간입니다.
<라이트 형제 발명 비행기, 세계 최초로 13초간 하늘을 날다>
우리는 비행기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이처럼 라이트 형제라고 교과서에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특정 방향으로 하늘을 나는 기기를 최초로 만든 사람은 라이트 형제가 아니라 괴짜 브라질 발명가 산또 두몽(1)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1873년 부유한 브라질 커피 농장주의 아들로 태어난 두몽은 프랑스 파리로 가 성년기의 대부분을 보냈습니다. 그는 1901년 10월19일 자신이 만든 비행선을 조종해 당초 목표로 했던 에펠 탑에 도착합니다.
비행선은 그전까진 탑승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못했습니다. 기류에 맡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두몽은 이후 1906년 10월23일 유럽에서는 공개적으로는 사상 처음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납니다.
비행기 제작은 다소 늦었지만 전신인 비행선으로 ‘의도하는 비행을 처음 실현시켰으므로 비행기의 최초 발명자는 라이트 형제가 아니라 산또 두몽’이라고 주장하는 브라질인들이 많습니다.
두몽은 1932년 브라질 상파울루 인근 산토스 해변에서 숨진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비행기 발명에 대한 스포트 라이트가 온통 라이트 형제에게만 쏟아지는데 대한 실망과 분노 때문에 자살했다는 설이 있지만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상당수 브라질인들은 두몽을 최초 비행기 발명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아주 자랑스러워합니다.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는 그의 괴짜 기질과 천재성을 기리는 박물관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몽이 됐든 라이트 형제가 됐든 첫 비행 이후 120년이 지난 오늘날 이처럼 항공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것입니다. 제1차 세계 대전도 여러 요인 중 하나입니다. 전투용으로 개발하면서 자연히 비행기의 발전 속도가 빨라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편물 배달이 비행기의 발달, 항공 산업의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편물 운반, 배달 서비스가 항공기 발달 원동력>
인간은 자신이 궁금해하는 소식이나 정보에 대해서는 가급적 빨리 알고 싶어 합니다. 이는 인종이나 시대를 불문하고 똑같다고 봅니다. 역마차, 자동차, 선박, 기차 등으로 우편물을 운반, 배달하던 미국 체신부는 비행기야말로 우편 서비스를 한층 더 빨리 실현시켜줄 수단으로 간파하고 실행에 나섰습니다.
미국 체신부는 1911년 9월23일부터 30일까지 뉴욕 롱아일랜드 미네올라에서 얼 오빙턴(Earl Ovington)의 퀸 호로 우편물 운송을 처음 연습 비행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1918년 5월15일부터 뉴욕과 워싱턴DC까지 항공 우편 서비스를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미 국방부도 빠른 정보 전달 수단에 관심이 많아 비행기, 조종사, 무선통신 기술자 등을 양성, 공급하며 체신부의 항공 우편 서비스 업무에 힘을 보탰습니다.
체신부는 마침내 1920년 뉴욕을 출발해 72시간이 걸려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미 대륙 횡단 항공 우편 비행을 성공시켰습니다. 물론 72시간은 중간 기착지에서의 급유, 휴식, 정비 등에 들어간 시간까지 포함한 것입니다.
이후 1925년 우편 항공기 운영에 관한 법안인 켈리 법안(Kelley Act)이 의회에서 통과되고 1926년 항공 상업법(Air Commerce Act)이 제정되는 등 항공의 상업화가 속도를 내기 시작합니다.
<찰스 린드버그 대서양 논스탑 횡단으로 전 세계의 영웅으로 떠올라>
그러나 항공 산업은 찰스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2)가 세계 최초로 무착륙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맞습니다.
해군 대령 출신으로 우편 항공기 조종사인 린드버그는 1927년 5월20일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Spirit of St. Louis)'호를 타고 뉴욕의 루즈벨트 비행장을 이륙했습니다. 이어 대서양을 횡단해 5,800km의 거리를 33시간30분 동안 날아 프랑스 파리 근교 르 부르제(Le Bourget) 비행장에 착륙했습니다.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성공은 린드버그 개인에게는 부와 명예를 안겨줌과 동시에 본격적인 상업 항공 시대를 개막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AA, UA, NORTHWEST등 대형 항공사 모두 우편배달 항공으로 출발>
아메리칸 에어(American Airlines, Inc.), 유나이티드 에어라인(United Air Lines, Inc.), 노스웨스트(Northwest Airlines Corporation) 등은 대부분 시간을 다투는 정보 화물인 우편물을 배달하는 것에서 출발해 오늘날과 같은 거대 항공사로 발전했습니다.
