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고려 성종(成宗)때부터는 영(令)으로서 재배를 권장했으며 조선조 초기에는 밤나무를 재배하는 자는 나라의 부역에서 제외되는 혜택 까지도 받을 만큼 중요시 했으나 조선조(李朝)정치가 부패함에 따라 밤 재배는 수난을 겪어 쇠퇴하고 말았다.
정약용(丁若鏞)이 관의 횡포를 폭로한 기록을 보면 지방관장들의 주달이 어찌나 심했던지 율림(栗林)이 있으면 농민으로 하여금 수확량을 사실대로 고하게 해 놓고는 그 사량의 두 배를 징수해가니 농민은 부족한 양을 먼 곳에서 사다가 이를 충당해야만 했다.
따라서 백성들은 율림(栗林)을 원수같이 미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밤나무 심은 산을 지키기 위하여 율목봉산(栗木封山)이라는 제도가 생겼는데 이 제도는 오래도록 민속으로 남아 전해져 왔다.
즉 위의 목적으로 산에 밤나무를 심고 그 산에는 잡인이 들어가는 것과 벌채를 금한 보호책을 율목봉산(栗木封山)이라 했다.
조선시대 한편 궁안에도 밤나무를 많이 심었다.
창덕궁(昌德宮) 비원에 연못이 있는데, 연못의 모양이 한반도 지형을 닮았다 하여 반도지(半島池) 라 이름 붙였다. 반도지(半島池)가에 물 위로 가지를 늘어트린 큰 밤나무가 있다.
밤은 흉년에 도토리와 함께 대용식으로 귀중하게 쓰였으며, 유교 이념에 따른 조상 숭배 사상과도 관련 있어서 제사상에 꼭 올린다. 가을날 벌어진 밤송이를 보면 안에 흔히 밤알이 3개씩 들어 있다. 씨알 굵기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후손이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으로 대표되는 삼정승을 한 집안에서 나란히 배출시키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또 밤이 싹트는 과정도 조상 숭배의 의미가 배어 있다.
밤나무는 땅속에 묻힌 씨밤이 뿌리에 매달려 있다가 나무가 자라서 씨앗을 맺은 후에 씨밤이 썩기 시작한다. 이런 밤의 특성으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는 나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밤을 조상과 후손의 영원한 연결고리로 인식한 것이다. 밤의 이런 속성 때문에 밤나무로 조상을 상징하는 신주를 만들기도 한다.
반도지(半島池) 주변 숲에 밤나무가 많아 밤은 따서 모아두었다가, 정월대보름이면 왕실의 친·인척들에게 부럼으로 밤을 나눠주기도 했다.
특히 고종(高宗)과 병약한 순종(純宗은 곧잘 비원을 거닐었었다. 알밤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고종은 이를 주웠다가 화로에 구워 재를 털고 손수 껍질을 벗겨 순종에게 먹이곤 했던 것이다.
순종이 장성한 후 비원에서 주운 밤을 손수 구워다가 부왕에게 바치길 일 삼았으며,고종은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순종이 구워 은 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또한 고종의 제사상에 이 군밤이 놓이지 않으면 예를 행하지 않았을 정도였다니 효심의 군밤이 아닐 수 없다.
어느 가을날 부왕인 고종(高宗)의 복중에 순종은 상복 차림으로 홀로 비원을 거닐고 있었다.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알밤 한 톨을 주워 들고 손바닥에 받쳐 들더니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 때는 가을에 밤 줍기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수많은 밤나무 중 하나가 살아남아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