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동강 뗏목 축제로 되돌아본 뗏목의 역사

뗏목 사공으로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영월 홍원도옹의 회고.

김인규 기자 승인 2022.08.02 16:15 | 최종 수정 2022.08.01 09:53 의견 0

강원 영월군 주최, 재단법인 영월문화재단 주관 ‘2022 제25회 동강뗏목축제’가 7월29일(금)부터 31일(일)까지 영월 동강둔치에서 열렸다.

동강(東江)은 강원도 정선 조양강과 평창 오대천이 만나 흐르는 물길이 정선읍 가수리에서 동남천과 합수해 형성된 물길이다. 이곳에서 51km 흘러내린 동강 물길은 영월군 하송리에서 또 다른 물줄기 서강(西江)과 만나 남한강 상류로 흘러간다.

동강은 풍부한 수량이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와 더불어 수많은 동굴과 어라연 등의 비경이 강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특히 물살이 빠르지 않아 래프팅을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국내 최적지로 평가받는다.

동강 뗏목은 1867년 대원군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재건하기 위해 건축 목재를 얻고자 동강 상류의 소나무를 떼로 엮어 서울로 수송하면서 시작됐다. 철도, 트럭이나 육로 운송이 마땅치 않았던 시절, 뗏목은 먼 곳으로 나무를 운반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 시기에는 동강의 위급한 여울도 감수한 채 한밑천을 잡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떼꾼들이 몰려들었다. 크게 한 밑천을 잡는다는 의미의 '떼 돈을 벌다'라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그 후 1960년대까지 서울로 땔감이나 목재를 날랐으나 다양한 교통 수단과 댐의 건설 등으로 뗏목 운송은 사라졌다.

홍원도옹

강원도 영월에는 한국 유일의 뗏목 사공이 생존해 있다.

‘영월 FM라디오’ 홍성래 이사장의 부친으로, 영월군 삼옥2리 202에 거주하고 있는 홍원도(洪元渡)옹이 바로 한반도의 마지막 뗏목 사공이다. 홍원도옹이 스스로 ‘뗏 사공’ 혹은 ‘뗏꾼’이라 부르는 뗏목 사공이 된 것은 6.25 전쟁이 막 끝난 1953년. 1934년 11월28일 생이므로 19세때부터 동강 뗏목 사공이 됐다.

그러나 동강의 험한 물길위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삶은 이보다 2년전인 1951년부터였다. 당시는 너나 할 것없이 어렵게 살았고 홍옹의 집안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집안 살림에 보탬을 주고자 17세때부터 목선을 몰고 동강을 오르내렸다.

보통 목선은 하류로 내려갈 땐 2인 1조가 되고, 상류로 거슬러 올 땐 4인 1조를 이루었다. 목선은 주로 곡물, 소금, 생필품 등을 운반했기에 뗏목과 달리 물길을 거슬러 상류로 향하는 때가 적지 않았다.

이처럼 목선 사공을 하던 중 동네 형이 목선보다는 벌이가 몇배나 좋다며 권하는 바람에 뗏목으로 갈아탔다. 홍옹은 뗏목 사공 첫날부터 앞사공을 맡았다. 목선 사공 2년간 단 한번도 사고를 내지 않고 물길을 잘 잡은 것을 눈여겨 본 동네 형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었다.

뗏목 앞쪽에서 장애물을 피하고 방향을 잡으며 한층 힘을 써야하는 앞사공은 경험이 많고 힘이 좋은 이가 맡아야 했다. 당연히 앞사공의 노임이 뒷사공보다 많았다. 홍옹은 요즘으로 말하면 ‘꿈나무 뗏목 사공’이있던 셈이다.

뗏목은 나르는 목재의 용도에 따라 길이와 구성 방법이 달라졌다. 보통 뗏목의 세로는 약 30m, 가로는 4m가 기본이었다. 그러나 뗏목의 한 복판은 앞과 뒤쪽보다 조금 더 넓었다. 뗏목의 안정성을 강화, 뒤집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뗏목의 운반 거리가 멀면 멀수록 한 복판을 넓게 만들었다.

뗏목 나무를 엮는 재료도 거리에 따라 종류를 달리했다. 가까운 거리는 새끼로도 엮지만 거리가 멀면 칡이나 느릅나무 껍질을 사용했다.

세로로 나열된 나무를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가롯대는 주로 잡목을 사용했다. 건축자재의 재료로 쓰이는 세롯대는 모두 고급으로 길이와 굵기가 일정하고 곧아야 했다. 반면 가롯대는 세롯대를 잡아주는 역할만 하므로 굳이 고급 나무를 쓸 필요가 없었다. 이같은 가롯대를 ‘당타래’라 불렀다.

당타래는 세롯대 앞과 중간, 뒤에 하나씩 설치했다. 그러나 앞사공과 뒷사공이 위치해있는 발밑에는 하나씩을 추가, 모두 2개씩의 당타래를 엮어 놓았다. 사공들의 발놀림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뗏목 사공이라 해서 언제나 서울로 목재를 운반하는 것은 아니었다. 주로 단거리 운송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홍옹은 19세 때 처음부터 앞사공을 했을 만큼 소질을 인정받았기에 서울행을 자주 했다. 서울까지 뗏목을 운반하고 다시 영월로 돌아오는 데는 대략 20~25일이 걸렸다.

홍옹의 뗏목 사공 경력은 팔당댐이 들어서고 나서 끝이 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홍옹은 고단했지만 일반적인 직업보다는 ‘떼 돈’을 벌 수 있었기에 “7남매를 훌륭하게 키웠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자녀들은 모두 공무원 등 남들이 부러워할만큼 훌륭하게 성장한 것이다.

홍옹은 요즘 한글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 어린 시절 가정 형편상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것이 한이 돼 뒤늦게나마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

이외에 뗏목 사공 시절부터 지금까지 아쉬워하는 부분이 하나 있다. 동강다리 근처 벽에 조각되어 있는 ‘낙화암’이란 글씨를 좀더 의미있게 단장했으면 하는 것이다.

이 글씨는 비운의 왕 단종이 생을 마감하자 평소 모시던 시녀들이 동강 푸른 물에 몸을 던진 것을 기념해 누군가 낙화암이라고 조각해놓았다는 것이다. 비록 비극적인 사연이지만 나름대로 역사성을 지닌 이 조각 글씨를 잘 관리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비단 홍옹 개인만의 소망이 아니라 영월이 단종의 고장이라는 점에서 ‘낙화암’ 조각글씨에 대한 보다 큰 관심과 관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daylightnews.kr 김인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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