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은 내장 구이를 ‘호루몬야키(ホルモン焼き)’라 부른다. ‘버리다’라는 뜻의 ‘ほる(호루)’와 ‘물건·것’을 뜻하는 ‘もの(모노)’가 합쳐져 만들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1920년대 이후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온 조선인들이 현지인이 먹지 않고 버린 소나 돼지의 내장을 구워 먹는 장면이 목격됐다. 육식이 완전히 보편화하지 않은 일본인들의 눈에 내장을 구워 먹는 조선인의 모습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제2차세계대전기 및 점령기의 홋카이도(北海道) '아카비라 탄광(赤平炭鉱)'에서는, 조선인 광부가 소와 말의 내장을 삶아 먹었다고 하는 증언이 있다.

1942년에 발표된 김사량(金史良)의 소설 『오야카타코프세(親方コプセ)』 에는, 조선인 건설노동자인 토공(土工)이 밀조주(密造酒)를 마시면서 내장을 먹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평상시라면 버리던가 비료로 쓸 내장을, 조선인 여공(女工)이 얻어서 삶아 먹은 일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호루몬을 구워 먹는 ‘호루몬야키(ホルモン燒き)’가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고된 노동을 마치고 소주로 몸을 추스를 때 내장은 가장 좋은 안주였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하고 경제가 다 무너졌을 때 조선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내장 구이를 팔기 시작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더욱 심해져 조선인은 ‘호루몬’이라는 비하적인 표현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장을 꼬치에 꿰어 말아 숯불에 구워 먹는 ‘구시야키(串燒き)’는 단연 술안주의 으뜸으로 서민의 인기를 누렸다.

1906년 (메이지[明治] 39년) 의 고베신문(神戸新聞)에는 도축장 주변지역에서, 엉성한 대형 냄비에 잘게 썬 내장을 푹 끓인 것을 한 접시에 1전(銭)(엔[円]의 1/100 가치) 의 가격에 판매하는데, 가게 앞을 지나간 신문 기자에게는 이상한 냄새만 났을 뿐이었지만, 해질녘부터는 천객만래(千客万来)(많은 손님이 잇따라 찾아옴) 였다는 기사가 게재되어있다. 이윽고 내장육도 전문업자를 통해서 유통되었는데, 도시부(都市部)의 도축장 주변 이외의 지역에서도 저렴한 가격의 고기 요리로서 퍼져나가기 시작하였지만, 내장육이 결코 일반적인 식품은 아니었다.

1920년대에는 일시적이지만 「정력(精力)이 증진되는 요리」 라는 의미의 「호르몬 요리(ホルモン料理)」 를 판매하는 가게가 생겼는데, 계란 · 낫토(納豆) · 참마 등과 함께 동물의 내장을 판매하였다. 1930년대가 되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도 늘어났다. 예를 들어 오사카(大阪) 난바(難波)에 있는 가게인 「홋쿄쿠세이(北極星)」 를 운영하는 키타하시 시게오(北橋茂男)는 1936년 (쇼와[昭和] 11년) 무렵에 소의 내장을 프랑스풍의 양식(洋食)인 「호르몬 요리(ホルモン料理)」 로 만들어 제공하였고, 1937년 (쇼와[昭和] 12년) 에는 「키타호루몬(北ホルモン)」 이란 이름으로 상표등록(商標登録)을 출원하였다.

또한, 『요리의 벗(料理の友)』 에서는 1936년 (쇼와[昭和] 11년) 부터 1년에 1번씩 특집으로, 내장요리(内臓料理)가 「호르몬 요리(ホルモン料理)」 라는 이름으로 다루어졌다. 1940년 (쇼와[昭和] 15년) 2월호에서는 소와 닭의 내장을 버터로 굽는 등의 조리법이 게재되었다. 또한, 1936년 (쇼와[昭和] 11년) 에는 일본적십자사(日本赤十字社) 주최로 「호르몬 · 비타민 전람회(ホルモン・ビタミン展覧会)」 가 열려 강연이나 요리 실연(実演)이 이루어졌다.

또, 1920년대에는 도쿄(東京)에서 돼지의 내장을 꼬치에 끼워 소스를 발라 구운 「야키토리(やきとり)」 가 판매되기 시작하였는데, 1940년경에는 노동자와 일반 대중의 음식으로서 인기를 얻었다.

지금도 후지산 관광지나 마쓰리를 하는 신사 앞, 혹은 도시의 뒷골목 군데군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술집이 바로 ‘야키도리집(燒鳥の屋)’이다. 이 야키도리가 알고 보면 호루몬야키에서 진화한 음식이다. 자이니카 1세대의 흔적이 여기에도 남아 있는 셈이다.

식생활문화연구가 김영복