아메리칸 에어는 로버츤 에어크래프트(Robertson Aircraft Corporation)와 콜로니얼 에어트랜스포트(Colonial Air Transport) 등 85개 업체들이 모여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특히 로버츤 에어크래프트는 1926년 시카고와 세인트루이스의 우편 배달 항로를 처음 취항했으며 이 첫 비행의 조종사가 바로 찰스 린드버그였습니다.
콜로니얼 에어트랜스포트는 1926년부터 뉴욕과 보스턴에 이어 클리블랜드와 캔자스시티를 경유해 샌디에고와 로스앤젤레스까지 이어지는 우편 항로를 개척했습니다.
유나이티드항공은 월터 바니(Walter Varney) 등 4개 항공 회사가 1934년 합병하여 설립되었습니다. 월터 바니는 워싱턴 파스코에서 네바다 엘코까지 항공 우편 서비스 계약을 해, 처음으로 상업적 항공 수송 시대를 열었습니다.
노스웨스트는 왕년의 인기 배우 남궁원씨의 부인이자 홍정욱 전 국회의원의 어머니가 이 회사 스튜디어스 출신인데다 한미간 최초의 항로 개설, 1970년대 초 보잉 747기 한국 취항으로 우리와 인연이 깊습니다. 이같은 노스웨스트 역시 항공 우편 서비스로 출범하였습니다. 1926년 노스웨스트 에어웨이스(Northwest Airways, Inc.)로 창립돼 1934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회사는 시카고와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세인트폴 간의 우편 항로를 열었습니다.
초기에는 한 두 명이 겨우 탈 수 있었던 비행기는 이제 약 800명을 태우고 수십 시간을 날아갈 수 있는 여객기로 발전했습니다. 더 나아가 인류는 달 표면에 발을 딛은 것은 물론이고 외계 행성까지 탐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항공 산업의 발전을 보노라면 저는 열심한 신자는 아니지만 ‘네 시작은 비록 미약하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란 성경 말씀이 절로 떠오릅니다.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항공산업에 한국과 한국인은 기여한 게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산업의 혜택은 참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일종의 무임승차를 한 것이지요. 항공 산업이 우리에게 혜택을 준 것 가운데 외형적으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을 들자면 한국인의 미국 이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뉴욕, 워싱턴DC,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시카고, 애틀랜타, 달라스 등에 한인 이민자 커뮤니티가 대거 형성된 것은 대한항공이 이 도시들을 취항했기 때문이라 봅니다. 대한항공이 먼저 노선을 신설함에 따라 한인 이민자들이 몰려들었을 수도 있고 한인 커뮤니티가 어느 정도 형성되자 대한항공이 취항한 사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것이 먼저든 간에 대한민국 국적기들의 취항은 먼 나라 미국에 한국인들의 대량 이주를 응원한 측면이 많다고 봅니다. 물론 캐나다 유럽 등지도 마찬가지겠지요.
항공산업 뿐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문명 발달에 우리의 후손들이 크게 기여했으면 좋겠습니다. 10년후 100년후 아니 이보다 더 가깝거나 멀거나 간에 보다 많은 과학 역사에서 한국인들의 이름이 당당히 오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1. 산또 두몽: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계 브라질인으로 커피 농장을 운영하면서 노동력을 절감하는 기계들을 많이 발명했습니다. 기계 발명에 재능을 보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데다 공상과학 소설가 줄 베르너의 소설을 탐독한 것이 두몽으로 하여금 비행기 발명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에 있는 그의 박물관에는 자잘하지만 재기넘치는 발명품들이 있습니다. 특히 냉온수 물통 2개를 합쳐 적당한 수온으로 샤워할 수 있게 한 샤워기는 보는 이들에게 웃음을 짓게 합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박물관 안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오른 발부터 먼저 밟도록 설계 돼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계단을 오를 때 왼발부터 먼저 올리는데 반해 두몽은 이같이 반대로 계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2. 찰스 린드버그: 그가 대서양을 횡단, 미국뿐아니라 유럽에서도 영웅으로 떠오를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에 불과했습니다. 모든 처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그는 당시 미 정계의 유력인사이자 멕시코 대사이던 드와이트 모로의 딸 앤과 1929년 5월 결혼, 세상에서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했던가. 결혼 이듬해 낳았던 아들 린드버그 2세가 1932년 3월1일 밤 10시에 유괴되는 바람에 끝없는 불행이 시작됐습니다. 당초 린드버그는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스스로 아들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뉴욕 데일리 뉴스가 이를 특종 기사로 터뜨리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지고 린드버그 2세 유괴는 전국적인 관심사가 됐습니다.
아들은 50일 뒤 숨진 시체로 발견되고 한 참 뒤 유괴범으로 체포된 독일 출신 이민자가 사형됐지만 그가 과연 진범인지 여부 조차도 논란거리로 남아있습니다.
그가 대서양을 횡단할 때 조종했던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호는 현재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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