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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곡성 장(場)에 가면 돼지 똥국이라 불리는 돼지국밥이 있다.
이 돼지국밥을 언제부터 먹었을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15년(1739) 1월 18일에서 예조 판서(禮曹判書) 윤순(尹淳)은 “노주(勞酒) 때에는 마땅히 소를 잡아서 음식을 장만해야 하겠으나, 친경하여 농사를 권장할 때에 농우(農牛)를 죽일 수 없으니 돼지로 갈음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노주례(勞酒禮)란 임금이 적전에 나아가 직접 농사를 짓는 친경, 적전에 심은 곡식을 수확할 때 임금이 직접 참석하는 친예(親刈),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는 친잠(親蠶) 등을 행한 뒤에 그 행사에 참여했던 관원과 백성에게 베풀던 잔치를 말한다.
친경 후 소를 잡아 국을 끓인게 아니라 돼지를 잡아 국을 끓여 나눠 먹었던 것이다.
정조(正祖) 19년 (1795) 6월 18일 자궁(慈宮 : 혜경궁 홍씨)의 진찬(進饌)에 저육탕(猪肉湯) 즉 돼지국밥 한 그릇이 올려 졌다.
조선후기 문인이자 관리였던 효전(孝田)심노숭(沈魯崇1762∼1837)이 쓴 『효전산고(孝田散稿)』「산해필희(山海筆戱)」에 "난 과연 소동파처럼 돼지고기 기벽이 있다. 서울 살 때에도 일찍이 미품을 찾아서 먹었는데 침교에 파는 것이 가장 맛이 좋아 서경의 오수집 돼지국과 같다.”라는 기록이 있다.
「산해필희(山海筆戱)」는 심노숭(沈魯崇)이 유배지 에서 부산 기장의 풍물·정취 및 자신의 감회를 간략하게 기록한 잡문(雜文)이다. 즉 이글은 부산 기장에서 돼지국밥을 먹으며 침교(서울 종로구 재동)와 서경(평양)의 돼지국밥 맛을 회상하며, 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산모가 돼지족발을 삶아 먹으면 젖이 많이 나고, 돼지꼬리를 먹으면 글씨를 잘 쓰고, 꿈에 돼지를 보면 복이 오고 재수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60~7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시골에서 어느 집 잔치가 있거나 명절 때면 돼지 돈부리를 한다.
돼지 돈부리 하는 날 `돼지 멱 따는 소리'처럼 반가운 소리도 없었다. 어쩌다 마을에서 돼지 멱 따는 소리가 들리면 아이든 어른이든 달려간다. 아이들은 빨리 가서 불캐(돼지 오줌보)를 얻어 내 오줌 빼내고 겉기름 뜯어내고 적당히 불어서 축구공으로 쓰기 위해서다.
돈부리를 할 때 구경을 하다보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간 등을 썰어 피 묻은 채 소금 찍어 입에 넣으면 비릿 달척지근한게 더운 맛이 야성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어른들은 가마솥에 내장 곱창 잔뜩 씻어넣고 무 줄기 말린 것도 넣고 한 두 시간 가량 장작불 때서 끓여 낸 돼지국에 막걸리 판을 벌인다. 이제는 이런 풍경은 사라진지 오래고 도축장에서 위생적으로 처리한 돼지고기를 사 삼겹살 구이나 수육을 먹는게 고작이다.
특히 내장을 이용한 요리는 재료 구입도 용이치 않지만 집에서 만들기가 쉽지 않으니 외식으로 맛 볼수 밖에 없다. 그런데, 왜 옛날 그 맛이 안 날까? 그래서 가끔 시골장에 가서 어렸을 적 추억의 음식을 찾아 나선다.
곡성장에 가면 돼지창자에 당면, 선지, 콩나물을 채운 돼지국밥이 있다.
밀양, 부산, 대구의 돼지국밥과는 전혀 다른 돼지국밥을 곡성 사람들은 '돼지똥국'이라고 부른다.
옛날 곡성을 비롯한 구례 등지에서 먹던 `가마솥 시레기 곱창국'을 이곳에서는 '돼지똥국'이라 한다.
'돼지똥국'은 돼지 돈(豚)이 경음화 되어 '돈국'이 '똥국'되었다는 설과 `구린내가 (살짝)나는 곱창국'이라는 뜻으로 부르는 별칭이라고도 한다.
'똥국'은 막 잡은 돼지에서 대창이나 소창을 걷어내 소금물로 깨긋이 씻고 그 안에 선지를 가득 채워 순대를 만들고, 하루 종일 돼지머리를 곤 국물에 머릿고기와 순대를 넣어 말아주는 것이다.
곡성읍내 여운천변에서 3일, 5일날에 열리는 곡성오일장터, 오일장에만 열리는 똥국집은 장터 가운데 식당가에 네 곳이 있다.
시원한 막걸리 한잔 걸치고 꼬릿꼬릿한 '돼지똥국' 을 먹으면 햋빛에 그을려 흙빛으로 늙어 가던 두엄 푸던 아버지의 인자한 얼굴이 생각이 난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